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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12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 백두산 그리고 발해의 역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를 맞이하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에 오른 후 북쪽으로 올라가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을 둘러보고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드디어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민족의 성산, 백두산을 가는 날 아침이 밝았습니다. 몸은 피곤하지만 들뜬 마음으로 4시에 일어나 중국식 아침 뷔페를 먹고 백두산 매표소로 향했습니다. 보다 빠른 시간 안에 백두산 천지를 보고자 각 조에서 한명씩 가서 매표소가 열기 전부터 줄을 섰습니다.nbspnbsp▲ 백두산으로 올라가는 매표소 앞.nbsp6시 정각 매표소가 열렸고, 선발대로 출발했던 매표 담당팀이 표를 흔들며 정문 앞 일행에게 다가왔을 때 모두 환호를 보냈습니다. 표를 나눠받은 조원들은 최대한 빨리 천지에 올라서 스님과 함께 경치를 즐기고픈 마음에 어린 아이들처럼 버스를 타는 곳까지 신나게 달렸습니다.nbspnbsp▲ 표를 받자 버스를 타기 위해 달려가는 청년들nbsp천지를 올라가는 봉고차는 89명이 탈수 있는 작은 차였는데 높은 천지까지 가파른 길을 롤러코스터처럼 올라 커브를 돌 때마다 짜릿한 기분에 모두 소리를 질렀습니다. 중국인 기사 아저씨께서 흥겨워하는 저희를 위해 한국 노래까지 서비스로 틀어주셨습니다. 커브를 돌아 한단 한단 올라가 천지에 가까워질 때마다 옆으로 보이는 경치는 놀라웠습니다.nbspnbsp▲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는 길nbsp끝없이 펼쳐진 푸르고 너른 광원, 그리고 빛나는 아침햇살이 점점 짙어지는 안개와 어우러져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었습니다. 또한 아름다운 햇살이 보기 어렵다는 천지를 볼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주어 매우 설레였습니다.nbspnbsp직접 눈으로 본 백두산 천지는 어느 사진, 어느 그림으로 보았던 것과도 달랐습니다. 크기는 백록담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광활했으며 호수의 푸르름은 영롱했습니다. 한반도에 이런 경치가 있었다니, 풍경을 보면서 이렇게 놀란 적이 있었나 할 정도로 백두산 천지는 아름다웠습니다.nbspnbsp▲ 백두산 천지nbsp걸어도 걸어도 계속 바위사이로 보이는 천지의 모습 때문에 호수가 34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전날 늦게까지 있었던 일정으로 인해 쌓인 피로가 천지를 보자마자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천지는 워낙 높은 곳에 있어 구름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날씨가 바뀌어 천지가 보였다 안보였다 했는데 저희가 올라갔을 때 눈부신 모습을 보여줘 참 감사했습니다.nbspnbsp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스님은 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스님의 법복이 얇아 보여서 무척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천지의 감동을 뒤로하고 비룡 폭포로 출발했습니다. 가는 길에 유황 냄새와 함께 땅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라 백두산이 화산임을 알게 해주었습니다. 나무 계단을 지나 도착한 비룡폭포 역시 그 웅장함에 모두 탄성이 나왔습니다.nbspnbsp▲ 비룡폭포nbsp폭포에서 흘러내려온 물에 손을 담가 보았는데 유황 온천수와 섞여 그런지 제법 높은 고도였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물이 차갑지 않고 미지근해서 신기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참가자 전원과 개별로 사진을 찍어주었습니다. 청년들은 “스님 곁에서 있는 것만도 감사한데 사진까지 찍어주시니 더욱 감사하다”며 기뻐했습니다. nbsp nbspnbspnbsp비룡폭포를 감상하고 울창한 삼림을 지나 모두 함께 동요를 부르며 소천지로 걸어갔습니다. 잊어버린 줄 알았던 동요를 부르니 마음도 함께 어려지고 순수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걸으면서 보이는 원시림의 자연그대로 모습도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용암으로 인해 생긴 커다란 바위를 뒤덮은 이끼와 군데군데 쓰러져있는 상태 그대로 있는 나무들이 멋스러웠습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큰 바위에 놀랐고 보송보송한 들풀이 예뻤습니다.nbspnbsp▲ 비룡폭포에서 소천지로 내려가는 길nbsp소천지는 정갈하고 고요했습니다. 물결이 없으면 완전히 거울같다고 하는 스님의 말씀에 그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경쾌한 저희 일행의 발걸음 때문인지 비온 뒤 수량이 많아져서인지 물결이 멈추지 않아 은거울의 모습은 보지 못해 살짝 아쉬웠습니다.nbsp▲ 소천지nbsp소천지를 나와 찾아간 녹연담은 정말 짙은 에메랄드빛의 녹색 호수였습니다. 군데군데 보이는 황금 잉어 때문에 호수는 더욱 신비로워 보였습니다.nbspnbsp▲ 녹연담nbsp어떻게 그리 아름다운 녹색이 나는지 궁금증을 가지며 지하삼림으로 향했습니다. 난생처음 보는 내 발 아래 숲의 모습에 놀랍고도 신기했습니다.nbspnbspnbsp▲ 지하삼림삼림욕을 몇 시간에 걸쳐 했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을 정도로 백두산은 여러 가지 매력을 가지고 있는 웅장한 산이었습니다.nbspnbsp점심을 맛있게 먹고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을 가는 길에 스님께서는 즉문즉설을 해주셨습니다. 각 차별로 한 명씩 질문을 했는데 통일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냐는 솔직한 질문에 대한 스님의 답변이 인상적이었습니다.nbspnbspnbsp통일이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어렵다고 포기하는 방법이 한가지이고, 어려운 와중에도 그 어려움을 극복하고 이겨내는 것이 한가지 방법이라고 하셨을 때 무엇인가에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단순하게 두가지 길이 있고 그 중 후자를 고르면 되는 것인데 어려운 문제라고만 생각했습니다. 통일만 잘하면 모두가 살고 싶어하는 남부럽지 않은 나라가 될 거라는 말씀에, 우리나라의 새로운 희망을 발견하는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또한 통일을 하려면 우리 스스로가 주체적인 생각을 가져야 한다는 말씀에 모든 상황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 초자연적 존재, 운에 맡기지 않았나 하는 반성을 하였습니다. 종속적으로 살지 말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나와 공동체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nbspnbsp강대국과 항상 부대껴 살아온 우리나라의 역사를 되짚어 주시면서 하셨던 말씀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강대국에 치여 산게 아니라 강대국과 맞서 싸우며 살아온 것이고, 나라가 크다고 좋은 게 아니라 신라가 유지할 수 있었던 저력이 고유한 문화였듯이 우리나라도 작지만 자긍심을 가질만 하다는 말씀에 이때까지 해왔던 인식이 전환되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거대한 보리수 나무도 그 씨앗은 콩알 만하다.”는 말씀에 정토회도 그 씨앗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씨앗이 발아하여 보리수 나무가 되어 남부럽지 않은 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을 그려보았습니다. nbspnbsp즉문즉설을 하며 언제 시간이 지나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버스는 벌써 발해의 첫 수도인 동모산에 도착했습니다. 거대했고 찬란했던 발해의 자취를 느끼기에는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동모산의 경우 중국에서 출입을 금지한다고 하여 더욱 아쉬웠고 무력한 기분도 들었습니다.nbspnbsp▲ 동모산nbsp그러나 스님은 이런 실망한 마음을 알아차렸는지 비록 시작은 작게 했지만 얼마나 큰 나라가 되었냐며 오히려 더 의미를 부여하며 동모산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제가 처음에 고구려 발해 유적지 답사를 할 때 누구의 안내도 안 받고 찾아 다녔어요. 그 때 제일 찾기 어려운 곳이 동모산이였어요. 아무리 봐도 성이 어디서 어디로 연결이 되어 있는지 못 찾았어요. 그런데 여기 보시면 아시겠지만 굉장히 작죠. 아마 실망하실 수도 있어요.nbspnbsp그런데 다르게 생각해보면 이렇게 조그맣게 시작을 했는데 그렇게 큰 나라를 이룬 것이잖아요. 그러니 시작이 중요한 거예요.nbspnbspnbsp서쪽에는 대석하라고 하는 조그만 강이 흐릅니다. 이 강을 자연 해자로 하고, 저쪽 능선을 따라서 성벽이 쌓여져 있어요. 저쪽에 꺽인 부분이 서문 자리입니다. 봉우리를 성벽이 빙 둘러싸고 있어요. 예전에는 서문 자리로 올라가서 성벽을 따라 빙 돌면서 함께 노래도 불렀는데 지금은 접근 금지를 시켜 놓아서 78년을 쳐다 보기만 하고 지나갑니다. 처음에는 쳐다 보는 것도 금지를 시켰었어요.nbspnbsp봉우리에 올라가서 보면 ‘이곳에 성을 쌓을 만했구나’ 알 수 있는데 옆에서 보면 평면으로 보이기 때문에 안 보이는 겁니다. 사면이 다 평지예요. 섬처럼 되어 있죠. 어느 곳에서 적이 쳐들어 와도 다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나라 군대가 이 먼 곳까지 쳐들어 올 이유도 적고, 쳐들어 오더라도 소규모 부대만 올 수 있으니까 충분히 막아낼 수 있었겠다 싶죠.nbspnbspnbsp첫 시작은 이곳에서 했지만 여기서 계속 살지는 않았겠구나 알 수 있죠. 그래서 여기서 2km 정도 떨어진 목단강 변에 영승유지라는 곳이 있어요. 그곳이 평지성 자리가 아닌가 싶어요. 평지성은 토성으로 쌓았기 때문에 거의 다 붕괴가 되었지만, 산성은 돌로 쌓았기 때문에 지금도 그냥 남아 있죠.”nbsp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먼 길을 도망쳐 온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우기에는 이곳이 적절했음이 헤아려졌습니다.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 앞에서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후 다음 장소로 이동했습니다.nbspnbspnbsp다음은 강동 24개석을 찾아 갔습니다. 24개석은 발해의 대표적인 유물인데 아직 이 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고 합니다. 도시의 도로가에 철창으로 둘러싸여 횡그러니 있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웠습니다.nbspnbsp▲ 강동 24개석nbsp무엇보다 ‘돈화’라고 하는 이 도시는 조선족자치주에 속해 있는데 간판에 한자와 함께 한글이 써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우리말이 써있어 반가웠으나 법으로 규정되어 있어 무조건 사전적으로 직역하여 써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어떤 글자는 거꾸로 뒤집혀 있고 단순히 한자를 번역해 놓는 수준에서 한글이 간판 표기용으로 이용되고 있어 사실상은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 같아 아쉬웠고, 이곳 사람들이 한글을 적극적으로 사용하고 싶게끔 통일이 되어 한단계 도약하는 부국한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도 해보았습니다.nbspnbsp▲ 한글을 잘못 붙인 간판nbsp저녁 식사 후 이어지는 스님의 강의는 발해에 대한 강의였습니다. 발해의 수도에서 강의를 들으니 몇 천년 전으로 돌아가 발해 조상들의 정신과 이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nbsp하지만 발해에 대해서 일정이 원래 3일이었는데 1.5일로 줄어들 정도로 방문할 유적지가 없고, 있어도 중국의 방해에 의해 방문할 수 없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하기에 앞서 스님은 고구려 패망의 이유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60년간 당나라와 전쟁했고, 강력한 독재 정책을 썼던 고구려의 마지막 모습이 오늘날 북한과 닮아있어 놀랐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공도 잘 막아내었지만 결국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서 피폐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고개를 숙이자는 온건 세력과 끝까지 싸우자는 강경 세력이 생길 수 밖에 없기 마련이였습니다. 왕정파 세력은 온건 세력이 많았고, 연개소문을 비롯한 군인 세력 중에는 강경 세력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오랜 시간 지나면 내분이 일어나게 되죠. 왕이 강경 세력을 배제하고 온견 세력의 뜻에 따라 당나라와 화친 관계를 맺으려고 하자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을 갈아치워 버렸습니다.nbspnbspnbsp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가 이뤄지고 천리장성을 쌓으면서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겪었어요. 현대판 천리장성이 바로 핵개발이예요.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북한의 핵개발과 닮았어요. 고구려가 당나라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천리장성을 쌓듯이 북한의 핵개발은 미제국주의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라고 하죠.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하는 것도 미국을 때리기 위한 것이죠. 그로 인해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고 난리가 나죠.nbspnbsp위기에 처해서 독재를 하게 되면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도 지금 반대파를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잖아요. 감옥에 넣어도 되는데 그냥 죽어버려서 누구도 반대를 못하게 하죠. 저도 옛날에는 연개소문이 나라를 위해서 외세를 막아내었다는 생각만 했는데, 북한을 경험하면서 저도 역사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어요. 연개소문이 외적을 물리친 것은 잘한 것이지만 과연 백성들은 행복했을까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 면에서 결국 당나라로부터 고구려를 지킨 것도 연개소문이지만 장기적으로 고구려가 멸망한 것도 연개고문의 영향이 컸던 겁니다. 그것처럼 북한의 체제를 지켜내는 것도 강경 세력 때문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이들 때문에 지탱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nbspnbsp국가라는 것은 지켜내야 하는 것이고 자주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항상 그것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기 때문에 자주를 지켜야 하고, 사람을 위하기 때문에 안보를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은 죽어도 되는 것은 안 됩니다. 통일을 하더라도 그 속에 사는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nbspnbsp이념적인 강경 세력이 꼭 진실은 아니라는 것이죠. 어릴 때 민족적인 성향을 공부하던 것과 현재의 북한에서 일어나는 사실들을 갖고 공부하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국가를 위하는 것은 참 중요하지만 그것이 지나쳐서 국가주의가 되면 그 국가 안에 살고 있는 국민들이 희생된다는 것입니다.nbspnbsp고구려가 단기적으로는 당나라에 강경하게 대응해서 굴복하지 않았지만 연개소문이 죽자 그 독재 권력을 누가 차지하느냐를 갖고 아들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권력을 잃은 아들이 당나라를 끌고 들어와서 결국 나라가 패망하는 비극적인 결말에 도달했습니다.nbspnbsp고구려 패망의 원인은 첫째 당시 세계에서 제일 강한 나라인 당나라와 60년 전쟁을 하다보니 점점 피패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째, 그러다보니 강경 세력과 온건 세력이 있는데 온건 세력이 타협을 하려 하니까 강경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서 더욱더 강경하게 나가게 되었습니다. 셋째, 천리장성이라는 엄청난 공사가 주민들을 곤궁하게 만들었습니다. 자발적으로 사람들이 애국심을 갖게 한 것이 아니라 강경한 강요에 의한 저항을 하게 되니까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기기 되었고, 나라를 지켜야 할 자발적 저항 정신도 점점 약해졌습니다. 넷째, 마지막 계기는 권력 분쟁이 일어나면서 오히려 적에 가서 아부하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nbspnbsp연개소문이 적을 물리치는 강력함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잘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오늘날 북한을 겪으며 생각이 달라졌다는 스님의 말씀을 듣고 정말 고구려의 백성들이 행복했을지, 오늘날 북한의 국민들은 어떨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역사가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nbspnbsp북한 이야기가 나오자 통일과 인도적 지원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에 대해서도 설명해 주셨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통일을 하는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도적 지원이 없는 통일, 북한의 체제가 무너지기만을 기다리는 통일은 ‘사람을 외면한 통일’이었습니다. 스님이 직접 북한의 대량 아사사태를 접하고 행하셨던 ‘북한동포살리기운동’에 대한 여러 가지 장애물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북한하면 북한의 사람보다 막연히 김정은이라는 독재자 한명으로 대등시하고 있지 않았는지 반성했습니다. nbsp nbspnbsp마지막으로 중국은 역사를 문명사적으로 접근하고 우리 나라는 민족적으로 접근하여 역사를 다루는 범위가 훨씬 중국에 비해 적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우리도 문명사적으로 접근하여 보다 폭넓은 역사관을 가지고 다양했던 우리의 선대와 이어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발해가 멸망하면서 동북아에는 큰 역사적인 전이가 일어났습니다. 요나라가 동북아를 지배하고 송나라를 압박했죠. 그 다음에 나라를 한 번도 세워본 적이 없던 여진족이 일어나서 금나라를 세워서 송나라를 남쪽으로 밀어내서 남송을 만들었죠. 송나라 황제가 금나라의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러자 저 서쪽에 있던 몽골족이 일어나서 원나라를 세워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저 아래로 내려가서 송나라도 멸망시키고 대제국을 건설했죠.nbspnbspnbsp아무튼 발해 시대까지는 우리 민족이 중심이 되다가 발해가 멸망하면서는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민족들이 전부 일어나서 제국을 건설합니다. 그래서 동북아의 역사를 우리 민족에만 한정하면 대륙을 잃은 것이 됩니다. 그러나 민족이 아니라 문명적으로 보면 동북아 대륙은 우리가 잃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래 있던 다른 민족이 일어나서 요나라, 금나라, 원나라를 세웠고, 한족에게는 명나라 때 이 지역을 한번 빼겼을 뿐이죠. 다시 청나라가 일어나서 또 장악을 했죠. 그 뒤는 일본이 들어와서 만주국을 건설했죠. 그래서 동북아 지역이 한족의 지배를 받은 것은 첫번째가 한사군에 의해서였고, 두번째가 원나라가 망하면서 명나라에 의해서였고, 세 번째는 지금입니다. 이렇게 단 세 번 밖에 없어요.nbspnbsp오히려 동북 민족이 중원을 재패한 것은 여러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우리 민족이였던 은나라였고, 그 다음은 선비족이 세운 연나라였고, 그 다음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 그 다음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가 들어가서 장악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크게 문명사적으로 보면 자기 지역을 장악한 것이고 자기 지역 안에서 정권 교체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를 작은 민족 단위로 보기 보다는 문명사적으로 볼 필요가 있습니다. 중국은 역사를 민족사적으로 보지 않고 문명사적으로 보니까 원나라와 청나라도 자기 역사의 일부로 보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식민 지배를 받았다고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너무 좁은 의미의 민족사로만 보니까 우리 역사는 작아지는데, 중국은 그것까지 다 포용해서 자기들의 역사로 만드니까 역사가 어마어마하게 커져 버린 것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것을 북방 민족과 남방 민족의 문명사적 갈등과 협력 관계로 본다면 지금까지는 아직 대등한 관계에 있었던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것도 중요하지만 역사를 어떻게 볼 것이냐도 굉장히 중요합니다. 민족사로 보면 발해 이후의 역사를 잃었다고 볼 수 있지만, 발해 이후에는 우리의 다른 종족들이 일어나서 동북아 대륙을 점령한 것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서 이제는 인류 문명사적인 관점으로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럽도 자기들끼리 싸우다가 이제는 하나로 연대하잖아요. 그것은 다시 이슬람 문명과 충돌하기도 하잖아요. 그리고 중국과 인도 문명도 있고요. 이제는 이웃나라만 보는, 적의 적은 동지라고 하는 원교근공책의 문제가 아니예요. 문명적으로 비슷한 나라끼리 통합해가는 이런 시대입니다. 이렇게 과거를 배우면서 우리는 늘 미래를 생각해야 돼요.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것을 기억하려고 이렇게 고생하면서 다니는 게 아니잖아요. 여기서 어떤 아이디어를 얻어서 어떻게 우리의 미래를 설계하고 개척할 것인가가 핵심입니다.”nbspnbsp문명사적으로 역사를 해석한다면 우리의 정신과 역사적 감수성이 좀 더 풍부해질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잃어버린 역사를 직접 찾아다니는 것도 중요한 일이지만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도 중요하다는 말씀에 좀 더 우리의 역사관을 동북아 지역으로 확장시켜 생각의 깊이를 넓히고 싶어졌습니다. nbspnbsp이어지는 조별 나누기에서도 가장 많이 나왔던 이야기는 단연 사람을 앞세운 통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동북아 역사기행을 왔던 이유도 모두 사람을 위해서인데 홍익인간을 제창했던 우리 민족이 왜 통일을 말할 때 자꾸 사람을 배제할까 하는 어느 조원의 나누기에 모두 숙연해졌습니다. 북한이 극한에 처해 있는 것은 알았지만 남한도 통일에 있어서는 극한에 처해있는 것 같아 느끼는 바가 많았습니다.nbspnbspnbsp더 많은 청년들이 동북아 역사기행에 와 선조들의 역사가 스며든 이 땅을 직접 두 발로 느끼고 같은 역사를 지녔던 북한의 국민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커지기를 기원했습니다. 비록 동북아 역사기행의 하이라이트였던 백두산은 오늘 여정으로 끝이 났지만 우리의 가슴은 뜨거운 무엇인가로 가득차게 되었습니다. 몇 천년 전 선조들과의 교감, 북한 주민에 대한 사랑이 아닐까 싶습니다. nbspnbspnbsp내일은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 유적을 둘러본 후 오후에는 봉오동 전투터로 가서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리고 두만강 건너편으로 한반도 최북단 마을과 함북 온성군을 바라본 후 연길로 가는 일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김다정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8.11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압록강과 북한
▲ 발해 영광탑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를 맞이하여 압록강을 따라 달리며 북한의 모습을 본 후 북한의 현실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벌써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날입니다. 오늘은 집안에서부터 통화, 백산, 림강, 장백을 거쳐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가며 백두산 서편 산문을 통과해 이도백하까지 버스로만 10시간, 거리로는 700km가 넘는 거리를 이동하는, 그야말로 대장정이라고 할 수 있는 일정입니다.nbspnbsp1600여 년 전 고구려의 수도였던 국내성을 뒤로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 속에 장구하게 흘러온 강인 ‘압록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70년 전까지는 남과 북 모두를 감싸 흐르던 그 푸른 강물을 이제는 먼 나라 손님처럼 그 너머에서만 바라볼 수 있음에, 이 경계를 넘어서지 못함에 마음이 먹먹해집니다.nbsp▲ 북한의 뙈기밭nbsp버스 차창 밖으로는 맑고 깨끗한 하늘 아래 손에 닿을 듯 너무나도 가까운 북한 땅이 보입니다. 두 눈에 담기는 저 너머의 풍경이 너무 생생하고 가까워 오히려 여기가 정말 북한 땅이 맞나 하는 이질감이 들 정도입니다. 소를 치는 사람들, 강변에서 빨래하는 아낙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만약 창문을 열고 ‘안녕하세요?’ 인사를 건넸다면 우리네 말로 대답이 돌아왔을지도 모릅니다.nbsp▲ 버스 창 밖으로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는 청년들nbspnbsp림강의 4도구를 지나면서 보이는 북한의 풍경은 마치 우도의 풍광처럼 약간은 이국적이며 멋스러워 보이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스님께서 들려주시는 북한의 실상을 듣고 나니 원경의 아름다움은 저 멀리 사라지고 근경의 처절함과 고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45도 이상의 경사를 이루는 가파른 비탈길을 올라가 산 정상까지도 뙈기밭으로 경작해야만 했던 상황 속에서 굶주림과의 처절한 싸움을 벌이는 북한 동포들의 실상이 이제야 마음에 와 닿습니다. 몇날며칠 끼니를 거른 채로 그냥 서있기 조차 힘든 가파른 경사를 올라 괭이질을 하고, 돌을 캐내고, 다시 강가까지 내려와 물을 퍼 올렸을 북한 동포의 전쟁 같은 하루하루가 그려지니 잠시나마 경치에 감탄한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경치에 감동하던 감수성을 단도리하게 됩니다.nbsp196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북한은 대동강의 기적이라 불리며 가파른 경제성장을 이루었습니다. 1958년부터 62년까지 대기근을 겪었던 중국의 많은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넘어와 정착한 수만 10만을 넘었었고, 남한에 비해서도 훨씬 잘 사는 나라가 북한이었습니다. 그런 북한이 왜 갑자기 몰락하게 되었는지 스님은 자세히 이야기를 풀어 주었습니다.nbspnbsp“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 식량난을 겪게 되었습니다. 1953년에 한국 전쟁이 끝나고 북한은 미군 폭격에 의해서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천리마 운동이라고 해서 온 인민이 힘을 합해서 전쟁 복구 작업을 했습니다. 그래서 60년대에 들어오면서 10년 만에 북한은 제3세계 식민 지배를 받았던 나라 중에서는 가장 잘 산다고 할 만큼 경제 성장을 했습니다. 세계에서는 대동강의 기적이라고 불릴만큼 발전이 앞섰습니다. 60년대 후반과 70년대 초반에 농촌에서 트랙터로 농사를 짓는 기계화를 이미 완성했고요. 모든 시골에 전기가 다 들어가고, 전기로 상수도 시설을 만들고, 중국은 굶어죽는 사람이 있는 정도였는데 압록강과 두만강 변에도 도로를 다 닦았습니다. 남한에 비해서도 훨씬 잘 살았습니다. 그런 북한이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을까요?nbspnbspnbsp첫 번째 문제는 60년대 후반 70년대 초반의 중소 분쟁입니다. 중국과 소련 간에 이념 갈등이 생겼어요. 중소 분쟁이 생기니까 북한 정부를 구성하던 사람들 중에는 중국 모택둥의 동북연군 산하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 많았고, 또 연해주에서 항일 운동하거나 소련 유학파들도 많았고, 또 국내에서 공산주의 활동을 했던 박헌영을 주축으로 한 남노당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용대를 조직했던 김두봉 부대 등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북한 정부를 구성한 주축 세력이였습니다. 그런데 6.25 전쟁의 실패 책임을 남노당에게 물어서 박헌영과 그 일파가 제거가 되었습니다. 즉 국내파는 다 제거되고 해외파만 남게 되었는데 중소 분쟁이 일어나니까 자신들의 배후가 하나는 중국, 하나는 소련 이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내부에서 ‘중국 노선이 옳다’, ‘소련 노선이 옳다’ 이렇게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어요. 이럴 때 김일성 주석이 ‘우리는 중국도 소련도 아니고 우리가 주체이다’ 라고 하면서 주체 사상을 내세우면서 노선 투쟁을 하는 과정에 연안파와 소련파를 종파 분자로 낙인 찍어 모두 숙청해 버렸습니다. 이것이 주체 사상이 나오게 된 배경입니다. 정부를 구성하는 다양한 배경의 정치 세력이 있었는데 차례 차례로 숙청이 되면서 김일성의 유일 주체 사상으로 정리가 되고 독재 체제가 강화가 되는 형국으로 갔습니다.nbspnbsp그런데 70년대 들어오면서는 한국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성과로 북한 경제와 거의 비슷해집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어느 누구도 상대를 제압하기는 어려운 상황이 되자 72년도에 남북 간에는 7.4 공동성명이 나오게 됩니다. 그러나 남쪽은 유신 체제를 통해 바로 독재로 가고, 북쪽은 유일 주체 사상을 통해 독재로 전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북한 경제는 60년대 고성장에서 70년대에는 저성장으로 빠져듭니다.nbspnbsp70년대부터는 사상 투쟁을 많이 벌립니다. 기술보다는 사상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을 하면서 절대 충성을 하는 사람이 대우 받고, 과학자라든지 합리적인 사람들이 밀려나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서 북한은 저성장 국면으로 빠지고, 8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쪽은 더욱 고성장을 하면서 남북 간에 치열한 경쟁이 이뤄집니다. 특히 88년도에는 서울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은 서울을 새로 가꾸었고, 북한도 평양 시내를 서울에 버금가도록 만들기 위해서 과다한 투자를 하게 됩니다. 이런 과잉 투자가 나중에 북한 경제에 큰 타격을 주게 됩니다.nbspnbsp그리고 김일성 주체 사상을 주장하면서 주체탑, 주체동상 이런 것들을 전국에 건설하고, 사상을 강조하는 등 비경제적인 분야에 많이 투자를 함으로해서 경제가 정체 국면에 들어갔습니다.nbspnbspnbsp89년에는 동유럽이 해체되면서 동유럽에 수출하는 상품이 많았는데 수출의 활로가 막혀 버렸습니다. 또 중국이 시장경제화 되면서 사회주의식 물물교환 거래가 모두 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졸지에 무역 상대를 다 잃어버렸지만 미국의 대북 봉쇄 정책으로 인해 자본주의와의 일체 거래도 막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이 되어 버린 겁니다. 북한 경제는 급전직하로 내리막길로 갔습니다.nbspnbsp가장 핵심은 외환 고갈입니다. 무역 거래가 중단되니까 외환이 고갈되고, 외환이 고갈되니까 국가 부도가 나버린 겁니다. 그래서 석유 수입을 못하게 되니까 에너지가 없어서 자동차 운행을 못하고, 발전기도 멈춰버렸어요. 석탄 캐는 탄광은 물을 계속 퍼내면서 일해야 하는데 전기가 공급되지 않으니까 물이 다 차버려서 탄광이 중지되어 버렸고, 무산 철광도 철광석을 자동으로 청진으로 이동하도록 되어 있었는데 다 중지가 되어 버렸고, 기차도 못 다니고, 즉 전기 공급이 끊기면서 모든 산업이 다 중단되어 버린 겁니다.nbsp농업도 비료 생산도 안 되고, 비닐 생산도 안 되고, 농기계 생산도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식량 생산량도 급격하게 줄어들었습니다. 식량 생산량이 급격하게 줄어드니까 농민들이 자신들도 먹을 것을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잉여 생산량을 정부에 제출할 수가 없게 되고, 정부는 이걸 받아서 노동자에게 공급해야 하는데 노동자들에게도 공급할 식량이 없어진 겁니다. 그래서 함경도 지역의 노동자들이 식량 배급을 못 받게 되고, 배급을 받아서 먹고 사는 사람이 배급을 못 받으니까 그냥 다 굶어죽게 된 것입니다.nbspnbsp그렇게 90년대 들어와서 식량이 곤궁해지다가 94년, 95년에 대홍수가 일어나면서 식량 생산량이 더욱 떨어지게 되니까 한 두명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대량 아사로 가게 됩니다. 빈부 격차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부터 굶어죽을텐데 평등을 유지하다 보니까 집단으로 굶어죽게 된 겁니다.nbspnbsp이 대량아사는 지역적으로는 함경도 쪽의 동부에서 시작해서 서부로, 노동자 계층에서 시작해서 농민 계층으로 확대 되었습니다. 농민들은 농사를 지으니까 처음에는 괜찮았는데 식량 생산이 떨어지니까 정부 입장에서는 군인도 먹어야 하고 관리도 먹어야 하니까 농민들이 먹을 양을 남겨 두고 가져가는 것이 아니고 처음에는 10개월치 먹을 것만 남기고 가져가다가 이제는 6개월치 먹을 것만 남기고 가져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농민들도 봄이 되어서 굶어 죽게 된 겁니다.nbspnbsp농민들은 죽어라고 일해봐야 먹을 양식도 못 구하니까 집단 농장인 문전옥답에서 농사 짓는 것을 게을리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고는 산에 올라가서 나무를 베어내고 자기가 개간한 뙈기밭을 만들게 됩니다. 뙈기밭에 옥수수와 콩을 심으면 그건 개인 소유가 되기 때문이죠.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새벽에 올라가서 개간하고, 퇴근하고 밤 늦게 오라가서 가꾼 땅이 뙈기밭입니다. 만약 뙈기밭이 없었다면 북한 주민들은 더 많이 굶어죽었을 겁니다. 그러니 집단 농장에서 짓는 농사는 자기 것이 안되니까 제대로 짓지 않게 되었겠죠. 힘을 비축해 둬야 저녁에 퇴근해 와서 또 뙈기밭에 올라갈 것 아니겠어요? 이렇게 노동력 마저도 농업에 제대로 제공이 안 되니까 식량 생산량은 더욱 떨어지게 된 겁니다. 국가적으로는 더욱 나빠졌지만 개인은 어느 정도 버틸 수가 있게 된 것이죠.nbspnbsp이렇게 해서 북한의 대량 아사는 도시 만이 아니라 농촌으로, 동부 만이 아니라 서부로, 일반 평민 뿐만 아니라 당원에게까지 확대되면서 94년부터 98년까지 일어났습니다. 저는 95년도에 역사기행을 왔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었고, 96년도에는 다시 와서 확인하고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내 눈 앞에 벌어진 일을 내가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96년부터 북한동포돕기 해야 된다고 정토회에 제안을 했는데 정토회는 정토회관을 짓기 위해 모금도 하고 땅도 구입하고 설계도까지 완성해서 착공하기 직전이였기 때문에 반대가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그랬어요.nbspnbsp‘건물은 올해 못 지으면 내년에 짓고 내년에 못 지으면 10년 후에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한번 굶어 죽어버리면 다시 못 살리지 않느냐’nbspnbsp그래도 어렵다고 해서 ‘그럼 나만 나와서 할게’ 했더니 실무자 두명을 붙여주어서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그해 연말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2월에 강원도에 감자가 남아 돌아서 섞는다고 해서 종교단체들이 연합해서 감자 100트럭을 사서 북한에 보내는 것을 시작으로 해서 북한 인도적 지원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매일 전국을 울고 불고 다니면서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그 때 우파는 ‘군량미를 모으기 위해 식량난을 과장하고 있다. 거기에 좌파들이 부화뇌동하고 있다. 우리가 보낸 식량 총알 되어 돌아온다.’ 이렇게 주장했어요. 그래서 정말 식량 상황이 어떤지 알아보기 위해 제가 북한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정부에서 허락을 안 해줘서 못갔어요. 대신 압록강과 두만강을 다니면서 이곳에서 북한 난민들을 만나 자세한 소식을 듣게 된 겁니다. 한 두명 굶어죽는 것이 아니라 마치 가을 바람에 낙옆 떨어지듯이 대량 아사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국에 와서 아무리 얘기해도 논쟁만 되었고, 그러던 중 97년 하반기에 대통령 선거에 돌입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이 문제는 묻혀 버렸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미국으로 건너가서 호소하게 되었어요. 미국의 의회, 국무성, CIA 등 안 가본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미국 사람들은 증거를 가져오라고 했는데 북한에서는 이 문제를 자꾸 숨기니까nbspnbsp98년부터는 미국에서 북한에 인도적 지원이 재개가 되고, 국제 사회가 협력하고, 99년에는 한국 정부도 북한에 식량을 지원하게 되고, 이러면서 북한의 대량 아사가 줄어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나는 외부에서 지원이 있었던 것이 효과가 있었고, 다른 하나는 이미 죽을만큼 죽은 뒤였기 때문입니다. nbspnbspnbsp▲ 뙈기밭 사이로 흘러내린 토사가 삼각지를 이루며 그대로 쌓여 있는 모습. 중장비가 없어서 복구 작업도 요원한 상태.nbspnbsp저는 북한의 뙈기밭을 보면 세계 문화 유산에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이 어느 정도로 할 수 있느냐. 사실 이건 기적이예요. 이렇게까지 사람이 죽지 않고 살려고 애를 썼다는 거잖아요. 여기만 이런 것이 아니라 전 국토가 이렇거든요. 북한이 잘 했다가 아니라 나쁜 짓을 많이 했더라도 거기에 살고 있는 일반 백성들이 저렇게까지 먹고 살려고 애를 쓰는데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해요? 이념을 떠나서 식량을 지원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저런 놈들은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이 점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합니다. 감정이 격해지면 살아있는 사람도 죽이게 되듯이 우리도 ‘그 놈의 새끼들, 왜 주냐’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실 북한 주민들의 대량 아사는 우리가 방조한 것과 다름 없습니다.”nbspnbsp북한의 대량 아사는 우리가 방조한 것과 다름 없다는 말씀에 가슴이 먹먹해 집니다. 그리고 건물은 올해 못 지으면 내년에 다시 지으면 되지만 사람은 굶어죽으면 다시 살릴 수 없지 않느냐는 말씀은 큰 울림이 되어 계속 뇌리에 남았습니다.nbspnbsp림강의 8도구를 지나고 저 멀리 김형직군이 보입니다. 김형직은 김일성의 아버지인데 이곳은 김일성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유일하게 김일성의 어린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을 세워두었습니다. 한 도시의 이름을 사람의 이름으로 지었다는 것도 신기한데 버젓이 커다란 동상을 도시 한 가운데 세운 것을 직접 눈으로 보니 한 사람을 신격화하며 독재 체제를 유지해나가는 북한이라는 나라가 아직은 멀게만 느껴지기도 합니다.nbsp스님이 이야기하는 동안에 압록강을 타고 저 멀리서 나무를 운반하는 뗏목이 내려왔습니다. 정말 장관이였습니다. 오징어처럼 머리가 쭈삣하도록 해서 앞에서 조정을 하면서 내려왔습니다. 스님이 “통일이 되면 사흘 정도 압록강에서 저 뗏목을 타고 내려와보면 참 좋겠죠?” 하고 물으니 청년들은 “네” 라고 대답했습니다.nbspnbspnbsp▲ 북한에서 압록강을 통해 나무를 운반하는 뗏목nbsp그러자 스님은 “이렇게 좋은 버스 타고 다니는 것도 힘들다고 하면서 뗏목이 과연 타질까?” 하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구경하는 사람은 좋지만 저 뗏목 위에서 먹고 살면서 내려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예요. 그래서 이것은 여름에만 볼 수 있어요”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뗏목은 이렇게 일곱 차례에 걸쳐 연달아 내려오면서 연신 탄성을 자아내었습니다.nbspnbsp어른 키보다 조금 더 높은 빽빽한 옥수수 밭을 지나 버스를 타고 4시간을 더 가니 ‘장백조선족자치현’를 만나게 되었는데, 이곳에는 발해 유일의 탑인 ‘영광탑’이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45도 경사의 계단을 하나하나 밟고서 10분정도 올라가니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영광탑이 드러났습니다.nbspnbsp▲ 영광탑으로 올라가는 계단nbsp수학여행 때 눈앞에서 바라보던 신라, 백제의 탑과 같이 내 눈 앞에 실재하는 발해의 탑을 보고나니 발해의 역사가 저 너머 멀고 먼 만주벌판의 것이 아니라 우리 땅 안에서 버젓이 숨 쉬고 있는, 우리의 역사 속의 살아있는 유물이라는 것이 이제야 피부에 와 닿습니다.nbspnbsp스님은 영광탑 앞에 서서 먼 길을 달려 이곳까지 온 청년 역사기행단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발원과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발해 멸망 후 1100여년이 지난 뒤에서야 저희 후손들이 이곳에 찾아와 탑전에서 공양 올리고 예배하옵니다. 조상님들이시여. 저희들을 부디 나무라지 마시고 저희의 이 공양을 받으십시오.nbspnbsp저희 대중 일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환인 하느님, 환웅 천왕님, 단군 왕검님, 해모수님, 고주몽님, 대조영님을 비롯한 민족의 원류를 쫓아 그 발자취를 찾아다니며 학습하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거슬러 백두산에 올라 천지 신명님들께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가 정착되기를, 더 이상 남북이 갈등과 대립을 벗어나 서로 협력하고 마침내는 하나 되어 통일되기를 기원하며 이렇게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간절한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오늘 압록강 상류를 거슬러 오면서, 건너편 북녘 산하를 보면서, 동포들의 굶주림의 고통을 늦게 나마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고, 저렇게 살기 위하여 서 있기도 힘든 저 비탈에서 땅을 뒤지고 곡식을 심는 등 그 아픔을 저희들은 몰랐습니다. 곁에 있어도 알지 못하면 없던 일이 되듯이 저희들 살기가 바빠 동포의 아픔을 외면한 그 큰 죄를 이렇게 늦게 나마 참회하오니 저희의 이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300만이나 되는 동포들이 굶주리고 병들어 죽었고, 그 와중에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으며 온갖 인권 침해를 받는 수모를 겼었지만, 저희들이 그 아픔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저희의 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을 참회하며 지금이라도 이제 다시는 이런 아픔이 생겨나지 않도록 남북이 과거의 원한을 잊고 서로 화해하고 협력하여 통일의 그날이 오도록 저희 청년 대중들 모두 정성을 다할 것을 발원하옵나니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륭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영가님들께서는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또한 오늘 이렇게 발해의 영광탑을 참배하고 불공 올린 인연 공덕으로 이 젊은이들 행복하고 건강하고 슬기롭고 자신들이 세운 원들이 성취될 수 있도록 해주시옵고, 또한 이 여행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천지 신명님들이시여 이들을 돌보고 옹호하여 주시옵소서.”nbsp스님께서 하시는 발원 속에서 1100년 만에 찾아온 후손으로서의 죄송함이 느껴지며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잊어버리면 곧 잃어버리는 것인데 잊어버리지 않도록, 잃어버리지 않도록 노력해야겠다는 마음이 일게 됩니다.nbspnbsp그리고 영광탑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영광탑 앞에서 바라보이는 북한 혜산시를 바라보며 이승용 선생님으로부터 좋은벗들의 난민 구호 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이곳 ‘장백조선족자치현’은 또한 북한에서 넘어오기는 쉬우나 경비가 삼엄하고 주변 도시로의 교통로가 연결되어 있지 않아 북한 난민들이 열이면 열, 다시 북한으로 붙잡혀 들어가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90년대 후반 북한의 대량아사로 인해 탈북한 동포들의 가장 처참했던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곳이지요. 스님께서 굶주림을 피해 이곳을 건너온 동포들을 돕기 위해 하셨던 수많은 일들을 듣고 나니 나만의 풍족함만을 쫓아 달려온 시간들이 죄스러워지고 앞으로 내가 동포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세상에는 힘들고 모두가 하기 꺼려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내가 해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백두산을 향해 4시간 여 정도를 더 달려 백두산 중턱의 서편 산문 입구에 있는 강원도 식당에 도착했고, 그 이름과 걸맞게 지금까지 중 가장 우리 입맛에 맞는 얼큰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식사가 후 모두가 진심으로 즐겼던 노래 장기자랑을 끝내고 스님의 lt북한사회 · 북한사람gt 강연을 들었습니다.nbspnbsp“고구려의 수도인 집안에서 백두산을 향해서 끝없이 올라와서 백두산의 남편과 서편에 이르렀습니다. 오늘 잠은 백두산 북편에 가서 잘 예정입니다. 지금 우리는 백두산의 몸 속을 달리고 있습니다.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오른다는 것은 백두산의 얼굴을 본다는 뜻이 되겠죠. 백두산은 우리 민족에게 있어서 단순한 산이 아니라 민족의 신앙입니다.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올라보면 왜 우리 조상들이 민족 정기의 표상으로 삼았는지 아마 알 수 있을 겁니다.nbspnbsp그리고 우리는 압록강을 따라오면서 북한을 보았습니다. 북한이 왜 식량난을 겪게 되었는지는 앞서 말씀드렸고, 저희들은 그동안 많은 활동을 해오면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 해결, 인권 개선도 결국 남북한의 화해와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해결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자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대응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은 어느 나라든 다 마찬가지겠죠. 그렇기 때문에 북한은 인민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체제 유지가 우선이기 때문에 인민의 생존권과 인권에 아랑곳하지 않고 핵무기를 개발하고 민중의 고통도 외면해 왔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북의 긴장을 완화해야지만 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nbspnbspnbsp저도 미국에 찾아가서 한반도의 평화 문제를 간절히 호소했고, 특히 2005년 9.19 합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계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미국 쪽 대표가 합의가 있자 마자 바로 메일을 보내서 스님의 고견이 합의를 이끄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했었습니다. 그래서 9.19 합의가 문제를 합리적으로 푸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닌가 해서 희망을 가졌는데 이 합리성 만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한국에서도 정권이 바뀌고 남북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습니다. 파탄에 이른 정도가 아니라 전쟁 위기에 내몰릴 정도가 되었습니다.nbspnbsp또 미국은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동아시아 전략으로 미일 동맹을 굳건히 하면서 거기에 한국을 참여시키기 위한 한미일 군사 동맹을 요구하고 있어서 지금 한국은 굉장히 어려운 국면에 놓여 있습니다. 만약에 한미일 군사 동맹에 참여하게 되면 통일이 물건너 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중국과의 긴장이 고조됨으로 해서 한국 경제는 그렇지 않아도 정체 국면인데 바로 마이너스 국면으로 전환할 수 밖에 없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이 문제를 어떻게 지혜롭게 풀어갈 것인가. 이것이 과제입니다. 여러분들은 너무나 당연하게 개인의 취직 문제나 결혼, 연애에 관심이 갈 수 밖에 없겠지만, 그러나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한국 사회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이제는 정체 국면에서 붕괴 국면으로 나아갈 위기에 놓여 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첫째, 최소한 우리가 피땀으로 이뤄놓은 인명과 재산을 훼손하지는 말아야 겠다. 즉 이 땅에 다시는 전쟁은 없어야 되겠다 하는 우리들의 안전을 위한 우리들의 각오가 필요합니다.nbspnbsp둘째, 전쟁이 없는 것은 임시적 해결책이지 본질적 해결책은 아닙니다. 결국 완전환 평화를 가져오는 길은 통일입니다. 현재의 손실을 잃지 않는 것이 평화이지 미래의 이익까지 담보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미래의 이익을 담보하려면 우리는 통일로 나아가야 됩니다.nbspnbsp그러면 어떻게 통일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선 주변에 있는 4강들이 한반도의 통일이 자신들에게 손해인지 이익인지 불확실해 합니다. 그래서 주변국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통일에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결국 당사자가 얼마나 노력하느냐에 따라서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당사자 중에서는 북한이 적극적으로 나서면 되지 않겠느냐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북한은 현재 통일을 추진할 만한 역량이 안 됩니다. 그래서 북한이 통일을 주도하길 바랄 수가 없습니다. 결국 통일을 주도할 만한 세력은 남한입니다. 남한은 통일을 하겠다고 결심을 하면 통일을 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역량, 국제사회에서의 외교력이 어느 정도는 됩니다. 그래서 남한 사회 안에 통일 지향적인 정부가 들어서는 것이 통일의 첫 단계입니다.nbspnbspnbspnbsp그렇다면 남한이 중심이 된 통일을 하려면 북한이 여기에 동의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북한의 우려를 불식시키기 위해 북한이 동의하는 대안을 제시해야 합니다. 그것은 포용 정책입니다. 북한 주민들은 생존권의 위협을 받고 있으니까 통일이 되면 생존권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경제적인 지원을 해야 하고, 북한의 지배 세력들은 통일이 되면 자신의 신분이 계속 유지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신분의 보장을 해줘야 됩니다. 그래서 미리 인도적 지원이나 경제 협력을 통해서 북한 경제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남한 안에서 진보 세력의 정치 활동을 인정하게 해줘서 통일이 된 후에 북한도 자신들의 정치적 활동이 자유롭게 보장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사전에 남한의 헌법에 규정해 놓아야 합니다. 이렇게 남한 사회 안에 북한을 포용할 수 있는 변화가 있어줘야 합니다. nbspnbspnbsp그리고 한미 동맹이 이제는 자주적 입장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즉 한반도의 통일 문제에 있어서는 우리의 이익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한국의 이익을 우선으로 하고 미국이 우리를 도와라 해야 합니다. 그 외에 나머지 세계의 문제에 있어서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는 일에 우리가 협조하겠다고 해야 합니다. 미국의 이익에 의해서 분단 고착화도 가능한 것이 된다면, 또 한일 간에 식민지 침략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는데 한일 군사정보협력을 하라고 강요한다면 이것은 종속적 한미 동맹입니다.nbspnbsp대한민국의 국가 목표가 통일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 불분명합니다. 외교에 있어서 최우선 과제도 이것이 통일에 도움이 되느냐 안 되느냐를 생각해야 하고, 안보, 국방 문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그런 면에서 여러분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첫째, 인도주의적인 입장에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 둘째, 북한 주민들의 인권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것, 셋째, 남북 간에는 정치적 이념이 달라도 과거사에 대해 화해를 하고 교류와 협력이 증대되어야 한다는 것과 남북 간의 경제 협력은 상호 이익이 된다는 것, 넷째, 여기서 더 나아가서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화의 시스템으로 가야 한다는 것, 그래서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통일로 나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에게도 이익일 뿐만 아니라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도 가장 빨리 보장하는 길이 되고, 북한 주민들의 인권 개선도 가장 빨리 되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젊은 여러분들이 조금 더 각성하는 것이 필요합니다.“nbsp한반도의 완전한 평화를 위한 해결책은 결국 ‘통일’뿐이며 통일에 유리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통일을 위한 ‘마음’을 다시 다잡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스님의 열정적인 강연에 청년들은 뜨거운 박수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법문이 끝나고 다시 버스에 올라 숙소로 가는 길에 올려다본 백두산의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잊혀 지지 않습니다.nbsp이 백두산의 밤하늘을 이제는 언제든지, 어느 경로로든지 와서 한없이 바라볼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기원합니다.nbspnbsp내일은 백두산 천지에 오른 후 비룡폭포, 소천지, 녹연담, 지하산림을 차례대로 둘러본 후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을 고스란히 느껴볼 예정입니다. 오후에는 잊혀진 역사 발해의 땅으로 넘어가 대조영이 처음으로 나라를 세운 곳이라고 하는 동모산으로 향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조희정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8.10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 고구려의 역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2일째를 맞이하여 집안시에 있는 고구려 유적지를 안내하며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동북아 역사 대장정 2일째 새벽이 밝았습니다. 낯선 중국 땅에서 처음 보낸 밤이라 피곤했을 텐데도 단 한명도 지각하지 않고 어제 밤 약속한대로 4시 40분까지 버스 탑승을 하고 새벽5시 정각에 송수신기로 들려오는 스님의 아침 인사로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nbspnbsp고구려의 유적을 보러 환인에서 집안으로 고속도로를 이용해서 이동하였습니다. 그런데 고속도로인데도 너무 느려서 이상하다 했는데 스님이 “지난 번 관광버스가 전복된 사고가 났던 지역인데 경찰차가 앞에서 통제를 하고 있어서 서행을 한다” 고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중간에 버스를 멈춰 세우더니 공안이 들어와 검문을 하기도 해서 뭔가 위험한 지역을 가는 건 아닐까라는 두려움이 일기도 했습니다. 검문을 무사히 통과하고 구불구불한 국도를 따라 흔들리며 이동을 하였습니다.nbspnbsp▲ 북한의 뙈기밭. 가파픈 절벽까지 뙈기밭으로 만들어져 있는 모습.nbspnbsp그 때 스님이 “지금 오른쪽으로 보이는 강이 압록강이고 강 건너는 북한 땅입니다”라는 말을 하시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북한 땅이 있고, 내 눈앞에 보이는데 직접 갈 수 없다는 분단의 현실이 가슴 아팠습니다. 특히 절벽 꼭대기까지 뙈기밭을 만든 모습을 보고 무변심 법사님은 연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습니다. 굶주림에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 것일까... 목이 메였습니다.nbspnbsp압록강을 따라 조금 더 가니 오늘의 첫 일정인 국동대혈에 도착하였습니다. 국동대혈은 나라의 동쪽으로 가면 큰 대혈이 있다는 뜻으로 이때 국은 고구려 시대의 국내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국동대혈을 보러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쏟아지는 비 때문에 우산을 들고 우비를 입느라 출발 준비가 더 분주해졌습니다. 이런 비 걱정도 잠시 조금 걷기 시작하니 신기하게도 비가 멈췄고 이동하기엔 한결 수월해졌습니다.nbspnbspnbsp국동대혈에 올라 고구려의 선조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모습을 떠올리며 대한민국에서 온 140명의 청년들도 함께 그 뜻을 기려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국동대혈nbsp1300년 전까지 우리의 조상들이 이곳에 와서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땅에서 하늘에 제사를 드렸다는 게 신기하였습니다. 마치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듯 한 오묘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1300년 전까지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던 조상들은 자신의 후손들의 우리의 땅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땅이 되어 이렇게 찾아와야하는 것을 어떻게 여기실까’ 하는 생각에 빠지며 우리의 역사인데 중국 땅에 있는 것이 아쉽기도 했습니다.nbspnbsp스님은 청년 역사기행단을 위해 간절한 마음을 기울여 발원과 축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 세상에서 가장 크시고 이 세상에서 가장 밝으신 환인 하느님,하느님의 아들로서 이 땅에 처음 나라를 세우신 환웅 천황님,환웅 천황님께서 세우신 배달 나라의 건국 이념 홍익인간 재세이화,nbsp환웅 천황님의 건국 이념을 계승한 단군 왕검님,nbsp단군 왕검님께서 신시를 새롭게 하여 세운 조선 나라,nbsp조선 나라를 계승한 해모수님의 부여 나라,nbsp그 뜻을 계승한 고주몽님의 고구려, 온조님의 백제, 박혁거세님의 신라, 김수로님의 가야,고구려의 뜻을 계승한 대조영님의 발해,nbsp남북으로 흩어진 민족의 뜻을 이은 왕건의 고려,nbsp그 영토와 사람을 계승한 이성계의 조선,nbsp조국이 광복되어 세운진 나라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nbsp오늘 우리를 있게 한 하느님을 비롯한 조상님들께 삼가 합장하오며 발원하옵니다.nbspnbsp우리가 여기까지 오도록 나라를 지켜주고 백성을 지켜준 모든 호국 영령들의 은혜에 보답하며 하나된 조국 통일 대한민국을 발원하옵니다. 통일된 우리 나라는 우리만이 아니라 이웃 나라들과 더불어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인류 문명의 새로운 중심지가 될 것을 발원하옵니다.nbspnbspnbsp이곳에 일찍 찾아오지 못하고 고구려 멸망 이후 1300여년 만에 찾아온 것을 참회드리오며 늦게 나마 이렇게 찾아와 인사를 올립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온 130여명 청년들의 이 간절한 발원을 받아들여 주옵소서. 저희들은 그동안 개인의 행복 제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통일을 향해 나아갈 것을 발원하옵니다. 저희들의 이 간절한 발원을 들어 주옵소서.nbspnbsp북녘 동포들 굶주림에서 하루 속히 벗어나고 병듦에서 벗어나고 인권이 개선되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날이 하루 속히 오길 발원하며, 남한의 젊은이들도 절망을 딛고 일어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빈부격차 해소되어 모두 다 행복하게 살 수 있기를 발원하며, 남북이 하나되는 새로운 나라 통일 한국을 발원하옵니다. 오늘 이 발원하는 젊은이들 모두 건강하고, 이 여행 무사히 마칠 수 있도록 저희들을 보살펴 주시옵소서.”nbspnbsp스님의 발원을 들으며 ‘선조들은 이렇게 남북으로 갈라져 있는 우리들을 어떻게 바라보실까’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슴 깊은 곳에서 북받치는 울음이 울컥하고 올라오기도 했습니다.nbspnbsp국동대혈에서 나와 집안에 있는 장수왕릉,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보러 이동하였습니다. 이동하면서 이번엔 버스 왼쪽으로 조금 전에 이동하면서 보았던 압록강 넘어 북한 땅이 보였습니다. 해가 나고 날씨가 더워진 탓인지 북한 어린이들이 물가로 나와 물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물장구를 치는 아이들을 보며 ‘북한 아이들도 물놀이 하는 것은 우리와 똑같구나’ 하는 생각의 한편으로는 멀리서 봐도 너무 마른 아이들의 모습에 일정 중에 조금만 배가 고파도 틈틈이 맛있는 간식을 챙겨먹는 우리들이 미안해지기도 했습니다. 버스 안에서 북한의 마른 아이들, 나무는 다 베어버리고 없는 민둥산, 검은 연기를 내 뿜고 있는 시멘트 공장을 바라보며 안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왔습니다.nbspnbsp▲ 북한의 시멘트 공장nbsp다음은 장군총을 보았습니다. 그 웅장함은 책과 영상자료로 봐서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보니 그 위엄은 더 대단하였습니다. 역사기행을 온 우리들의 추억을 배려해 스님은 조별로 사진 촬영을 함께 해주셨습니다. 햇빛이 강렬함에도 늘 한결같은 미소를 지어주시는 스님의 편안한 마음에 장군총에 대한 추억이 더 편안하게 남을 것 같습니다.nbspnbsp▲ 장군총에서 조별 기념 사진nbsp무덤을 만드는데 사용한 돌이 여기에서 20km 떨어진 우리가 지나온 도로를 개발하다가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게 신기하고 유적의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를 개발로 알게 되었다는 게 엉뚱하기도 했습니다. 1600년 전 만주 땅에서의 고구려의 위엄과 위대함이 그 유적의 규모로도 크게 다가왔습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위대한 유적이 잘 관리하고 보전되고 있지 못한 것이 많이 아쉬웠습니다.nbspnbsp이어서 조춘호 선생님과 이승용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며 광개토대왕릉비, 광개토대왕릉 순서로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 광개토대왕비nbsp▲ 광개토대왕릉nbsp가장 안타까운 것은 광개토대왕릉은 장군총과 달리 절반 이상 무너져 내렸는데 이것은 무덤 속에 사용한 돌이 달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광개토대왕은 37세라는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으면서 무덤을 만들 때 미처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 튼튼한 강돌을 넣은 게 아니라 주변 산돌을 넣어서 오랜시간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 내린 것이라고 합니다. 무너져 내린 무덤을 보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nbspnbsp집안 무덤에 있는 고구려 무덤 중 벽화가 발견된 무덤은 30곳 정도 된다고 하는데 그 중에서 공개된 5회분5호묘로 이동하여 직접 무덤 속으로 들어가서 벽화를 보았습니다.nbspnbsp▲ 5회분 5호묘로 들어가는 길nbsp조춘호 선생님의 후레쉬를 비춰가며 상세히 설명을 해주었고, 늘 말로만 하던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의 모습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계속 땡볕을 걸어다니다가 지하 무덤으로 들어오니 거대한 냉장고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시원함이 느껴져서 기다리고 있는 시간마저 행복했습니다.nbspnbsp무덤 앞에 있는 박물관으로 이동하여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은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벽화를 한 장 한 장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그 중에서 우리 고구려의 벽화를 중국식으로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느 부분에서 틀렸고 어떤 부분에선 일리가 있는지도 짚어주었습니다. 그럴 때 마다 청년들의 ‘아’ 하고 외치는 소리가 터져나왔습니다.nbspnbsp▲ 5회분 벽화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nbsp“원래 고구려 무덤은 돌로 쌓아서 덮개를 덮은 적석총입니다. 이 무덤이 점점 커져서 장군총에 오면 무덤이 7층까지 올라갑니다. 여기에 무덤실은 5층에 배치가 됩니다. 이렇게 무덤실은 주로 지상에 있었는데 어떤 영향인지는 모르지만 점점 지하로 내려가기 시작했어요. 지하로 내려가면서도 석실은 그대로 가져갔기 때문에 위치만 바꾼 것 밖에 아니였어요. 그러면서 나타난 것이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nbspnbsp초기 벽화는 주로 생활상을 그렸어요. 후기 벽화로 갈수록 불교 영향을 받아서 연꽃을 그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사신도를 많이 그렸습니다. 오늘 들어가본 5호묘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는데 그것은 후기 것임을 알 수 있죠. 여기에 전시된 것들은 생활도가 많아요.”nbsp그러면서 스님은 전시된 벽화에 대해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여기 벽화를 보시면 머리가 소머리로 그려져 있죠. 소머리로 되어 있으니까 이것은 고구려에 있었던 ‘우가’를 표현한 겁니다. 5가 아시죠? 마가, 우가, 저가, 구가, 양가라는 다섯 개의 부족이 있었어요. 각 부족은 거의 독립되어 있었어요. 군대도 다 따로 가지고 있었고요. 고구려는 일종의 연방 국가 같은 것이였어요. 나중에 각 부족은 왕권이 점점 강화되면서 다섯 부서의 장관과 같은 위상을 갖게 되었어요. 처음에는 다섯 개의 지방자치와 같은 연방 국가였다가 점점 중앙 정부의 각부 책임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임금도 이 5가가 합의해서 뽑았습니다. 이것은 신라의 화백 제도와도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이렇게 초기에 연방 형식을 갖추고 있었어요.nbspnbsp이 ‘우가’는 고기의 기록에 의하면 고조선 시기에는 농업을 담당했습니다. 식량과 농업을 담당하는 부서가 ‘우가’였는데 이 우가 출신 중에 단군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 같아요. 왕의 아들이 건실하면 그대로 왕이 되지면 왕이 아들이 없으면 5가 중에 가장 훌륭한 사람을 선택해서 뽑았던 것이죠. 그리고 왕의 아들이 여러명 있어도 맞이가 시원치 않으면 또 의논을 해야 합니다.nbspnbsp이 벽화는 ‘우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보면 되는데 밑에 ‘신농씨’라고 적혀 있죠. 이것은 중국식 해석입니다. 중국에서는 농업의 신을 신농씨라고 합니다. 중국 역사에서 농업을 처음으로 시작한 신이 신농씨입니다. 그래서 이 벽화를 신농씨라고 표현했지만 이 벽화는 중국의 그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고구려의 우가를 표현한 그림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나 신농씨도 배달나라 출신입니다. 선진 문명인 배달 나라의 일부가 중국 쪽으로 내려가서 처음으로 농사 짓는 방법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중국에서 신이 된 거예요. 우리 나라 사람 중에 일본에 가서 신 된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호미를 전했다면 일본에서 호미 신이 됩니다...”nbsp큰 유적 뿐 아니라 그 속에 그려진 벽화의 의미까지 다 알고 계신 스님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상세하게 그 내용들을 다 알고 계실까?’ 라고 옆에 친구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공부를 많이 하셔서 그럴 것’ 이라는 친구도 있고, ‘워낙 직관력이 뛰어나신 분이니깐 바로 아시는 것’ 이라는 친구도 있고,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는 친구도 있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옆에 있던 종합 생활도에 대해 특별히 중요성을 강조하며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nbspnbspnbsp“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봐야할 것은 왼쪽 아래쪽에 있는 이 그림입니다. 이 나무는 신단수입니다. 여기 신단수 아래에 동굴이 하나 있죠. 동굴 안을 자세히 보시면 곰이 한 마리 앉아 있어요. 호랑이는 동굴 밖에 있는데 화살을 맞고 있어요. 이 그림은 단군 설화와 내용이 똑같습니다.nbspnbspnbsp단군 설화를 삼국유사를 쓴 일연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비판이 있는데, 일연은 12세기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벽화는 5세기 벽화예요. 그러니까 단군 설화는 민족 전통적으로 주욱 내려온 이야기니까 여기에 그림으로 그린 것이죠. 그러나 고구려가 멸망한 후 사료가 유실한 상태에서 일부 자료를 보고 일연이 그것을 요약해서 기술했던 것이죠.nbspnbsp토착 세력은 다 자기 부족의 상징이 있습니다. 곰을 섬기는 부족, 호랑이를 상징물로 여기는 부족, 각 부족이 있었어요. 그런데 선진 문명을 가진 이주민이 오니까 토착 세력과 이주민이 서로 사이좋게 협력하기도 했지만 저항하는 경우도 있었겠죠. 단군 설화를 보면 호랑이족은 저항을 했다고 볼 수 있고, 곰족은 서로 협력했고 특히 결혼 동맹을 맺었다고 볼 수 있죠. 고구려 건국에서도 보면 고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고 제일 먼저 합병한 나라가 송양국이거든요. 전쟁을 해서 합병한 것이 아니고 합의해서 합병을 했습니다. 그래서 고구려 초기에는 반드시 송양국의 공주를 왕후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2대 유리왕의 부인도 송양국의 공주였습니다. 첫 부인이 결혼하고 2년 안에 죽자 다시 송양국의 둘째 딸을 왕후로 데려옵니다. 이처럼 선진 이주민 세력인 환웅족과 토착 세력인 웅족이 결혼 동맹을 맺었고 그 사이에 난 아들이 단군 왕검인 것입니다.”nbspnbsp한 친구는 스님의 벽화 설명 중에서 마지막에 설명해 준 종합생활도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합니다. 벽화 왼쪽 아래에 아주 조그맣게 그린 부분을 찾아내면서 이 속에서 우리 단군 신화 이야기가 들어있지 않느냐라고 설명해주신 게 대단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스님의 설명이 끝나자마자 신단수 아래에 웅크린 곰을 보기 위해 우르르 모여들었고 곰을 알아 보지 못한 친구들이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자 스님은 “곰이 안 보이는 사람은 업장이 두터워서 그렇다”며 농담을 던졌습니다. 단군 이야기는 신화가 아닌 역사적 사실임이 벽화로 증명된 것을 알게 된 이 순간은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nbspnbsp시원했던 5회분5호묘 벽화 냉장고에서 빠져나와 다음으로 간 곳은 환도산성이었습니다. 평상시에는 평지성인 국내성에 있다가 외적의 침입시 방어를 위해 환도산성을 지었다고 합니다. 예전에는 나무와 풀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았다고 했는데 200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발굴 작업을 진행해 지금의 형태를 갖추고 있고 직접 가 보니 지금도 발굴 작업이 한창 진행중이었습니다.nbspnbsp▲ 환도산성 남문 앞에서 전체 기념사진nbsp환도산성에 올라서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하고, 아래에 내려와 발굴된 산성하 무덤떼를 하나씩 둘러보며 아래에서 환도산성 위를 올려다 보기도 했습니다. 마지막에 환도산성을 올려다 보았을 때 지는 해가 환도산성 너머 산에 늬엿늬엿 걸린 모습은 잊지 못할 아름다운 풍경을 선물해주었습니다.nbspnbsp▲ 산성하 무덤떼에서 바라본 환도 산성nbsp산성하 무덤떼에서는 전체 일행이 바닥에 주저 앉아 조용히 사방을 둘러본 후 잠시 명상을 하는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머릿 속에는 산성을 쌓고 나라를 지키려고 부단히 애를 쓰던 고구려인들의 모습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nbspnbsp▲ 산성하 무덤떼에 앉아 잠시 명상의 시간nbsp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국내성을 둘러보았습니다. 국내성이라고 해서 궁궐을 상상하며 한껏 기대감을 갖고 갔는데 중국인들이 사는 아파트 단지 가운데에 성벽 터가 조금 남아있는게 전부였습니다. 그리고 이대로 방치해둔 것에 대해 또 다시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nbspnbsp▲ 국내성nbsp국내성 북쪽 성벽에서 시작하여 서쪽 성벽이 끝날 때까지 걸으면서 성벽을 유심히 살펴보는 우리 일행을 중국인들은 신기하게 쳐다보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중국인들은 운동하고 밥먹고 휴식하고 걸어다니는 일상 거리인데 우리들에게는 선조들이 남긴 소중한 유산인 것이죠.nbspnbsp서쪽 성벽을 돌고 남쪽 성벽이 시작되면서부터 통구하와 압록강도 함께 합해졌습니다. 압록강을 따라 걸으면서는 이승용 국장님으로부터 좋은벗들이 96년부터 북한동포돕기 운동과 통일 운동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nbspnbsp▲ 국내성의 남쪽 성벽을 따라 압록강변을 거닐며nbsp저녁 식사는 압록강변에 위치한 조선족 식당에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법륜 스님의 역사 강의였습니다.nbspnbsp강의 내용은 고구려의 시작부터 멸망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내용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북부여를 계승한 나라이고, 고구려 역사를 이야기 하기 위해서 부여 이야기를 안 할 수 없다”면서 “우리 역사에서 부여, 발해에 대해 자세히 다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면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우리가 도착한 이곳은 고구려가 425년 동안 수도로 정한 곳입니다. 환웅의 배달 문명을 계승한 나라가 단군의 조선 나라이고, 그 조선 나라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고 하면서 세운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이것이 다물 사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배달의 문명을 계승했고, 조선의 문명을 계승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배달 나라와 조선 나라에 대해 여러 가지 회의적인 시각이 있었지만 고구려를 보면서 우리는 고구려가 이 문명을 계승한 동북아의 독특한 민족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습니다.nbspnbsp그동안 고구려가 마치 창조한 것으로 말해진 것들도 그 이전을 알게 되면서 계승했다고 표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의 비석에도 ‘북부여의 후손이고, 북부여로부터 말을 타고 남으로 내려왔다’고 되어 있습니다. 고기에 보면 해모수가 ‘나는 단군의 후예로서 단군의 조선 나라를 계승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부여는 조선보다 조금 더 북쪽에 있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부여라고 불리우는 현이 있습니다. 고구려 시대에도 천리장성 중에 부여성이 있었습니다. 이 부여에서 고주몽은 남쪽으로 내려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부여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발해가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의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부여입니다. 부여에 대해서 별로 아는 것이 없어요. 이것은 발해와 부여 모두 지금 우리 민족이 살고 있는 한반도가 아닌 저 동북쪽에 있었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그러니 다물 사상에 의해서 고조선으로부터 고구려로 바로 이어진 것이 아니고 그 중간에 부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여와 고구려를 하나로 봐야 합니다. 부여 고구려 시대라고 말할 수 있겠죠.nbsp지금 현재로 보니까 고구려가 처음부터 강성했던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고, 동부여와 고구려의 경쟁에서 고구려가 이기게 되면서 그 정통성을 이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동부여는 만만한 나라는 아니였습니다. 고구려 문자 명왕 때인 6세기까지 유지가 되었습니다. 광개토대왕과 장수왕이 있을 때도 부여는 있었습니다. 그래서 6세기 초까지 삼국 시대라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오국 시대였습니다. 남쪽에 가야가 있었고, 북쪽에 부여가 있었기 때문에 삼국에 두 나라를 포함시켜야 합니다. 6세기에 들어와서야 가야가 신라에 합병이 되었고, 6세기에 들어와서야 부여가 고구려에 합병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삼국이 유지된 것은 6세기와 7세기에 한 160년 정도 밖에 안 됩니다.”nbsp이어서 스님은 고구려의 성장과 쇠퇴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특히 신라가 어떻게 급격히 성장할 수 있었는지 이야기했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북위와 화친을 맺으면서 서북 쪽이 안정이 되고 그러자 장수왕은 주력군을 백제 공격에 사용하여 백제를 남쪽으로 밀어 붙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태평성대가 오래가면 항상 문제가 생깁니다. 첫째, 사람들이 사치하기 시작하고, 둘째, 부정부패가 일어나기 시작하고, 셋째, 왕위 쟁탈전이 생기면서 내부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겉으로는 영토도 크고 힘도 있었지만 내부는 점점 취약해져 가게 됩니다.nbspnbspnbsp이때 신라는 5세기 때까지만 해도 가야의 침공을 받고 망할 지경이 되어서 광개토대왕에게 부탁해서 5만 군사의 지원을 받아 겨우 나라를 유지했는데 6세기에 접어들면서 법흥왕 때 율령을 선포하고 불교를 공인합니다. 불교를 공인한 이유는 가야와 합병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가야는 원래부터 불교 국가였어요. 왜냐하면 김수로왕의 부인이 인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삼국 가운데 철저하게 불교를 금지한 국가가 신라였습니다. 옛날로 치면 가야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였지만 거꾸로 개혁 개방 정책을 하면서 신라가 강성해지고 가야는 점점 약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가야를 침공하기 보다는 합의 통일을 했습니다. 국명은 신라로 하기로 하되 대신에 신라가 가야를 포용하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첫째, 가야인들의 신앙을 신라가 수용해야 된다고 해서 불교를 공인한 것입니다. 신라 안에서도 반대가 심했지만 이차돈 같은 젊은 사람이 반대를 해서 결국 한 사람이 죽고 사회 분위기가 바뀌면서 불교가 공인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신라도 가야와의 통합이 쉬운 일은 아니였어요. 둘째, 가야의 왕족을 신라의 왕족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즉 가야 귀족들의 신분 보장을 해주었습니다. 이것을 지금의 남북 관계에 비유를 하면 불교를 공인한 것은 공산주의의 합법적인 활동을 허용한 것과 같습니다. 가야의 귀족을 신라의 귀족으로 받아들인 것은 북한의 장성을 통합군의 장성으로 임명한 것과 같습니다. 또한 함경북도의 도지사를 통합된 나라에서도 도지사의 자리를 준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가야가 이런 통합 신라와의 합의 통합을 받아들인 것입니다.nbspnbsp신라 중심으로 통일을 하려고 했으니까 이렇게 가야를 포용한 것이겠죠. 그렇다면 지금 남한이 남한 중심으로 통일을 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그대로 두려면 북한을 포용해줘야겠지요? 그런데 지금의 남한은 이 정도의 포용 정책을 할 수 있나요? 이 정도를 못하면 북한이 수용을 안 하겠죠. 죽기 살기로 저항을 하겠죠. 지금 남북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강자가 약자를 포용해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이렇게 신라는 가야와의 통합을 통해 갑자기 성장을 하게 됩니다. 인재도 두배로 늘어났고, 가야의 앞선 철기 문명을 받아들였고, 그로 인해 생산량이 늘어나고, 무기가 개발이 되고, 그래서 진흥왕이 나제 동맹을 맺어서 고구려를 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자 고구려는 한강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신라는 함흥, 원산까지 밀고 올라갑니다. 그러나 고구려는 북방도 막아야 하고 남쪽도 막아야 하고 두 개의 전쟁을 할 여력이 도저히 안 되었던 겁니다.nbspnbsp어쨌든 신라가 단시간 내에 갑자기 부상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가야와의 합의 통합 때문이였습니다. 신라는 가야에게 조금 양보했지만 얻은 것은 열배를 더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의 남북한도 합의 통일을 하게 되면 통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동아시아 공동체까지 만들어나가게 되면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됩니다. 유라시아로 확장해 나갈 수 있게 되기 때문에 북한 개발을 하기 위해서 돈이 조금 드는 것은 문제도 아닙니다.nbspnbspnbsp나아가서 신라는 통일이라는 계획을 세워 놓고 통일을 한 것이 아니고 국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다가 결과적으로 통일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목표 의식이 없었기 때문에 대륙을 차지하겠다는 생각도 전혀 없어서 통일을 했다는 장점도 있지만 반대로 대륙을 잃어버린 한계가 있었죠. 물론 잃어버린 것은 아니죠. 발해가 다시 생겼으니까요.nbspnbsp고구려 멸망 후 30년만에 북방 영토에는 발해, 즉 대진국이 일어났죠. 그래서 고구려와 백제가 망했다는 의미에서는 삼국 통일이지만 실제로는 삼국 통일이라기 보다는 신라와 발해라는 이국 시대라고 볼 수 있죠. 이때 또 재미있는 점은 고구려를 잃고 나라를 되찾고자 한 부흥군과 신라군이 합동했다는 것입니다. 고구려와 신라는 철천지 원수였지만 그 보다 더 큰 원수가 당나라였습니다. 당나라 군대를 한반도에서 쫓아내기 위해서는 고구려 부흥군이 신라군과 연합해서 가장 활발하게 싸웠던 것입니다. 신라는 무기와 물자를 대고 실제 인력은 고구려군이 전면에 나서 싸워서 결국 당나라군을 한반도 안에서 쫓아내게 됩니다.nbspnbspnbspnbsp고구려의 영토 일부를 신라가 차지했지만 그것은 반도 안에 불과했고, 실제로 고구려의 광대한 영토는 발해가 회복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삼국통일이라기 보다는 북발해와 남신라라고 하는 이국 시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의 기운은 발해로 그 역사적 전통성이 계승되었기 때문에 환단고기에 신라는 언급을 안 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다음에 대진국이 나옵니다. 발해 사람들은 자기들을 발해라고 말한 적이 없어요. 자신들의 나라를 진국이라고 불렀어요. 그래서 고구려는 후대로는 발해로 계승이 되었습니다.” nbspnbsp신라의 삼국 통일에 대한 아쉬운 생각이 많이 들었지만 한반도 동쪽 아래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던 신라가 짧은 시간에 어떻게 비약적 성장을 할 수 있었는지는 많은 시사점을 주었습니다. 특히 신라가 가야를 포용해서 합의 통일을 한 것에서 분단 국가인 우리가 독일 통일이라는 외국의 사례만 보고 통일의 방안을 찾을 것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의 경험 속에서도 보고 배울 점이 많다는 사실은 아주 인상적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렇게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오국시대의 방대한 역사를 단 2시간 만의 강의로 우리 청년들의 눈높이에 맞춰 적절히 비유로 강의를 해준 스님이 더 대단해 보였습니다. 에어컨도 잘 안 나오고 2시간 내내 서서 열정적으로 강의해주는 스님 앞에서 체력적 한계와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무거운 눈꺼풀과 씨름하는 우리들이 많이 부끄럽기까지 했습니다. nbspnbsp잠자리에 들기 전 조별로 모여 마음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오늘은 집안에 있는 고구려의 거대한 유적지를 돌아보며 느낀 점도 많았지만 무엇보다 체력적인 소모가 커서 많이들 지쳐있었습니다. 그래서 어제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지만 여러 명의 친구들이 환도산성 아래에서 산성을 올려다 보며 바라본 해질녘 풍경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내가 보았던 초록색 중 가장 아름다웠던 색이었다고 이야기한 친구도 있었습니다.nbspnbsp▲ 조별 마음 나누기 시간nbsp그리고 책에서만 보던 장군총, 광개토대왕비, 광개토대왕릉을 실제로 보니 그 거대함에 놀라웠고 한편으로는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현실에서 안타까움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저녁식사 전에 압록강변에서 바라본 북한의 모습이 불빛 하나 없는 암흑이었던 것과 달리 이곳 중국은 알록달록한 불빛으로 휘향찬란한 것을 보면서 북한을 껴안지 못하고 있는 우리 남한의 현실이 가슴 아프게 다가왔다고 했습니다.nbspnbsp내일은 하루 종일 압록강변을 따라 북한의 모습을 보면서 북한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볼 예정입니다. 어떤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속에서 무엇을 느끼게 될지 기대하며 오늘 하루를 마무리 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스케치는 김양숙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nbsp
2015.8.9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1일째, 우리 민족의 시원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한국으로 돌아가는 동북아 역사기행 1차팀을 심양 공항에서 배웅한 뒤 오늘부터 새로 시작하는 동북아 역사기행 2차팀과 함께 고구려의 첫 수도인 홀본산성에 올랐습니다.nbspnbsp오늘 역사기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대중들은 처음 중국에 왔을 때처럼 말끔히 차려 입고 심양공향으로 출발하기 위해 숙소를 나왔습니다. 떠나는 아쉬움이 컸는지 차량별로 단체 사진이라도 한 장 더 남기고 싶어 차량 앞에 모여 있는 대중들을 보고 이번에는 스님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심양 공항에 도착해 통일의병을 주축으로 구성된 역사기행 1차팀을 배웅하며 짐을 부치려 줄을 서 있는 대중들 한 명 한 명에게 스님이 악수를 건냈습니다. 대중들도 7일 동안 잊혀진 민족의 뿌리와 독립운동의 역사, 통일 한국의 희망에 대해 소중한 가르침을 준 스님께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nbspnbsp▲ 통일의병 역사기행팀 배웅nbsp1차팀이 출국 수속을 밟고 모두 들어가자 곧바로 청년들로 구성된 2차팀이 출국장을 나왔습니다.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이 연이어 다시 역사기행이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 청년 역사기행팀을 데리고 심양 공항을 나오고 있는 스님nbspnbsp청년들은 7일 동안 한 몸처럼 지낼 버스에 짐을 차곡차곡 싣고 다소 어색하고 서먹서먹한 표정을 지으며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첫 번째로 가볼 역사 유적지인 홀본산성을 향해 떠나며 이어폰 너머로 스님이 환영 인사를 해주자 모두들 법륜 스님이 안내하는 역사 대장정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환호성을 터뜨렸습니다.nbsp“만나서 반갑습니다. 저는 지난주에 와서 한 주간 이곳에 있었습니다. 한국은 많이 더웠다면서요? 저는 시원하게 잘 있었습니다.”nbsp▲ 송수신기로 들리는 스님의 환영 인사를 듣고 환호하는 청년들nbsp스님의 환영 인사에 이어 7박8일 동안 역사기행단을 선조들의 숨결이 깃든 역사의 현장으로 안전하게 데려다 줄 운전 기사님들과 실무 담당자 조춘호 선생님에게 열렬한 환호와 함께 감사의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버스 안에서 송수신기를 통해 들려온 스님의 첫 번째 강연은 ‘우리가 왜 역사를 공부해야 하는가?’ 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고조선이나 고구려, 발해의 역사가 단순히 머릿 속 관념으로써 존재하는 지식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고 행동을 유발하기 위한 실질적인 동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이야기였습니다.nbspnbsp“어떤 한 사람이 상황이 벌어져서 어떤 행동을 할 때 ‘저 사람은 왜 저렇게 행동하지?’ 하고 의아할 때가 있지요. 그럴 때 그 사람을 비난하고 욕하거나 하는 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지만 그러나 그 사람은 그렇게 행동할 수 밖에 없는 어떤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를 찾으려면 그 사람의 성장 배경을 조사해 보면 돼요.nbspnbspnbsp그것처럼 지금 우리 나라가 처한 현실을 보면 미국과 중국이 패권 경쟁을 점점 해나가는데 우리는 지금 그 사이에서 제대로 대응을 못하고 있고, 남북 간의 갈등이 심화되고 있어서 이것이 다른 사람 좋은 일 시키는 민족적 손실이 있고, 또 국내의 각 정파들이 왜 저렇게 갈등을 할 수 밖에 없고, 또 한국 사람들은 왜 저렇게 밖에 못하는지 등 현재 우리가 처한 남북 갈등, 남한 안의 갈등, 주변국과의 문제 등에 대해서도 한 사람의 성장 배경을 알아가듯이 조사하는 것이 역사입니다.nbspnbsp과거의 역사적 사실을 지식으로 알기 위해 역사기행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놓여진 이 현실 속에서 지금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고, 미래에는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보다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험들을 살펴보는 것입니다.nbspnbsp그리고 방향을 잡았다면 행동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행동은 지식을 갖고는 안 나옵니다. 마음에 감동이 있어야 행동이 나옵니다. 교실에 앉아서만 공부하면 아무리 감동적인 것도 지식이 되기 쉽고,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지고 발로 밟으면서 현장에서 공부하게 되면 마음 속에 감동이 오기가 비교적 쉽습니다. 그래서 행동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이렇게 현장에 와서 과거의 유물과 유적을 살펴보면서 역사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nbspnbsp한 개인이 왜 이렇게 사고하고 행동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사람이 겪어온 과거를 알면 되듯이 한국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도 마찬가지라는 말씀에 모두 공감을 표했습니다. nbspnbsp청년 역사기행팀은 중국으로 떠나오기 바로 전 날에도 조원들끼리 모여 자신의 인생 그래프를 그리고, 살면서 가장 슬펐던 일, 가장 기뻤던 일에 대해 서로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처음에는 이국에서 자나 깨나 항상 붙어 있어야 할 사람들이니 더 친해지라고 그러나보다 하고 시작했었는데, 막상 사람들의 과거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래서 저 사람이 그런 말을 했구나, 저런 행동을 했구나’ 하고 조원들 한 명 한 명을 조금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개인의 역사를 알아가면서 다른 이를 좀 더 포용할 수 있듯이 나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심양에서 환인으로 가는 버스 안. 스님은 홀본산성에 도착하기 전에 공부를 좀 하고 가자며 우리 나라의 9천년 역사를 대략적으로 개괄해 주면서 이와 결을 달리하는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우리 나라 어느 시대 때 중국은 어느 시대였고,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상호 비교를 해보니 역사적 사건들이 더욱 명료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점심 식사로 옥수수를 먹고 처음 도착한 곳은 홀본산성 기념관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고구려인들이 남긴 여러 유물에 대해서 설명을 들었는데,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고구려인들이 지위 높은 이의 무덤을 만드는 방식이었습니다. 고구려인들은 무덤을 만들 때 표면이 둥그렇게 마모된 강돌만 사용했다고 합니다. 강돌은 오랜 세월 물에 쓸려나가 더 이상 깎여나갈 부분이 없을 정도로 단단한 부분만 남아 쉽사리 무너지지 않는데 산돌은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강돌과 산돌이 따로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는데, 둘의 특성이 다르다는 사실도 처음 알았습니다.nbspnbsp고구려라고 하면 왠지 모르게 호전적이고 싸워 이기는 기술에만 능하다는 선입견이 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물에 들어가 강돌을 골라냈을 먼 옛날의 사람들도 떠오르고, 그 먼 옛날에 벌써 과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었던 선조에 대한 경이감도 들었습니다.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인지 발 아래 유리판 아래 맨들맨들한 광택을 빛내고 있는 강돌 무덤 유적을 발로 쓸어보며 한참을 그 위에 머물러 있었습니다.nbsp▲ 고구려의 첫 수도 홀본산성의 웅장함nbsp기념관을 나와 셔틀 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언덕을 올라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가파른 돌계단을 하염없이 걸으며 홀본산성으로 올라갔습니다. 날씨가 화창해서 홀본산성은 저 멀리서도 아주 선명하게 그 위용을 드러내었습니다.nbspnbsp계단을 오르기 전 간단히 기념 촬영을 한 후 본격적인 산행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 홀본 산성에 오르기 전 비석 앞에서 기념 촬영nbsp길고 긴 계단을 보며 가방을 왜 들고 나와 짐을 더했는지 모르겠다며 자책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 정도 거리면 적이 제대로 싸움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군에 투항했겠다며 우스갯소리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nbspnbspnbspnbsp비가 막 오고 난 직후라서 한결 시원한 날씨였는데도 땀이 흘러 옷을 적셨습니다. 귓전에는 법륜 스님이 이렇게 길이 닦이기 전 운좋게 경비병만 이용할 수 있었던 케이블 카를 타고 홀본산성 유적지로 올랐던 사연을 유머러스하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얘기를 들으며 웃다가 한참을 걷다보니 드디어 홀본산성에 도착했습니다. 판판한 평지에 둘러 앉아 법륜 스님의 말씀을 듣다보니 거짓말처럼 바람이 시원하고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마치 도를 구하기 위해 산자락에서 수학하는 제자가 된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고주몽이 이곳에 고구려를 건국하게 된 설화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역사 강의를 듣고 내려오는 길에 몇 가지 유적지를 더 보았는데, 그 중 고구려인들의 온돌을 사용한 옛 집 터가 기억에 남습니다. 조춘호 선생님이 온돌은 우리 문화권만 가지고 있는 유일무이한 자산이라고 이야기 하시면서, 북방민족과 남방민족의 성향 차이를 말해 주었습니다. 북방민족은 ‘빨리 빨리’가 입에 붙은 민족이고 그래서 말을 타는 기마 문화가 발달되었고, 반대로 좀 늦더라도 편하게 가고 싶은 성향의 남방 민족은 수레를 발달시켰다는 말씀에 다들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끄덕거렸습니다.nbsp능선이 거의 끝나가는 지점에서 ‘점장대’ 가 나타났습니다. 점장대는 장수가 주변의 지형 지세를 내다보며 병사들을 총 지휘하거나 적의 동정을 살피는 곳입니다. 점장대에 우뚝 서서 산 아래를 내다보니 큰 호수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호수는 위에서 내려보면 마치 용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중국 사람들이 환용호라 부르며 무척 좋아한다고 합니다. 멋진 풍광에 감탄을 하고 있는데, 알고 보니 호수가 생기기 전에는 이곳에 수많은 고구려 무덤과 유물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환인댐이 생기면서 모두 수장이 되었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홀본산성의 점장대에서 바라본 풍경nbsp다시 산 정상 부위에서 계단을 따라 내려가 동쪽 성벽을 따라 걸었습니다. 동쪽 성벽은 절벽으로 된 자연 성벽과 돌로 쌓아 올린 인공 성벽이 번갈아 가며 함께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동쪽 성문에 다다르자 스님이 이곳 성문의 특징을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 동쪽 성문nbsp“이곳은 동쪽 성문입니다. 성벽이 이렇게 꺾어진 곳에 문을 내었는데 이것을 공자형 성문이라고 합니다. 공자형 성문은 민자형 성문보다 여기저기서 공격할 수 있어서 성문을 방어하기에 아주 좋습니다. 옹자형 성문이 좋지만 산세 지형상 옹자형 성문을 쌓기가 어려우니까 공저향 성문을 쌓은 겁니다.”nbsp동쪽 성문을 지나 조금 더 걸으니 곧바로 남쪽 성벽과 성문이 나타났습니다.nbspnbsp▲ 남쪽 성벽과 성문nbsp“여기도 성벽이 하나 있는데 이건 남쪽 성벽입니다. 여기는 성문을 만들었다기 보다는 지나가는 통로 정도를 만든 것 같아요. 이것이 남문입니다. 보통 담장을 쌓으면 돌 하나가 떨어지면 우르르 무너지는데 돌을 맞물리게 쌓아서 하나가 떨어져도 무너지지 않습니다. 이렇게 개이빨식으로 성벽을 쌓았어요.“ nbspnbsp이렇게 홀본산성을 모두 둘러보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공기가 맑고 시원한 느낌이 참 좋았습니다.nbspnbspnbsp참가자들이 쉬이 체력을 잃지 않도록 고려한 배려가 느껴지는 저녁 식사를 맛있게 먹고 환인 시내에 위치한 숙소로 들어왔습니다.nbspnbsp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법륜 스님의 ‘민족의 시원’에 대한 역사 강의였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고조선, 단군, 홍익인간’의 단편적인 국사 지식에서 벗어나 우리 민족의 진정한 시원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시는 내용이었습니다.nbspnbspnbsp“우리 민족의 뿌리는 세 나라로 내려왔는데 환인의 한나라는 우리 나라라고 하기 보다는 우리 나라의 뿌리에 해당합니다. 그럼 배달 나라는 우리 나라이긴 한데 혈통적으로는 선진 문명 종족이 이주해 와서 세운 나라이지 토착 세력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주민의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서 토착세력이 왕이 된 것이 단군입니다. 그러니 단군은 혈통적으로도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시조라고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겁니다.nbspnbsp이렇게 9천년 전의 한나라, 6천년 전의 배달나라, 4천3백년 전의 조선 나라가 우리 민족의 뿌리입니다. 지금부터 약 2300년 전에 부여가 시작되기 전까지에 해당하죠. 이 발달된 문명이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고기’입니다. 환웅 시대와 단군 시대의 옛날 이야기를 기록했다고 해서 ‘환단고기’가 됩니다. 단군 시대에 들어오면 지금 한글의 원형인 38자모의 가림토 문자가 이미 사용이 됩니다. 세종대왕은 옛날에 쓰던 가림토 문자를 보고 그 중에 28개를 갖고 우리말을 기록하도록 한 겁니다. 그런데 나중에 주시경 선생이 24개로 다시 만든 것이죠.nbspnbspnbsp여기까지만 배워도 긴가 민가 할 수 있는데 이것의 유물이 발견된 곳이 있습니다. 요녕성 서쪽에 조양시가 있고 그 아래 객좌와 능원에 이 유물이 분포되어 있고, 외몽고 자치구의 접경 지대에 있는 큰 도시가 적봉시인데 여기에 홍산 문화라고 불리우는 유물이 대단위로 발견되었습니다.nbspnbsp중국의 천하제일 용이 나온 것이 5천년 정도 되는데 이 지역에서 7천년 전의 용이 출토되었습니다. 또 7천년 전의 마을이 발견되는 등 여기서 나온 유적들이 요녕성 박물관에 일부 전시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전시된 유물들을 보면 ‘아, 우리 선조들의 문명이구나’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피라미드의 왕릉과 성곽을 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축성술은 독특하고, 무덤도 이 지역 어떤 민족도 갖고 있지 않은 독특한 피라미드식 돌무지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누구도 없는 고구려의 창조물이 무덤과 성곽인데, 그 무덤과 성곽의 연원이 지금으로부터 5천년 전부터 이미 이 지역에 있습니다. 그러니 고구려는 배달의 문명을 계승했다는 점이 유물적으로 확실합니다.nbspnbspnbsp이런데서 우리는 지금까지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중국에서 왔다고 하면서 중국 문명의 아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같은 이웃에 있지만 중국과 우리는 인종적으로 완전히 다릅니다. 우리는 북방 몽골리안이고 중국은 남방 몽골리안입니다. 언어 문화적으로 우리는 우랄알타이어족이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부분 차이나티벳어족입니다. 언어가 다르다는 것은 문명의 원류가 다르다는 것을 말합니다.nbspnbsp그럼 우리의 선진 문명이 언제부터 중국보다 뒤쳐지기 시작했느냐. 지금부터 약 2천년 전이예요. 3천년 전부터 중국에 주나라가 들어오면서 고조선 중기와 문명의 수준이 비슷해졌어요. 왜 이렇게 되었냐? 우리는 청동기 문명이 굉장히 발달했고 청동기 문명에 안주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은 철기를 생활화시키면서 양자강 이남을 개발하고 생산량을 급격히 늘여갔습니다. 그러면서 문명의 전이가 일어났습니다. 마치 요즘 미국이 중국보다 월등히 앞서다가 세력이 비슷해지다가 중국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처음으로 중국으로부터 침공을 받았습니다. 한나라 군대가 침입해서 우리의 영토를 일부 차지한 것이 한사군입니다.nbspnbspnbspnbsp그래서 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자고 일어난 것이 다물군이고, 이 다물군의 정신으로 건국한 나라가 고구려입니다. 중국의 한나라 이후, 고조선의 멸망 이후에는 계속 문명이 중국 쪽에서 우리 쪽으로 흘러들어왔지 우리 쪽에서 중국 쪽으로 흘러 들어간 예는 많지 않습니다.nbsp그래서 우리의 역사를 2천년 만으로만 규정하니까 중국 문명을 계속 받아들인 역사가 되어 버립니다. 중국으로부터의 이런 문명적 열등의식을 극복하려면 상고사, 즉 민족의 뿌리에 대한 것이 공부가 되어야 하고, 이것이 되면 이제 여러분들은 적어도 고대사에 대한 열등의식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nbspnbspnbsp열등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역사를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잃어버렸다는 것은 잊어버렸다는 겁니다. 모르면 없는 것이 되는 거죠. 이런데서 우리가 이번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는 그냥 책상 앞에 앉아서 고조선 얘기를 한다면 여러분들은 그저 신화를 듣는 것 같을 거예요. 그러나 여기 와서 고구려의 성곽을 발로 밟고 무덤을 보면 틀림없는 현실로 느껴집니다. 그래서 ‘그런데 이것이 어디서 왔느냐?’ 하면서 계속 올라가면 민족의 뿌리를 찾게 됩니다. 그것은 배달 문명의 시작이고, 현재 우리의 뿌리에 해당합니다.nbspnbsp오늘은 홀본산성과 같이 지형 지세가 굉장한 것을 보았다면 여기에 기초해서 내일은 고구려의 유물과 유적을 충분히 둘러보고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해 보겠습니다.” nbspnbsp한국 외부에서도 한국이 중국 문화권이라고 말하고, 한국인들조차도 그런 열등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우리 나라의 역사를 뿌리부터 알게 되면 어느 때는 우리도 중국에게 문화를 전달했고, 어느 때는 중국도 우리에게 문화를 전달하는 상황이 있었다는 것을 객관적으로 알게 된다는 점이 인상 깊었습니다. 항상 중국 또는 다른 강대국에 대해 어느 정도의 열등감을 가지고 살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각이 새롭게 느껴졌습니다.nbsp잠자리에 들기 전 조별로 모여 마음 나누기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루에 여러 유적지를 둘러보며 많은 설명을 듣기 때문에 사람마다 유독 마음에 다가왔던 부분이 다를 수가 있겠지요. 그런데 오늘은 34명의 조원들이 입을 모아 이야기했던 것이 홀본산성에서 본 비류수입니다.nbspnbspnbsp환인댐이 세워지면서 과거 고구려인들의 유물과 유적들이 통째로 수장된 모습을 높은 산 위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자신들의 유적이었으면 그렇게 취급했겠냐며 분통을 터뜨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물에 잠긴 그 모습이 경치 그 자체로는 너무 아름다워 한숨이 나왔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nbspnbsp또 다른 친구는 홀본산성을 내려오면서 본 우물터와 천지가 기억에 남는다고 했습니다. 우물터 근처 나무에 붉은 색 천이 화려하게 매어져 있었는데 이것은 고구려 유적과는 상관없는 한인들의 문화라고 합니다. 우물터에는 그 붉은 색 천들과 색을 맞추듯이 화려한 색의 비단 잉어들이 살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우물터에 동전을 던져놓는 통에 잉어들이 동전 독을 피해 외딴 곳에 모여 뻐끔대는 모습이 마음 아팠다고 합니다. 산을 내려오는 것만으로도 힘에 벅차 제대로 보지 못 하고 지나가기 쉬운데 이 친구들은 작은 생명도 눈여겨 보고 공감해 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조별 마음나누기를 마치면서 청년 동북아 역사 대장정의 1일차 일정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도 어떤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 될지 기대가 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남현진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8.8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백암산성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를 맞이하여 고구려의 요동성을 지키는 산성인 백암산성에 오른 후 7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지난 8월2일에 심양에서 출발한 동북아 역사기행은 7일 동안 고구려, 발해, 독립운동, 압록강, 백두산, 두만강을 달리고 달려 오늘 백암산성 답사를 끝으로 마치게 됩니다. 오늘도 어김 없이 숙소에서 새벽 4시에 일어난 기행단은 5시에 버스에 올라타 역사기행을 시작했습니다. 지금껏 한 사람도 늦는 사람 없이 정시 출발입니다. 이번 역사기행은 통일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참여해서 그런지 뭔가 남다릅니다.nbspnbsp버스에 올라타니 스님은 “잘 주무셨어요?” 하는 인사와 함께 “오늘은 먼 길을 가야 해서 점심을 식당에서 따로 먹을 시간이 없다”며 “새벽 시장에 내려줄테니 아침과 점심 먹을 것을 미리 사 두세요”라고 얘기합니다. 새벽에 비가 살짝 내렸기 때문에 시장에 사람들이 있을까 싶었지만 새벽 5시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습니다. 죽, 과일, 빵 등 요기할 것들을 주섬 주섬 챙기고 버스에 올라탔습니다.nbspnbsp▲ 길림 새벽 시장nbspnbsp길림에서 심양 근처의 백암산성까지 가는 길은 대략 7시간 정도 걸리는데 버스 안에서의 긴 시간을 활용하여 오늘도 즉문즉설이 진행되었습니다. 스님은 “스님께 묻고 싶은 점, 다른 사람에게 묻고 싶은 점,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소감, 부르고 싶은 노래, 이 4가지에 대해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해보라”고 하면서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 버스 안 즉문즉설nbsp즐겁게 즉문즉설이 오가는 사이 오후1시가 다 되어서야 백암산성 입구에 당도하였습니다.nbspnbsp송수신기로 스님의 해설을 들으며 남서쪽으로 빙 둘러친 성의 외벽을 돌았습니다. 처음에는 성벽 위를 걷다가 성벽에서 내려와 다시 성벽을 바라보니 그 웅장함에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스님은 성벽을 오르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성의 이곳 저곳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 백암산성nbsp“이쪽이 서쪽 성벽입니다. 여기 성벽의 특징은 치가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도 있다는 점입니다. 치라는 것은 사실 밖에서 성벽을 보호하기 위해 쌓는 것인데, 안에도 치를 쌓은 이유는 아마도 성벽 위에서의 방어 면적을 넓히기 위해서 그런 것 같아요.nbspnbsp치의 간격은 50m60m 정도 됩니다. 이것을 보면 당시에 화살로 공격할 수 있는 유효 거리가 30m 정도 되지 않았겠나 싶어요. 성벽을 쌓은 돌은 전부 이 산에서 파낸 겁니다. 이 산이 돌산이거든요.nbspnbspnbsp저기 지금 발굴하고 있는 곳이 다 병영 자리입니다. 올라가시다 보면 오른쪽에 돌로 빗물을 모으기 위해 바위를 판 자리가 있어요. 병사들의 물 사용을 위해 거기에 빗물을 저장했어요. 저 아래에서 물을 들고 오기가 어렵잖아요. 산성은 반드시 우물을 확보해야 산성이 됩니다.nbspnbsp▲ 빗물을 모으기 위해 바위를 판 자리nbsp저기 위에 망대가 보입니까. 망대 주위가 내성입니다. 망대에서 남문까지 남북으로 480m입니다. 동서로는 440m입니다. 외성을 한바퀴 돌면 2km 정도 된다고 볼 수 있어요. 여기는 성벽이 있는데 저쪽 반대편에는 성벽이 없어요. 왜냐하면 저쪽편은 깍아지른 절벽이거든요.nbspnbspnbsp여기 보시면 7단까지는 피라미드식으로 쌓아올려서 안정성을 확보하고 그 위에서부터 일직선으로 쌓았죠. 외벽 바깥에는 회를 바릅니다. 회를 발라야 미끌미끌해서 기어오르기 어렵죠. 그리고 여기는 성벽 밖에 한 3m 정도 떨어져서 별로 높지 않은 작은 덧성을 또 주욱 쌓았어요. 해자를 못 만드니까 해자 대신에 덧성을 쌓은 겁니다. 적이 성벽 위로 기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죠.nbspnbsp현재 고구려 성 중에 그 웅장함이 제대로 남아있는 대표적인 성입니다. 국내성도 파손이 너무 많이 되었고, 환도산성도 파손이 많이 된 것을 최근에 새로 복원한 것인데, 이 성은 원래 있던 그대로입니다. 얼마나 돌이 잘 맞물려 있습니까.”nbsp돌멩이 하나 하나 마다 선조들의 숨결이 닿아 있을 터입니다. 조심스레 손끝으로 돌멩이를 만져보며 장구한 시간을 느껴봅니다. 스님은 성벽의 웅장한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서서 대중들이 지나가는 순서대로 10여명씩 무리지어 기념 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nbspnbspnbsp백암산성은 집안처럼 유적들이 무리지어 있지 않고 외진 곳에 있어서 혼자서 이곳에 다시 오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다시 이곳에 와볼까 하는 심정으로 스님의 목소리, 발걸음, 시원한 바람, 눈 앞에 펼쳐진 풍경에 더욱 또렷이 집중해 봅니다.nbspnbsp성벽을 오르며 스님은 “우리가 이렇게 성벽을 밟고 다니는 것도 길게 보면 엄청난 파괴에 해당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번 올라갔다 내려올 때마다 돌멩이 하나는 굴릴 것 아니겠어요?” 라며 걱정스런 마음을 내비치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대중들도 조심스레 걸음을 걷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망대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뻥 뚫린 남서쪽 벌판이 훤히 내려다 보여서 고구려를 향해 접근하는 것은 무엇이든 다 보일 듯 전망이 탁 트여 있었습니다. 스님은 망대에 우뚝 서서 주변 사방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것이 망대예요. 여기 와서 보세요. 사방으로 오는 적을 한눈에 딱 내려다 볼 수 있죠.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요양시가 있는데, 요양이 옛날에 요동성이였어요. 이 성은 요동성을 보호하기 위한 산성이예요. 요동성은 저기 산 보이죠. 저 산 넘어 뒤쪽에 있어요.nbspnbsp▲ 망대에서 바라 본 전경nbsp동쪽으로 흐르는 강 이름이 태자하입니다. 이 강은 흘러서 발해만으로 들어 갑니다. 동쪽은 강을 끼고 완전히 절벽이죠. 이 강을 동쪽 해자로 하고, 성벽은 남쪽과 서쪽, 북쪽으로 아주 튼튼하게 쌓았습니다. 주로 서쪽에서 적이 공격을 해 오므로 서쪽 성벽이 가장 두껍습니다. 남쪽은 절벽 위에 성벽이 쌓여져 있고요.”nbspnbsp망대에서 바라 본 풍경은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정말 절경이였습니다. 그리고 스님은 성을 튼튼하게 쌓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성을 지키는 사람도 중요하다며 백암산성과 관련해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nbspnbspnbsp“이 성을 몇 년도에 쌓았는지는 기록이 없고요. 547년에 성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있어요. 그리고 549년에 돌궐족 1만명이 침입했는데 함락을 못하고 돌아갔다는 기록이 있고요. 당태종의 공격으로 요동성을 함락되니까 이곳 성주가 자발적으로 항복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시성의 양만춘은 끝까지 저항을 해서 결국 물리쳤죠. 이것을 보면 성을 얼마나 견고하게 쌓았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결국 이 성을 지키는 사람이 어떠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죠.”nbspnbsp망대에 올라 탁 트인 시야를 보고 기뻐하는 대중들에게 스님은 한마디 덧붙였습니다.nbspnbsp“마지막날 고구려의 기상을 많이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좀 쫀쫀하게 굴지 마세요. 아이들 성적이 좀 떨어지면 어때요? 아내와 남편에게도 너무 쫀쫀하게 굴지 마세요. 아시겠어요?”nbspnbsp▲ 망대nbsp모두들 “예” 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 백암산성 망대에 올라서 광활한 만주 벌판을 보고 있으니 정말 가슴이 탁 트이면서 그동안 얼마나 작은 것에 연연하며 안절부절 했는지 돌아봐졌습니다. 이제는 통일 한국을 건설하는데 작은 정성이라도 보태어 보는 삶을 살아보겠노라 다짐하며 산성에서 내려왔습니다.nbspnbspnbsp성을 다 내려와 다시 마을을 빠져 나가는 길에는 다시 한 번 백암산성을 먼 발치서 볼 수 있었습니다. 깍아진 절벽을 한쪽 성벽으로 하고, 평지에 닿는 부분까지 외성이 둘러쳐져 있어 산성의 윤곽이 한눈에 들어오면서 그 크기와 웅장한 자태에 광할한 대륙을 지배하던 옛 고구려인의 웅장한 기상과 스케일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멀리서 본 백암산성의 모습nbsp백암산성을 끝으로 역사기행의 모든 일정을 마친 기행단을 위해 스님은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신지 “심양으로 들어가는 길에 요동성을 한 반퀴 둘러보면서 가자”고 했습니다. 고속도로를 달리며 스님은 “저기 오른쪽이 요동성이예요” 라고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 고구려 당시 요동성이 위치했던 요양시.nbspnbsp심양 시내에 있는 숙소에 도착한 기행단은 짐을 모두 내리고 내일부터 이 버스를 다시 이용하게 될 청년 역사기행팀을 위해 버스 안을 깨끗이 청소했습니다. 짐을 숙소에 풀고 곧바로 강당에 모인 대중들을 위해 스님은 “수고 많으셨다”고 격려해 주면서 7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마무리하는 정리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먼저 기행 일정이 너무 빡빡했다고 하면서 혹시 빨리 움직이라고 재촉한 것이 상처가 되었거나, 개인 사진 찍자고 했는데 응해주지 않아서 서운했을 수 있다며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면서 독립군은 원래 쫓겨다니며 싸우는 것이라며 모두 웃고 넘어갈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여행은 좀 한가해야 하는데, 좀 빠듯했죠?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원래 독립군이 쫓겨 다니지 한가하게 다니겠습니까? 쫓겨 다니는 가운데서 마음을 한가하게 가져야 되는 거겠죠.” nbspnbsp원래 오늘 계획은 박물관에 가서 요하 문명의 유물을 보면서 전체 마무리를 할 계획이었는데 박물관을 이전하는 관계로 아쉽게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스님은 이런 아쉬움을 잠깐 언급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장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이 소중하다고 강조하면서 마지막 정리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유물과 유적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발로 밟아 볼 수 있으면서도 우리 민족의 기상을 갖고 있는 나라가 바로 고구려와 발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장에 와서 내 눈으로 이것을 확인하면서 도대체 이 문명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계승이 되어 갔느냐를 살펴보았죠.nbspnbsp고구려의 문명은 부여를 계승했고, 부여는 단군 조선을 계승했고, 단군 조선은 배달 나라를 계승했고, 배달 나라는 자기의 연원을 환인의 한나라에 두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거슬러 올라가서 뿌리를 찾았고, 그 다음에 이 고구려와 발해의 문명은 어떻게 이어져 내려갔는가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 문명이 내려가다가 끊긴 부분이 발해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제대로 이어가야 할 과제가 우리에게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지금까지 이어져 왔지만 그 뿌리가 없는 문명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신라 문명입니다. 신라는 무엇을 계승했다고 하는 뿌리가 단절되었다면 발해는 후손이 단절된 경우입니다. 그 두 나라의 가교 역할을 한, 즉 위로도 잇고 아래로도 이어주는 것이 고려입니다. 그래서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함으로 해서 후손이 없는 발해와 조상이 없는 신라를 건너뛰어 다 포함해 버렸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라도 잇고 발해도 이었습니다. 신라와 발해가 남북국 시대를 형성했지만 하나는 후손은 있는데 조상이 없고, 하나는 조상은 있는데 후손이 없는 이 간극을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다고 하면서 이어냈습니다.nbspnbsp그렇게 해서 조선으로 이어지고 상해 임시정부로 이어져서 오늘날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갈라졌는데, 여기서 또 우리가 자칫 잘못하면 하나는 후손이 없고 하나는 뿌리가 없는 이런 일이 또 발생할 수도 있는 문제입니다.”nbsp고려가 후손이 없는 발해와 조상이 없는 신라가 갖는 한계를 서로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했다는 말씀에 모두 공감을 했지만, 마지막에 지금의 남북도 그런 위기에 처해 있다는 말씀은 큰 경종으로 들렸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역사 의식과 민족사관을 제대로 갖는 것은 지금 당면한 남북의 통일 문제를 풀어가는 올바른 해법을 제시해 줄 수 있고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가는 일이 됨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그래서 우리가 현실적으로 통일의 문제를 다루려면 결국은 대한민국이 중심이 될 수 밖에 없는 문제인데, 대한민국의 뿌리를 찾아가보면 장대한 민족사의 뿌리로서 연결되기에는 약간 부족함이 남아있습니다. 만약에 이것만 이어 가게 되면 우리의 역사적인 정통성이 위축되고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제의 침략시기에 독립투쟁을 했던 부분을 그래도 비교적 많이 계승한 북한의 역사를 민족사에서 제외시킬 게 아니라 이것을 우리의 역사 일부로 받아들여주는 역사 의식이 필요합니다. 현실적으로는 대한민국이 이 문제를 중심에 놓고 풀어야 되지만 결국 북한을 포용해서 북한의 역사도 껴안아줘야 우리 역사의 상처를 치유해 낼 수 있습니다.nbspnbsp과연 이것을 우리가 해낼 만한 포용성이 있겠느냐. 또 그만한 역사 의식이 있겠느냐. 또 과거를 돌아봤을 때 신라와 발해가 겪었던 문제가 재발하지 않도록 할 만큼 미래를 보고 이 문제를 볼 수 있겠느냐, 아니면 현재 당면한 남북 간의 적대적인 이것만 보고 문제를 풀겠느냐 이런 문제죠. 그래서 남북은 현재 상태라면 따로 따로 오랜 기간 흘러갈 가능성이 높고, 또 통합을 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통합이 되느냐에 따라서 뭔가 결손이 생길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합이 되도록 해야 될 당면 과제가 있고, 통합만 된다고 되는 게 아니라 그 통합이 상승효과를 가져 올 수 있는, 즉 민족사를 온전히 계승할 수 있는 그런 통합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그런데 남한의 정치 지도자가 얼마 만큼 또는 국민들이 얼마나 그런 생각까지 하고 있느냐 이런 문제죠.nbspnbsp그래서 과거의 역사를 보면서 민족사관을 제대로 정립하는 것은 과거의 뿌리를 찾는 것 뿐만 아니라 미래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데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고려인들이 그런 역사의식이 없었다면 서희의 담판은 꿈도 꿀 수가 없는 일인데, 바로 그런 역사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서희의 담판이 승리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nbsp역사 의식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깊이 와닿았습니다. 더군다나 지난 7일 동안 역사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그 중요성을 더욱 체감했기에 스님의 말씀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배달 문명과 단군 조선 문명을 함께 살펴보았던 것을 다시 상기시켜 주었습니다.nbspnbsp“그런 면에서 과거 환인 하느님의 한나라라고 하는 것은 꼭 우리 나라의 시작이라고 볼 수 없지만 우리 민족의 연원이고 원류라고 볼 수 있겠죠. 우리 민족의 시작은 하늘이 처음 열렸다고 하는 신시 개천, 즉 배달 나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배달 나라를 온전하게 계승한 것이, 즉 신시를 새롭게 하고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건국이념으로 재정립한 것이 단군의 조선 나라입니다. 이런 배달 나라와 조선 나라의 문명 수준은 발생 연대로나 문명의 수준으로나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라고 하는 곳들의 문명 수준 보다 앞섰으면 앞섰지 뒤지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전해 내려오는 역사로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것을 증거 할 수는 없지 않느냐 했지만 그것은 바로 요하 문명의 유적이 발견되면서 해결되었습니다. nbspnbspnbsp요하 문명에는 고구려 무덤의 원형인 돌로 쌓은 거대한 피라미드가 가장 많이 남아있고, 고구려 유적은 15001600년이 지나면서 많이 파괴 되었는데 하물며 이것은 50006000년 전의 것이니까 어떻겠어요? 피라미드처럼 남아 있기는 어렵겠죠. 그러나 발굴을 몇 개 했을 때의 그 규모는 돌로 쌓은 7층 적석총으로nbsp밝혀지고 있습니다.nbspnbsp산성에 대해서는 석성을 쌓는 고구려 성곽의 독특함이 있는데, 이와 똑같지 않지만 성산자 산성이라고 하는데 산성의 흔적이 5천년 전 것이 남아있고, 또 적봉시 가까운 곳에 있는 큰 댐 때문에 많이 파괴가 되긴 했지만 치의 기본 형태를 가진 것들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서 이것은 그냥 석기시대의 수준 갖고는 그런 규모의 무덤이나 성을 쌓을 수도 없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상당히 인구가 밀집되어 있고 권력이 결집된 고대 국가의 형태를 이루어야만 이것은 가능합니다. 거기서 출토된 유물 중에서 특히 옥기는 그 정교함이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입니다. 이런 것들을 볼 때 우리는 배달 문명과 단군 조선의 문명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nbspnbsp또 스님은 선비족의 연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도 고조선의 구성원으로 품어안을 수 있어야 한다며 역사를 보는 더 큰 시야를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 문명은 마치 아리안족이 서쪽으로 간 서아리안과 동쪽으로 간 동아리아인이 있듯이 오늘의 유럽인이 있고, 서쪽인 하북성 쪽으로 내려간 집단은 은허라고 하는 곳에 수도를 정하고 은나라를 세워서 청동기 문명을 찬란하게 꽃피웠고, 이것은 중국 문명의 일부가 현재 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에 그 일파가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 요동 지역이죠. 그리고 그 일파가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것이 있는데, 북쪽으로 올라간 부여에 대해서는 조금 더 연구가 되어야 될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단군을 계승했다고 하지만 문명의 이동 과정으로 볼 때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오지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일은 사실 없거든요. 그런 면에서 볼 때 우리가 인류학적으로 추정해 본다면 오히려 토착 세력의 일파가 단군 문명을 받아들이고 강성해져서 단군 조선의 혼란기에 단군을 계승했다고 보는 게 맞지 않겠나 싶어요.nbspnbspnbsp그들이 남하 해서 내려온 것이 고구려라면, 그것이 동쪽으로 내려간 것이 동부여가 됩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 비석에도 주몽이 말을 타고 북에서 남으로 내려왔다 이렇게 기록이 되어 있거든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서쪽으로 간 것은 은나라이고, 은나라가 멸망하고 중산국이라는 나라를 그 후에 재건해서 북경 근방에서 상당기간 존속한 그런 흔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후대가 끊겨 버렸어요. 그래서 우리 역사로 계승해서 계속 못 가고 중국의 역사 일부로 편재가 되었죠.nbspnbsp다만 그 활동 지역인 북경 근처에는 우리 민족의 아래에 있던 선비족이 춘추전국시대에 연나라를 건국하고, 진나라에 멸망했다가 남북조 시대에 또 일어나 연나라를 만듭니다. 소수 민족으로 있던 나라 중에 가장 먼저 독립해서 제국을 구성한 게 선비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곳은 은나라, 중상국, 그리고 선비족의 연나라 이렇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그리고 이 고조선의 영토 중 서쪽 일부를 한사군이 점령하게 되면서 원래 본거지에 내려와서 동쪽으로 이동해 온 것이 후기 고조선이고, 후기 고조선 중에 약간 북쪽에서 일어나서 이것을 계승한 것이 부여입니다. 그러나 부여가 고조선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의식이 적었기 때문에 마지막 단군인 고열가의 후예인 고두막이 의병을 일으켜서 다물군을 조직해 한의 침략을 막아내고 부여의 정통을 계승한다고 한 것이 북부여이고, 동쪽으로 이주시킨 게 동부여가 됐어요, 여기서 북부여와 동부여가 갈라지고, 주몽은 북부여의 후예라고 하지만 살기는 동부여에 살다가 다시 쫓겨나서 북부여로 와서 고구려를 건국한 것입니다. 주몽은 다물군에 참여했는데, 북부여를 계승했다는 것은 곧 다물 정신을 계승했다 이렇게 볼 수 있어요.nbspnbsp고구려는 조선 나라의 영토를 다 차지한 것이 아니라 그 영역에다가 한사군이 점령했던 영역의 일부와 새롭게 동쪽으로 확대해서 토착 세력이 차지하고 있는 많은 부족들을 정복해서 대제국을 건설하게 됩니다. 여기에 초기에는 위나라와 부딪혀서 관구검의 침입이 있었고, 그 다음에 연나라가 일어나서 연나라와 부딪힌 것이 모용왕의 침입입니다.nbspnbsp결국 우리 민족의 중심 지역은 고조선 이후로 지금의 북경을 중심으로 하는 요서 지역에서 동쪽으로 더 치우쳐서 왔고, 서쪽으로 내려간 건 망했고, 본거지 영역은 다른 민족인 선비족이 차지했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고구려가 발해로 계승될 때는 또 동쪽으로 옮겨가서 토착세력인 흑수말갈까지 흡수해서 대제국 건설하기는 하지만, 백제는 남쪽으로 내려오고 신라가 부흥하면서 민족의 중심은 원 출발지에서 더 동쪽으로 치우치고 더 남쪽으로 점점 이동해 가는 이런 우리 민족사를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거지였던 이 지역에 힘의 공백이 생겼죠. 그 빈자리에 다시 일어난 것이 거란족입니다. 고구려 아래에 있던 거란족이 고구려 멸망 후에 발해에 약간 소속되어 있다가 그 빈자리에서 일어나서 요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말갈족은 고구려의 후예들과 연합을 해서 발해를 세웠다면, 거란족은 거기서 빠져나와 있다가 독립된 나라인 요를 건국하였고, 발해가 멸망하고 결국 말갈족도 여진족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다시 일어난 게 금나라입니다. 여진족들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금나라를 세우게 됩니다.nbspnbsp여기서 우리는 발해 멸망을 통해 고구려의 계승이 끊어지고, 남하해 내려온 백제가 신라에 통합되어 신라가 되고, 이 신라를 계승한 고려가 결국은 중심지가 한반도로 국한이 되는 벌어지게 됩니다. 즉, 신라 시대에는 신라는 반도에 있지만 발해는 대륙에 있었는데 발해가 멸망하면서 결국 반도만 갖게 되고, 함께 발해를 유지했던 말갈족들이 여진족이 되어 금나라를 건국하면서 우리의 본 영토인 고조선의 옛 땅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북방에 있던 몽골이 다시 일어나서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를 복속시키고 중국의 남송까지 정복해서 대제국을 형성하게 됩니다.nbspnbsp이렇게 해서 결국 몽골족의 원나라가 일어났고, 그 전에 여진족의 금나라, 그 전에 거란족의 요나라, 훌쩍 더 뛰어서 그 전에는 선비족의 연나라가 일어났는데, 이런 나라들은 다 고조선의 민족 구성원들입니다. 소위 말하면 토착 세력에 속합니다. 이 배달나라와 고조선의 사람들은 선진 문명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예요. 여기에 토착해 있던 세력들이 이 문명을 전수받아서 동북아 대륙에서 차례차례로 제국을 건설해 나가게 되고, 소위 문명의 출발인 우리는 반도 남쪽으로 밀려 나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그래서 우리가 이런 나라들을 자꾸 중국이라고 말하는 것은 맞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해서 우리 역사는 쪼그라 들고 중국의 역사는 자꾸 커지게 됩니다. 그래서 현재 모든 동북아 역사가 다 중국 역사의 일부가 되는 현상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거기다 고려를 계승한 조선은 자발적 사대를 했습니다. 고려는 민족 의식은 있었는데 힘이 부족했어요. 고려는 동북아에 있는 민족들이 강성해지면서 그 원을 성취하지 못했다면, 조선은 북방 민족이 아닌 한족인 중국에 대해 자발적 사대를 함으로 해서 우리 민족의 정기가 왜곡되었습니다. 이것은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 더 왜곡이 되고, 최근에는 서양문명이 들어오면서 민족의 정기 측면에서는 더욱더 위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어요.”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우리가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를 다시 강조하면서 시대적 과제인 통일을 향해 책임을 다하는 자세를 가져줄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그러나 서양 문명을 받아들이면서 우리는 지난 50년 동안 물질적인 문명의 기술은 지금의 정도까지 회복을 했을 뿐만 아니라 현재의 국력은 신라나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만에 가장 좋아진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nbsp그러나 이 좋아진 상태가 지속되겠느냐? 아닙니다. 지속될 수 없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롤 모델로 삼은 미국이 점점 정체 국면에 들어 후퇴하고 있고, 또 중간 모델로 삼은 일본도 지금 정체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도 뒤따라 정체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래도 자기 토대를 갖고 있는데 우리는 최근에 중국의 경제 성장에 의해서 10년 넘은 정체를 겨우 면하고 경제 성장이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중국이 만약 저성장으로 가게 되면 우리는 바로 후퇴로 갈 위험이 굉장히 높습니다. 거기다가 미중의 경쟁에서 한미일 삼각 군사동맹으로 우리가 편재되면 현재의 남한만 지키는 안보는 가능할지 몰라도 통일도 어려워지고 경제 성장도 굉장히 어려워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거에 가능했기 때문에 미래에도 계속 잘 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상황이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만약 조금만 잘하면, 즉 이러한 성장을 좀 더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사실 통일이 없이는 불가능해요.nbspnbsp통일은 어떻게 보면 돈이 드는 것도 있지만, 그것은 새로운 투자처가 생기기 때문에 미국의 서부 개척처럼 이것은 당분간 성장의 동력이 됩니다. 투자는 돈이 부족하면 빌려서 투자하면 됩니다. 소비는 돈을 빌려서 하면 안 되지만 투자는 돈을 빌려도 됩니다. 그러나 이것만 갖고는 안 돼요. 그래서 창조성이 사실은 핵심인데, 우리가 이러한 성장의 동력을 좀 유지하면서 대대적인 혁신을 해서 전체적인 창조성을 키우는 이런 사회 개혁을 해줘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지금까지 해 놓은 여기에서 주저앉기에는 좀 아깝지 않냐. 이것을 더 끌고 나갈 수 있는 우리의 비전을 마련할 수 있는데, 그 첫 단계가 통일이고, 두 번째 단계가 동아시아 공동체이고, 세 번째 단계가 그것을 기초로 세계 문명의 중심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이런 백 년의 계획을 우리가 설정해 볼 수 있습니다.nbspnbsp가능성이 있느냐? 가능성이 있습니다. 필리핀이 이런 계획을 세우면 가능하냐? 그건 안 됩니다. 옛날에 우리가 이런 가능성을 세우면 되었느냐? 안 됩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이 기회를 잘 살리면 그 가능성이 열려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정말로 우리가 우리 후손들에게 nbsp자랑스러운 나라를 물려주기 위해서는 지금 조금만 노력하면 됩니다. 그러나 다들 개인생활에 빠져있고 분열해 있고 이런 것은 좀 안타까운 것 같아요.nbspnbsp그런 면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의 출발이 되는 통일을 첫 발로 내디더야 되고, 그 통일의 첫 발을 내딛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 좀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즉, 남한만 어떻게 잘 하겠다 하는 이런 의식이 아니라 남한을 잘 지켜내는 건 말할 것도 없고 북한까지 포함해서 전 민족적인 전체 이익을 어떻게 지켜내고 확장할 거냐 이런 의식이 있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지난 70년 역사는 남한 지키기에 급급한 사고에 젖어 있기 때문에 민족 전체의 이익을 보는 관점이 부족합니다.nbspnbsp또 너무 이웃과 싸우는 배타적 민족주의는 세계 문명의 조류와 안 맞습니다. 이웃 나라도 이익이 되고 평화도 공유하고 이익도 공유하는 그런 의미에 있어서의 열린 민족주의적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자기 정체성은 갖되 다른 이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민족의식이 아주 부재하거나 아니면 아예 배타적 민족의식으로 주장합니다. 그래서 nbsp세계인이 봤을 때는 인류의 보편성에 떨어지는 주장을 하거나 아예 자기 아이덴티티가 없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극복을 해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nbspnbsp우리가 역사 기행을 하는 이유는 여행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얘기를 우리가 한국에서 앉아서 한다면 지식으로는 다가올지 몰라도 마음에 다가오기는 어렵고, 마음에 다가오지 않으면 행동은 절대로 안 됩니다. 우리는 결국 행동하자는 것인데, 행동을 하려면 마음이 동해야 되고, 마음이 동하려면 현장에서 보고 느꼈을 때 사람의 마음이 동하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돈을 들이고 아까운 시간을 내어서 역사기행을 하는 이유는 이렇게라도 우리가 방향을 잡아서 몸부림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시대에 책임을 다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nbspnbsp우리가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일을 도모하는 건 사람이 하지만 뜻을 이루는 건 하늘이 한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되 결과에 연연해하지 않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역사 속에서 늘 후회하게 됩니다. 차 가고 손들기 식의 이런 아쉬움을 남기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이런 일을 하는 겁니다.nbspnbsp그러다보니까 먹는 것도 좀 부실하고, 자는 것도 부실하고, 시간에 쫓기기도 하고, 오늘 같은 날은 오줌도 제대로 못 누고요... 이런 목표로 기행을 했다는 말을 다시 한번 드리면서 전체 일정을 마무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nbspnbsp마지막까지 정성을 기울여 바른 관점을 잡아주시는 스님께 대중들은 감사의 마음을 담아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점을 정리해보는 소감문 작성 시간을 가졌습니다. 조별로 소감문을 함께 읽고 들으며 서로의 느낀 점을 공유하고 나니 역사기행을 더욱 풍성해진 느낌입니다.nbspnbsp▲ 소감문 작성nbsp자연스럽게 저녁 식사가 나오면서 분위기는 더욱 화기애애해 지고, 스님은 “역사기행 실무를 맡아 준 조춘호 선생님께 소감을 들어보자”고 하며 송수신기를 넘겼습니다. 조 선생님은 “서먹서먹했던 얼굴이 벌써 정이 들었다” 며 “만나면 헤어지는 것이 이치”라며 시원섭섭한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리고 “남북 통일”을 외치며 건배 제의를 하자, 대중들은 많은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각 차량을 담당한 차장들이 나와 기행단을 오지 시골마을 구석구석까지 안전하게 데려다 준 운전 기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전달했습니다. 운전 기사들은 부끄러워서 앞에 나오지 못했고 조 선생님이 대신 선물을 받았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조별로 소감나누기를 한 후 추천된 소감문을 한 명씩 발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통일의병 교육을 받고 역사기행에 참가한 한 분은 밀림의 생명력을 느끼게 해 준 백두산 전경과 물속을 걷고 부서진 나무 다리를 건너며 독립군이 되어 본 청산리 전투터의 기억을 말하며 “일상으로 돌아가면 화내고 절망하기 보다는 통일을 위해 작은 기여라도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nbspnbsp▲ 소감문 발표nbsp또 어떤 분은 “황하 문명보다 2천년 앞선 요하 문명을 이야기해 준 스님의 역사 강의는 우리 민족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해준 가슴 뛰는 감동의 시간이었다”고 하고, 어떤 분은 “선비족의 연나라, 거란족의 요나라, 여진족의 금나라를 고조선의 구성원으로 품어 안자는 스님의 창의적인 역사관을 듣고 말할 수 없이 벅차 올랐다”고 소감을 나눠주었고, 또 어떤 분은 “좋은벗들의 난민 구호 활동 이야기를 듣고, 끊임없이 펼쳐진 옥수수 밭을 보면서 추위와 공포에 떨고 있는 북한 동포들이 떠올라 목이 메어졌다”며 울먹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고 알려주려고 한 스님의 자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nbspnbsp소감문이 한줄씩 읽어내려갈 때마다 대중들은 지난 7일 동안 함께한 시간들이 떠올랐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하고, 때론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습니다.nbspnbsp소감문 발표 후에는 해당 조의 사람들이 함께 나와 역사기행을 통해 느낀 점을 노래와 율동으로 표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7일 동안 금새 친해졌는지 조별로 기발한 아이디어로 노래를 개사하거나 율동을 준비해 와서 모두를 웃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특히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nbsp통일에 대한 열망이 무르익었는지 통일을 주제로 개사한 노래를 많이 불렀습니다.nbspnbspnbspnbsp조별 발표를 모두 마치고 밤 9시가 되어 오늘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하였습니다. 대중들은 그동안 역사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하느라 조별로 대화를 많이 나눠보지 못했는데 삼삼 오오 모여서 조금 더 회포를 푸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렇게 역사기행의 마지막 밤이 저물었습니다.nbspnbsp내일 역사기행단은 숙소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심양 공항으로 이동해 한국으로 귀국하게 됩니다. 그리고 스님은 계속 중국에 남아서 이번에는 청년 역사기행팀을 맞이해 다시 역사기행 안내를 시작합니다. 내일부터는 청년들과 함께하는 역사기행 소식을 전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nbsp
2015.8.7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 독립운동 유적지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역사기행 6일째를 맞이하여 청산리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고 통일 한국이 우리에게 주는 희망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오늘은 평소보다 이른 3시 30분에 일제히 기상했습니다. 아침 식사는 연길의 새벽 시장에 가서 하는 것으로 하고 4시까지 버스에 짐을 싣고 연길 새벽 시장으로 향했습니다. 중국 사람들은 아침을 해먹지 않고 시장에서 사먹는 경우가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새벽 시장이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 연길 새벽 시장nbspnbsp시장에는 두부, 야채, 어류, 과일 등 없는 것이 없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시장를 볼 수 있도록 허용된 시간은 20분, 서둘러 식당에 들어가 순두부 한 그릇을 먹고 간식 거리를 구입해 버스에 올랐습니다.nbspnbsp오늘 첫 방문지는 청산리 전투터입니다. 햇살이 강하게 내리쬐는 무더운 날씨 속에 역사기행단은 산으로 난 비포장 도로를 계속 올라가 백운평이란 곳에 이르러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백운평은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후퇴를 하다가 화가 나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마을이 자리잡고 있던 터입니다. 지금은 사람의 흔적이 없고 잡초만 무성한 쑥대밭이 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 백운평nbsp잠자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군인들의 총칼 앞에 목숨을 잃었을 사람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련해졌습니다.nbsp스님의 그 때의 정황을 잠시 설명해 주면서 “백운평에서 죽은 민간인 100여명의 원혼을 기리며 묵념을 하자”고 하셔서 다함께 묵념을 한 후 해탈주 일편 독송을 하였습니다.nbspnbspnbsp해탈주를 마치고 스님은 “이런 선조들의 희생이라는 기반 위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라며 그동안 잊고 지낸 수많은 선조들의 노고를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nbspnbsp이어서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이라는 곳까지 3km를 함께 행군했습니다. 아침 이슬로 바지가 젖고, 등 뒤로 햇살이 뜨겁게 비추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일렬로 줄을 서서 행군을 계속 이어갔습니다.nbspnbsp▲ 청산리 전투터로 향하는 길nbsp예전에 독립군들도 이 길을 따라 올라갔을 것을 상상하며 한참을 오르다보니 얼음처럼 차가운 개울이 나타났습니다. 신발을 벗고 건너기에는 물살이 세고 깊자 스님은 “그냥 신발 신고 건넙시다” 하며 앞장을 섰습니다. 누군가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여성 분들이 물살에 밀려 넘어지려고 하자 남자 분들이 일렬로 서서 버팀목이 되어 주었습니다. 독립군들도 이렇게 서로 의지하며 지냈겠구나 하는 데에 마음이 가자 뭉클한 감정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nbspnbspnbsp물길을 겨우 건너자 이제는 다시 무너진 나무 다리가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먼저 다리를 건넌 사람이 뒤에 오는 사람을 손으로 잡아 당겨주며 금새 어려운 코스를 넘어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은 그야말로 우리가 독립군이 된 기분입니다.nbspnbspnbsp모든 대중이 직소택에 다다르자 스님이 짧게 직소택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nbspnbsp“이곳이 직소택이라는 곳인데, 이 협곡에 독립군이 매복을 하고 있다가 쫓아오는 일본군을 공격했다고 합니다. 이곳은 또한 해란강의 원류입니다. 여기서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저희들도 이곳까지 와서 독립군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온 것입니다. 힘들었지만 잘 왔죠?”nbspnbsp▲ 청산리 전투가 벌어졌던 직소택nbsp대중들도 “네” 라고 힘차게 대답했습니다. 이어서 이곳에서 숨져간 호국 영령들에게 우리들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편안하게 계시라는 뜻으러 담아 묵념을 했습니다. 묵념에 이어 스님은 간절한 마음을 담아 기도와 축원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환인 하느님, 환웅 천왕님, 단군 왕검님 삼신님께 간절히 기도 드리옵니다. 신시 개천 이래로 나라를 위해 숨진 모든 호국 영령들에게 삼가 저희의 마음을 다해 공양을 올립니다. 특별히 nbsp나라를 잃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졌을 때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하여 일신을 돌보지 않고 목숨까지 바친 애국 열사들에게 저희들 온 마음을 다해 존경을 드리며 삼가 명복을 빕니다. 이곳에서 고이 잠드소서.nbspnbsp뿐만 아니라 무참하게 학살된 수많은 양민들, 나라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스스로 살기 위해서 나라를 떠나 이국 땅에서 온갖 고생을 하며 살아갔지만 나라를 잃으니 그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자신의 위험도 무릅쓰고 독립군들을 후원하고 아들 딸들을 독립군으로 보내었지만 자신들의 재산이 다 불타버리는 고통을 겪었던 수많은 이주민들... 그 뜻을 기리오니 이곳에 고이 잠드소서.nbspnbsp또한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징집되어 이 먼 곳에 와서 비명횡사한 일본의 젊은 청년들도, 개인의 잘못이라기 보다는 국가의 잘못으로 희생된 그들도 이곳에서 고이 잠드소서.nbspnbsp저희들은 평화를 발원하옵니다. 이제 다시는 서로를 죽이는 참혹한 전쟁이 없고, 서로를 돕고 이웃 나라 간에도 서로 협력하는 그런 동아시아의 평화를 발원합니다. 오늘 저희들이 이곳에서 간절하게 기도 드리오니 저희들의 이 간절한 염원을 받아주옵소서. 이 땅에 전쟁이 없고 남북이 하나가 되어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통일을 발원하오니 저희들의 이 발원을 성취시켜 주옵소서.”nbspnbspnbsp스님의 간절한 목소리에 모두들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스님은 선조들의 숨결이 있는 곳마다 찾아가서 이렇게 계속 통일 염원 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우리들도 노력을 하겠지만 돌아가신 선조들의 도움도 받게 되면 반드시 통일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를 가져봅니다.nbspnbspnbsp다시 3km의 산길을 내려오면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노래를 불러 보았습니다. 또 스님은 바쁜 걸음 가운데서도 길섶에 핀 들꽃을 형형색색 다양하게 한 송이씩 꺽으며 산길을 내려왔습니다. 이 들꽃들을 어떻게 하시려나 궁금했는데, 스님은 다음 방문 장소인 대중교 3인묘에 이 들꽃들을 올렸습니다. 스님의 손길에 들린 들꽃처럼 스님의 정성어린 마음이 느껴져서 순간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무산의 철광산을 보기 위해 다시 두만강 국경변으로 가려고 했으나 북중 간에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출입이 통제가 되었습니다. 아쉽게 발길을 돌려 대종교 3인묘를 향해 출발했습니다.nbspnbsp대종교 3인묘에 도착하니 잔디가 많이 자라 있었습니다. 예전에 농사일을 좀 해보았다는 남자 분 3명이 나와서 낫을 들고 벌초를 하는 가운데 이어서 돗자리를 깔고 상을 차린 뒤 다함께 제사를 지냈습니다.nbspnbsp▲ 대종교 3인묘nbsp이곳에 영면한 세 분의 무덤 비석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nbspnbsp“반일지사 나철, 서일, 김교현은 20세기 전반기에 동북지구에서 한때 화룡시 청파호를 기지로 반일 계몽 운동과 반일 교육 활동을 진행하였다. 그들은 민중의 반일의식을 높이고 인민의 반일사상각오를 높이기 위하여 많은 일들을 하였으며 반일 무장투쟁을 준비하고 전개함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서일이 령도한 lt북로군정서gt 소속의 반일무장부대와 lt국민회gt 소속의 반일무장부대가 1920년 10월 화룡지구에서 협동 작전을 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청산리 전투’는 일본 침략군에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반일 운동이 깊이 있게 전개되도록 힘있게 추동하였다.”nbspnbsp무덤 앞에서 절을 하면서 그 넋을 기리며 이분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오늘날 내가 해야 할 역할을 다시 되새겨 봅니다.nbspnbsp버스는 다시 화룡으로 향했습니다. 화룡에서 냉면으로 유명한 집에서 점심식사를 한 후 일송정으로 출발했습니다. 일송정에 올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당시 이곳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선조들의 마음을 잠시 느껴보았습니다.nbspnbsp▲ 일송정nbsp조국의 독립을 위하여 가족, 고향을 떠나 낯선 중국 땅에서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조선 민족의 기개를 놓치지 않았던 그분들의 마음을 노래로 표현한 ‘선구자’를 다함께 부르니 가슴은 더욱 애잔해지는 것 같았습니다.nbspnbspnbsp마침 참가자 중에 섹서폰을 늘 들고 다니는 통일의병 한분이 있었는데, 그동안 국경변 또는 역사 유적지이기 때문에 마음껏 연주 한번 못해보고 있다가 일송정에 올라서야 멋진 연주를 보여주었습니다. 섹서폰 연주로 듣는 선구자 노래는 또다른 느낌으로 대중들의 마음에 큰 울림을 주었습니다. nbspnbspnbsp선주자의 노랫말에 나오는 ‘용두레 우물’을 버스 창 밖으로 잠시 엿본 후 역사기행단 일행은 대성중학교로 갔습니다. 대성중학교는 그동안 용정중학교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윤동주 시인을 비롯하여 이곳에서 활동한 많은 독립운동가들의 사진과 기록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나라의 독립을 위하여 가장 필요한 일은 후학을 바르게 양성하는 것임을 깨닫고 이곳에서 학교를 만드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nbspnbsp▲ 대성중학교nbsp이렇게 오늘의 마지막 일정을 마치고 이제 용정에서 길림으로 향했습니다. 용정에서 길림으로 가는 길은 버스로 5시간 정도가 걸렸는데, 버스 안에서는 어제처럼 즉문즉설 시간이 펼쳐졌습니다. 대중들은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스님에게 송수신기로 질문을 했고, 스님은 다양한 질문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어 버스 안 5시간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오늘밤은 길림에서 자게 되는데 역사기행 21년 역사 중에서 길림에서 숙소를 잡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합니다.nbspnbsp길림의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저녁 식사를 한 후 곧바로 저녁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특히 오늘 강연에서는 지난 6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총정리하면서 통일 한국의 희망에 강조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6일 동안 우리는 꽤 먼 거리를 달렸습니다. 심양 공항에 내려서 1일째는 고구려의 첫 수도인 졸본성을 올랐고요. 2일째는 집안에 있는 국내성을 둘러보았고, 3일째는 압록강과 백두산을 가로질러 왔고요. 4일째는 백두산을 보았고요. 5일째는 발해 유적지를 보았고요. 6일째는 독립운동 유적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일 7일째는 심양으로 다시 가서 고구려 시대 산성으로 요동성을 보호했던 백암 산성을 보고 역사기행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nbspnbsp이렇게 지난 6일을 돌아본 후 우리가 배운 것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먼저 기행단이 가장 많이 본 자연 풍광을 통해 느낄 수 있었던 것에 대해 언급했습니다.nbspnbspnbsp“결국은 우리가 다닌 지역 중에서 자연적으로 제일 중요한 것은 백두산입니다. 백두산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써 천지까지 있다 보니까 중국 사람들에게는 그냥 산이지만 동북 민족에게는 하나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우리만 신성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 지역에서 살고 있는 만주족도 백두산을 굉장히 신성시 했습니다. 얼마나 신성시 했으면 봉금 정책이라고 사람을 출입 금지시킬 정도였습니다. 이것은 이 지역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백두산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흘러내리는 3개의 강, 송화강, 두만강, 압록강, 얘기만 들어도 가슴이 뛰잖아요. 우리에게는 단순한 강이 아니죠. 이런 자연의 풍광이 하나 있고요.” nbspnbsp이어서 역사기행단이 다닌 이 지역은 민족적 자존심을 지켜준 고구려와 발해, 그리고 독립운동의 주된 활동 무대였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nbspnbsp“두 번째는 이 지역이 민족의 자존심을 지킨 국가로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고구려와 발해의 활동 무대였다는 것입니다. 고구려는 압록강 유역에서 발해는 송화강과 두만강 유역에서 활동했고, 고구려의 중심 무대는 백두산의 서쪽 지역이였다면 발해는 백두산의 동쪽과 북쪽 지역이였습니다. 우리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청나라도 여기가 그들의 주 활동 무대였고, 그 전에는 금나라도 그랬습니다.nbspnbsp청나라와 금나라는 여진족이고, 여진족의 뿌리는 말갈족이니까 고구려의 인구 구성도 고구려족과 말갈족, 발해의 인구 구성도 고구려족과 말갈족이었으니 여진족, 만주족은 우리와 거의 형제나 다름 없는 민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긴 역사 속에서 보면 우리 민족이 중심 민족이고, 이 사람들은 이 지역에 살던 토착 세력의 일부였습니다. 국가를 구성해본 적이 없는 민족이였는데, 이들이 국가 경영을 배운 것은 발해 시대입니다. 부족장 수준에서 중앙 정부의 귀족으로 등장하게 되면서 국가 경영을 터득하게 되고, 이것이 결국 금나라를 건국하게 되고, 그 경험을 토대로 다시 청나라를 건국하는 과정으로 가지 않았나 싶습니다. 역사란 것은 앞서간 자가 늘 앞서갈 수 없고 뒤에 간 자가 다시 앞서가기도 하는 것이죠.nbspnbsp그리고 우리 민족이 일제 침략기에 전세계에서 독립운동을 했지만 전체 독립운동의 8090가 이 지역에서 활동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해 임시정부 활동과 미국에서의 일부 활동, 연해주에서의 일부 활동을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만주 지역에서 독립운동이 이뤄졌습니다. 다시 나누면 북간도와 서간도로 나눌 수 있고, 북간도에는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여러 부대들이, 서간도에는 서로군정서를 중심으로 여러 부대들이 있었습니다. 더 따진다면 연변 조선족 자치주가 있는 북간도 지역이 독립운동의 주 활동 무대였습니다.“nbspnbsp그리고 이런 역사적 경험들을 잘 살려서 우리가 갖고 있는 민족적 열등의식을 극복해야 함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그런 면에서 지금의 남한과 북한의 정부 구성의 뿌리와도 관련이 있고, 이들이 어떻게 정부 구성에 참여했느냐가 현재 남북한 정부의 성격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북한은 자주성 측면에서는 역사적 정통성의 기질을 갖고 있다고 보이지만 남한은 많이 부족한 측면이 있고, 반면에 남한은 신라가 가졌던 섬세한 재능처럼 지금 세계 최첨단의 기술을 만들어가는 측면을 갖고 있죠. 역사적으로 돌아가보면 하나는 고래로부터 내려오는 뿌리에 대한 자주성도 남아 있고, 하나는 중간에 역사가 왜곡되면서 흘러온 약간의 비굴함의 요소도 우리 속에 내재해 있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아주 앞선 문명을 가졌던 DNA를 통해서 굉장히 섬세하고 뛰어난 재능도 갖고 있고, 또 외래 문명을 좀 줏대 없이 받아들이는 문제도 있습니다.nbspnbspnbsp우리 민족에게는 이런 과거의 역사적 경험들이 우리들 속에 내재해 있습니다. 남한이든 북한이든 우리 민족에게는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들이 함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한 가지 관점에서 볼 필요가 없습니다. 여러 성질 중에 조금 더 살리면 좋겠다 싶은 것은 계승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이런 건 조금 부정적이라고 보이는 것은 개선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아가야지 자꾸 민족성이 문제라고 규정하면 자학적인 사람 밖에 되지 않습니다.nbspnbsp우리도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면이 많이 있습니다. 식민지 지배를 받은 나라가 이렇게 단시간에 다시 일어선 경우는 세계에 몇 나라가 안 됩니다. 아직은 식민지 근성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서 이런 문명을 만들어내는 기질도 있는 것입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이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스님은 ‘통일 한국의 건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길은 바로 통일입니다. 만약 일제 시대 때 우리가 일제와 싸워서 해방을 이뤄냈으면 열등의식은 생기지 않았을 겁니다. 최선을 다했지만 힘이 부쳐서 진 것은 다시 싸우면 된다고 생각하지 피해의식은 없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독립운동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는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피해의식도 강하고 열등의식도 강하고, 게다가 ‘우리를 이렇게 다 살려준 것은 미국이다’ 하면서 사대의식도 강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서 독립은 우리 힘으로 이뤄내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제 통일은 우리가 해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통일 마저도 누가 시켜준다면 우리는 또 그 나라의 속국이 될 것입니다.nbspnbspnbsp통일 만큼은 우리가 목표를 세우고, 우리가 계획을 세우고, 우리 외교를 통해서 주변국을 설득하고, 우리가 밀어부쳐서 남북 문제의 주도권을 잡고, 이렇게 우리 힘으로 통일을 해낸다면 일본이 아무리 ‘독도는 우리 땅이다’ 라고 말해도 지금처럼 과민하게 반응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도가 아무리 자기 땅이라고 말한다고 해서 자기 땅이 됩니까. 위안부 문제도 얘기하든지 말든지 ‘일본, 너희들의 수준을 알겠다. 그 수준으로 경제력으로만 잘 살면 뭐하노’ 이렇게 하면서 대응하는 방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일본의 저런 태도를 봐서는 한일 간의 교류 협력은 하되 식민 지배에 대해 과거 반성이 없는 나라와 군사 협력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일 원칙을 지켜야 할 것은 일본과의 군사협력은 필요 없다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북한을 상대로 해서 일본과 군사협력을 한다, 이것이야 말로 민족적 수치입니다.nbspnbsp미래의 창조성을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하지만 근대의 열등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도 통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문명의 뿌리에 대해 과거 역사를 공부하면서도 열등의식을 극복해야 하지만, 또한 우리가 창조성을 가지면 열등의식이 극복됩니다. 지금 한 20년 동안 한국 문명과 기술이 중국 쪽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이것은 2천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니다. 조금 앞서 있는 이것을 지속시키려면 창조성을 가져야 합니다. 통일을 해야 창조성이 나올 수 있습니다. 중국으로의 문명의 수출도 몇 십년 몇 백년도 해나갈 수가 있겠죠. 그렇게 되면 서양에 대해서도 중국에 대해서도 주변국에 대해서도 열등의식이 모두 극복될 수 있습니다.nbspnbsp통일은 문명의 새로운 꽃을 피우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민족이 갖는 심리적인 열등의식을 극복하는 것도 그 첫발이 통일입니다. 통일을 못하면 극복하기 굉장히 어려운 문제입니다. 통일이 되면 다 된다는 것이 아니라 통일이 되면 다음 스텝을 밟기가 굉장히 유리해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통일 한국을 우리가 만들어 낸다면 정치적으로도 문화적으로도 새로운 나라를 건설해 나갈 수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여기 와서 정치 시스템을 배우고, 경제 시스템과 복지 시스템도 여기 와서 배우고, 환경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여기 와서 배우는 그런 나라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nbspnbspnbspnbsp제가 보기에는 지도자만 조금 잘 뽑으면 한국 사람들은 2030년 안에 세계 최고 문명을 가진 나라를 만들 가능성이 있다고 봅니다. 경제 계획을 잘 세워서 산업화에 성공한 것처럼, 민주화의 과정에도 성공한 것처럼, 국가의 혁신도 잘만 이끌어 나간다면 충분히 최고로 앞서가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나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 속에서 우리 국민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이렇게 똑똑해진 경우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은 굉장히 뛰어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에너지를 제대로 쓰고 있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젊은이들의 진로가 안 열리니까 답답한 공부만 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것을 누군가가 새로운 사회 건설로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쪽으로 비전을 열어준다면 우리 민족의 천년의 꿈을 실현할 수 있습니다. 더 나아가면 고조선 멸망이후 다시 한 번 배달 문명을 재현하는 것이 되니 3천년의 꿈을 실현하는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지금 열려있다는 것입니다.nbspnbsp그렇지 못하면 지금 몰락으로 가는 기로에 서 있는데 그 출발이 통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문명 전환 운동을 한다고 당장 이뤄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출발은 통일입니다. 통일을 향해 일점돌파를 해서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하면 되네’ 이게 있어야 사람들이 확 달라붙게 되지 그렇지 못하면 잘 안 됩니다. 통일이라는 일점돌파를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첫 번째로 이뤄내야 할 것은 한국에 통일 지향적 정부를 구성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이 이에 동의하는 수많은 통일의병을 만들어내는 활동을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해내면 그 다음은 어렵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터서 땅에 올라오고 땅에 올라와서 요만큼 자라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지 요만큼 자랐다 하면 더 크게 자라는 것은 금새 됩니다. 작은 힘으로 큰 목표를 달성하려고 할 때는 여러 방면으로 힘을 분산시키면 안 돼요. 아주 집중을 해서 일점돌파를 해서 바늘 구멍 같은 작은 구멍을 내고 그 다음에 확대를 해야 합니다.nbspnbspnbspnbsp여러분들에게 가정 버리고 나와서 절에 들어라는 얘기도 아니고 스님이 되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직장 다니고 애 키우고 다 하면서 사는데 거기에 5든 10든 좀 낭비적인 요소를 뻬내라는 겁니다. 술 먹는 것을 좀 줄이고, 향수 바르던 것을 좀 줄여서 그 돈을 좀 모으고요. 그렇게 해서 역사기행 마치고 돌아가시면 생활에 있어서 다이어트를 좀 하시면 좋겠어요. 지나친 간섭으로 아이를 속박시키지 말고, 과음을 해서 건강을 버리지 말고요. 낭비의 요소를 줄인다면 나도 행복하고 세상에도 도움이 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직장이 있어야 직장 사람들도 이 운동에 동참시킬 수가 있지요. 자기 직업을 가져야 오히려 대중성이 있어요. 지금 여러분들이 갖고 있는 조건이 하나도 불리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작은 것을 투여해서 큰 효과를 내는 새로운 운동 방식을 우리가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서 여러분들의 전부를 다 달라는 것이 아니라 통일 지향적 정부를 선출할 수 있는 손가락 하나만 좀 달라는 겁니다. 그렇게 새로운 희망을 우리가 좀 가져 봅시다.” nbspnbspnbsp모든 것을 달라는 것이 아니라 손가락 하나만 좀 달라는 말씀에 대중들도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통일은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고,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는 출발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에 가슴이 콩닥 콩닥 뛰었습니다. 배달 문명으로부터 시작해 고구려와 발해로 이어진 광대한 꿈이 21세기 통일코리아를 통해 다시 발현될 수 있겠구나 하는 부푼 꿈이 가슴을 요동치게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길을 열어주고 계신 스님께 무한한 감사의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저녁 강연을 끝으로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대중들은 내일 새벽부터 다시 움직이기 위해 잠자리에 들러 숙소로 돌아갔고, 스님은 원고 교정을 하며 업무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길림의 새벽 시장에 가서 아침 요기를 한 후 심양으로 이동해 고구려의 산성 중 그 형태가 가장 잘 남아 있고 요동성을 지켰던 백암산성을 본 후 7일 동안의 역사기행을 총정리 하는 시간을 가질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하겠습니다.nbsp
2015.8.6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 발해진과 봉오동전투터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역사기행 5일째를 맞이하여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유적과 봉오동 전투터를 둘러본 후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오늘도 어김없이 5시 정각에 모두 버스에 탑승한 기행단은 스님의 “잘 주무셨어요?” 하는 아침 인사와 함께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버스 창 밖으로는 돈화벌의 넓은 평야가 드넓게 펼쳐졌습니다.nbspnbsp1시간을 달려 어제 보았던 강동 24개석과 같은 형태의 요전자 24개석 유적을 찾아갔습니다. 버스에서 내리자 길가에 핀 코스모스가 기행단 일행을 반갑게 맞이해 줍니다.nbspnbspnbsp어제는 돈화 시내 한 가운데에 24개석이 있었는데 오늘은 밭 한 가운데에 24개석이 있었습니다. 옥수수밭 옆길을 한 줄로 들어가 한바퀴 돌면서 24개석을 보고 나왔습니다. 풀과 꽃이 무성하게 자라서 24개석이 모두 보이지는 않았지만 예쁘게 핀 꽃들과 함께 사진 몇 장을 남기고 다시 버스에 올랐습니다.nbspnbsp▲ 요전자 24개석nbsp버스에 타고 나서 스님은 발해가 남긴 24개석은 과연 무엇이였는지 학자들의 견해를 빌어 몇가지 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nbsp“상경용천부에서 중경현덕부, 동경용현부, 남경남해부 이 사이에 난 길에 이 24개석이 군데 군데에 있습니다. 이건 과연 무엇일까요? 첫째, 주요 교통로에 있는 ‘역참’이라는 주장도 있고요. 역참인데 돌을 왜 저렇게 놓았느냐 하기도 하지만 주요 교통로에 있기 때문에 역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둘째, 왕이 죽으면 장례를 치르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갔는데 그 때 관을 받아서 보관하던 곳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셋째, 양식 창고라는 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춧돌이 이렇게 여려개 놓여있다는 것은 그 위에 엄청나게 무거운 것을 올렸다는 것을 말하거든요.nbspnbsp현재 확실하게 공통적으로 밝혀진 것은 건축 유지라는 것입니다. 기와 조각이 발견되면서 여기에 건축물을 세웠다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건축물이 어떤 건축물이냐는 문제죠. 여러 가지 설이 있는데 확정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는 증거는 아직 나오지 않고 있어요. 여러분들이 만약 이것을 연구해서 발표하면 박사 학위감이 될 수 있어요.”nbspnbspnbsp어제부터 무척 궁금해 하던 내용이었는데 몇가지 제기된 설을 들으니 모두 다 공감이 가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발해의 역사가 조금 더 깊이 연구되길 기원해 봅니다.nbspnbsp다시 한참을 지나니 용암이 막혀 형성된 길이 23km에 달하는 ‘경박호’ 호수를 만났습니다. 저 멀리 작은 호수처럼 보이는 듯 시작된 경박호는 계속 달려도 끝이 보이지 않은 채 마침내 마치 바다로 생각될 정도로 아주 넓은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호수는 넓은 평야와 어우러져 또다른 아름다움을 주었습니다.nbspnbsp▲ 저 멀리 경박호의 꼬리 부분이 보입니다nbsp오랜시간 버스가 달려 도착한 곳은 당시 발해의 수도 중 하나였던 상경용천부의 왕궁터 유적입니다. 스님은 버스에서 내리기 전 상경용천부 유적에 대해 간략히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발해는 비록 시작은 동모산에서 좁쌀 만하게 시작했지만 3대 문왕 때까지 오면서 50년 만에 동북아 지역을 거의 다 차지하는 대제국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중견현덕부의 경우 한 주의 중심도시 밖에 안 되었기 때문에 수도를 상경용천부로 옮기게 된 것입니다. 방어벽이 멀리 있고 가운데가 정말 넓은 터를 잡아서 자기들의 중심 도시를 만들었습니다.nbspnbsp▲ 외성 위로 백양 나무가 늘어선 모습nbsp외성의 길이가 4km 정도 됩니다. 돌과 흙을 같이 섞은 토석혼축성으로 지금도 비교적 형태가 잘 남아 있습니다. 이렇게 외성을 쌓고 외성 안에 내성을 쌓고 그 안에 궁성을 쌓았습니다. 기본 모형은 당나라와 교류를 하면서 장안성을 참고한 것 같아요. 돌로 쌓았기 때문에 많이 파괴되었다 하더라도 기본형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입니다.”nbspnbsp외성의 한 변이 4km 전체는 16km에 달한다니... 그 규모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가지 않습니다. 지금은 성벽 위로 백양 나무가 높게 자라고 있어 멀리서도 금방 그 윤곽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차창 밖으로 정말로 백양 나무가 나란히 늘어선 모습이 한눈에 보였습니다. nbspnbspnbsp다음은 박물관으로 이동해 발해의 영역 지도와 궁성 조감도를 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 상경용천부 성터는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장안성 못지 않게 큰 규모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성터에는 토대와 흔적만 남아 있기에 그 위에 어떤 건물들이 지어졌을지 상상하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박물관에서 모형도를 보고 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 성터로 가보니 단순한 돌덩어리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 돌은 어떤 역할을 했겠구나’ 떠올려 볼 수 있어 좋았습니다.nbspnbspnbsp동궁 옆의 사람 얼굴 모양의 연못을 한 바퀴 돈 후 내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앞에서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전생에 우리는 발해인이지 않았을까’ 하면서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안내에 따라 내성 안의 궁성으로 들어가서 제1궁성부터 제5궁성까지 차례대로 걸어가 보았습니다. 뒤로 갈수록 지대가 낮아져 앞에서 바라보면 한 눈에 뒤쪽의 왕궁터가 보였습니다. 그냥 지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계획되고 관측되어서 지어진 것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오봉루에서 바라본 주작대로nbsp▲ 제1궁에서 바라본 제2궁, 제3궁, 제4궁의 모습nbsp▲ 궁성의 북쪽에 난 두 개의 문nbsp이렇게 상경용천부 성터를 모두 둘러본 후 다음은 성터의 정문 앞길인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위치해 있는 흥륭사를 찾아 갔습니다.nbspnbsp▲ 흥륜사nbsp흥륭사는 상경용천부에 있는 9개의 절 중 유일하게 유물이 나온 곳이라고 합니다. 흥륜사 경내의 맨 뒤편에 위치한 법당에 들어가 큰 불상 앞에 선 기행단은 스님의 제안에 따라 예불 의식을 했습니다.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기행단을 위해 축원과 발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들께 지성귀의 하오며, 저희 한국에서 온 동북아 역사기행 통일의병 대중 일동은 고구려, 발해, 백두산, 압록강, 두만강, 독립운동 유적지를 답사하고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염원하며 이곳 발해의 상경용천부 흥륜사 대법당 큰 부처님 앞에 찾아와 합장하고 발원하옵니다.nbspnbsp발해 멸망 이후 1100여년 만에 발해인들이 하듯이 저희들이 이와 같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립니다. 부처님께 공양 올린 이 인연 공덕으로 환인 하느님, 환웅 천왕님, 단군 왕검님으로부터 시작된 민족사의 정통성이 잘 계승되고, 발해의 옛 터들이 다시 복원되기를 간절히 발원하오며, 참배한 우리 또한 부여 고구려 발해의 민족 정기를 잘 계승할 것을 다짐합니다. 이 인연 공덕으로 한반도에 다시는 전쟁이 없는 항구적인 평화가 정착되고, 남북이 서로 협력하고 하나되는 통일을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간절한 발원을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영가님들께서는 이 원이 성취될 수 있게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또한 북녘 동포들의 생존권과 인권이 보장되어 사람답게 살 수 있기를, 또한 남한도 빈부격차가 해소되며 젊은이들이 희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그런 행복한 사회가 되기를 간절히 발원하옵니다.nbspnbsp오늘 이와 같이 발해의 옛터에 찾아와 왕궁터를 둘러보고 대불 앞에서 합장하고 불공 올린 이 인연 공덕으로 참여 대중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며, 갖가지 소원 모두 성취되게 하옵소서. 오늘 저희가 참배하고 발원한 인연 공덕 일체 중생에게 회향하오니 고통 받는 모든 중생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여지이다. 이 무량 공덕 조상 영가님들께 회향하오니 조상 영가님들과 유주무주 모든 고혼들 부디 왕생 극락 하옵소서. 제불 보살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스님의 간절한 발원에 역사기행 대중들도 함께 간절한 마음을 모아 보았습니다. 마음은 숙연해지고 곳곳에서 훌쩍 거리며 눈시울을 붉히는 대중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역사 속에서 점점 잊혀져간 발해의 이야기를 들으며 안타까움이 많았는데, 진정으로 발해인들의 뜻을 계승한다는 것은 통일 한국과 동북아 공동체 건설이 아닐까 상상해 보며 스님의 발원을 나의 발원으로 새겨 봅니다. 천년 전의 역사와 오늘의 내가 만나는 순간이였습니다.nbspnbsp다시 버스에 올라탔습니다. 이어서 성을 쌓기 위해 돌을 채취한 자리에 생긴 현무호 호수를 버스의 차창 밖으로 잠시 살펴본 후 목단강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목단강 앞에 다다르자 스님은 당시에 거란으로 가는 통로가 있었다며 칠공교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nbspnbsp“저 목단강을 건너는 다리가 놓아져 있었는데 그 다리는 발해 당시에 거란으로 가는 통로였습니다. 돌을 쌓아서 다리의 기둥을 일곱개 놓았는데 그 유지가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다리 이름도 칠공교라고 불렀습니다.”nbsp칠공교를 먼 발치에서나마 보려고 도로가 지나가는 다리 위로 걸어갔으나 마침 공사가 진행 중이여서 보지는 못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발해의 유적지를 모두 살펴본 후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는 이제 독립운동 유적지를 향해 달렸습니다. nbspnbsp발해진에서 도문으로 가는 길은 버스를 오래 타게 되는데 스님은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면서 궁금했던 점이 있다면 대화를 나눠보는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1,2,3호차 각각에서 송수신기로 질문하고 스님이 다시 송수신기로 답하는 방식으로 버스 안 즉문즉설이 이뤄졌습니다.nbspnbspnbsp총 8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1호차, 2호차, 3호차에서 골고루 질문이 나왔습니다. 중국에 와서 보니까 옥수수가 정말 많이 보이는데 옥수수를 어떻게 심고 어떻게 수확하는지 궁금하다는 분, 고구려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왜 그렇게 강력했던 고구려가 삼국 통일을 하지 못하고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게 되었는지 궁금하다는 분, 어머니가 만주에서 태어나셔서 만주가 정말 궁금했는데 만주가 어떤 곳을 말하는지 궁금하다는 분, 스님의 활동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분, 통일의병이 생긴지 1년 반이 넘었고 아직 걸음마 단계인 것 같은데 평가를 좀 해주고, 통일의병이 앞으로 해야 할 일을 이야기해 달라는 분, 동북아 역사기행 말고 또다른 역사기행 코스를 개발할 생각은 없으신지, 이번으로 역사기행이 끝나서 너무 아쉽다는 분 등 다양한 질문에 대해 스님은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었습니다. nbspnbsp그 중 아이들에게 어떻게 역사 의식을 심어주어야 하는지 묻는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nbspnbsp“책으로만 보던 역사를 직접 발로 걸으며 느끼니까 더 감동적이고 자부심도 많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아이가 3학년과 6학년인데 한국으로 돌아가면 우리 아이들도 역사 의식이 있는 아이로 키우고 싶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nbspnbsp▲ 버스 안 즉문즉설nbsp“아이들에게 역사 의식을 심어주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만 엄마가 너무 욕심을 내어서 하면 안 됩니다. 엄마가 모든 생활에 있어서 그런 쪽으로 살아가면 아이는 저절로 역사 의식을 갖게 됩니다. 엄마가 강제로 책을 주고 읽어라고 하면 저항이 생기죠. 부담도 되고요. 어릴 때 잠시는 공부할 줄 몰라도 커서는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됩니다. 엄마가 모금할 때도 같이 데려가고, 기회가 되면 경주 남산도 손 잡고 가고, 천천히 같이 다니면 조금씩 안개에 옷이 젖듯이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놔두고 본인이 그런 의식을 갖고 살아가세요.nbspnbspnbsp두 번째는 아이들과 대화할 때 아이를 그렇게 만들려고 말하고 행동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기쁨으로 그런 얘기를 아이와 재미있게 나누면 아이도 조금씩 조금씩 변해 갑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기도 하다가 때론 저항이 생겼다가 다시 그렇게 가다가 다시 저항이 생겼다가 이런 과정을 계속 겪는 겁니다. 아이가 클 때 일직선으로 가는 경우는 없습니다. 말썽꾸러기가 되었다가 갑자기 착해졌다가 또 말썽꾸러기가 되었다가 그러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니까 무엇이든지 욕심을 내어서 접근하면 안 됩니다.nbspnbsp그래서 본인부터 먼저 할 것. 그렇게 자기 삶이 변해나가면 아이도 저절로 됩니다. 아이와 손 잡고 무조건 놀이 공원에만 가지 말고, 한 번은 손잡고 놀이 공원 갔다가 한 번은 성곽을 찾아가 본다든지 할 수 있죠. 아이한테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해서 질리도록 하면 안 돼요. 저도 지금 여러분들에게 너무 질리도록 하는 거 아니예요? nbspnbsp부모가 아이들에게 너무 그렇게 접근하는 것은 안 좋아요. 아이는 부모를 부모라고만 생각하지 선생님이라고 생각하지 않거든요. 자기 몸에 베인 것만 영향을 주지 선생님이 되어서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옳지 않습니다. 저는 질문자가 약간 걱정이 되네요. 역사기행이 좋았다고 또 집에 가서 아이들 데리고 못 살게 굴지 않을까 싶네요. 역사기행은 잊어버리고요. 아이는 놔두고 당분간 자기부터 먼저 그렇게 해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nbsp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질문자는 환한 웃음을 보이며 “네, 알겠습니다” 대답했습니다. 버스 안의 대중들도 박수를 치며 공감도 하고 질문자도 격려해 주었습니다. 질문과 답변이 길어진다 싶을 때면 노래 한 자락이 불러서 금새 기분을 환기시켜 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의 지혜가 담긴 대답을 들으며 울고 웃다 보니 어느새 봉오동 전투 기념비에 도착했습니다. 봉오동 전투는 3.1운동 실패 이후 만주에서 일어난 무장 독립운동 중 국민들에게 희망을 안겨 준 최초의 성공적인 전투가 되었습니다. 스님은 기념비 앞에 선 기행단 일행에게 봉오동 전투가 일어났을 때의 정황과 그 의미에 대해 간략히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 봉오동 전투 기념비nbsp“저희는 지금 봉오동 전투터에 왔습니다. 국내에서의 의병활동은 19010년 나라가 망하자 급격하게 세력이 약해졌습니다. 물론 일제가 군대를 통해 진압을 강하게 한 것도 있었지만, 희망이 없어져 버려서 저항의지도 약해졌습니다. 독립운동이 급격하게 쇠퇴하면서 두 번째 나타난 증상은 의병을 했던 분들이 이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나라 밖으로 나가기 시작했어요. 그래서 이미 조선족들이 많이 살고 있던 이곳으로 오게 된 겁니다. 처음 이주는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해서 이민이 이뤄진 것인데, 이때부터 넘어온 사람들은 독립이라는 목적 의식을 갖고 이민을 와서 학교를 세우고 다양한 독립운동을 준비했습니다.nbspnbsp그런데 갑자기 한국 안에서 1919년에 3.1 만세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고, 세계 정세에서도 민족 자결주의가 나오고, 이렇게 되니까 ‘우리도 독립할 수 있겠다’ 하는 희망이 생기면서 독립운동에 관심있던 모든 사람들이 상해에 모여서 임시 정부를 구성한 것입니다. 임시 정부를 구성했지만 국내의 3.1운동 세력은 일제의 탄압에 의해서 갈수록 약해지고,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또 독립이라는 것이 손으로 만세 부른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였습니다. 상해 임시 정부는 모이기는 모였지만 아무런 대응책도 없었고, 누가 대통령을 할 것인지 내분만 일어났어요.nbspnbspnbsp그래서 1919년 가을부터 현장에서 독립운동을 준비하던 사람들은 너무 너무 가슴이 아팠던 겁니다. ‘총을 쥔 놈들과 평화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우리도 무장 투쟁을 할 수 밖에 없다. 앉아서 회의만 해봐야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현장으로 가자’ 이렇게 하면서 현장으로 속속 복귀를 해서 무장 운동을 준비합니다. 독립군 자금을 모아서 무기를 사서 유격전 준비를 하기 시작한 겁니다.nbspnbsp1920년에 들어와서 홍범도 장군은 여기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무기를 구입하고 훈련을 시키고 양식을 모우고... 이곳이 이 지역 독립군의 근거지가 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약 300명 정도 되는 부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920년 6월 4일과 5일에 이 부대 일부가 두만강을 건너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고 돌아옵니다. 그러다가 6월 6일에는 대대 병력이 이 부대를 소탕하기 위해 월경을 해서 독립군들이 회의하고 있는 곳을 공격해서 모두 산 속으로 피신을 갔습니다. 6월 7일 추격군은 독립군의 본거지를 소탕하기 위해 봉오골로 기어들어 왔습니다.nbspnbsp홍범도 장군은 상대는 최정예 부대이기 때문에 직접 대응해서는 이길 수가 없어 전략을 세운 겁니다. 이 봉오골은 아래에서부터 하동, 중동, 상동이 있는데 하동, 중동을 싹 비워버리고 상동에 매복해 있었습니다. 정찰병이 지나갔지만 공격하지 않고 계속 매복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정찰병이 문제가 없다고 하면서 본대를 불렀고, 그 때 세 방면에서 매복해서 공격을 했습니다. 밤이 깊어지자 일본군의 지원병이 들어왔는데 앞이 안 보이니까 저희들끼리 또 공격하면서 사상자가 더 많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300여명 중에서 157명이 죽었고, 이것은 게릴라전 치고는 굉장한 성과였습니다. 이 전투가 봉오동 전투입니다.nbspnbsp이 전투 때문에 나중에 엄청난 피해가 발생합니다. 항상 우리는 승리한 전투만 생각하지요.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일제는 무고한 주민들을 학살하고 집을 불태우고... 그래서 주민들의 피해가 매우 많이 납니다. 일본은 다시 사단 병력을 데리고 공격을 준비하게 되고, 독립군은 백두산으로 후퇴를 하다가 청산리를 중심으로 다시 맞붙게 되어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게 됩니다.nbspnbspnbsp세계 최강의 정규군과 약소 민족의 게릴라 부대가 싸워서 이런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니까 3.1운동의 패배감으로 실의에 빠진 국민들에게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게 된 것이죠. 봉오동, 청산리 전투는 3.1 독립운동이 실패한 이후 첫 번째로 일어난 대단위 무장 투쟁이였습니다. 그 의미를 되새기면서 참배를 하겠습니다.”nbsp봉오동 전투는 조선 내에 반일투지를 높이는 데 기여한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무장 독립투쟁이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후 일본의 대대적인 토벌이 이루어졌으나 우리 선조들은 많은 희생을 거치며 접경 지역인 중국, 러시아에서 무장 독립 운동을 이어나갔습니다. 이런 소중한 독립 운동의 역사를 민족의 자긍심으로 끌어안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다함께 기념비를 향해 제사를 지냈습니다. nbspnbspnbsp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최가람님과 남자 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곽영술님, 여자 참가자 중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최경숙님, 이렇게 세분이서 기행단을 대표해서 참배를 했습니다. nbspnbspnbsp이어서 대중들도 모두 참배를 했고, 독립운동가들의 넋을 기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오늘 우리들은 통일 한국을 이루는데 기여를 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묵념도 하였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를 타고 두만강을 따라 하류로 가서 우리 나라의 최북단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를 건너다 보았습니다. 좁은 강을 사이에 두고 중국 쪽의 풍요로움과 북한 쪽의 가난이 계속 대비가 되었습니다.nbspnbsp▲ 두만강 건너편에 보이는 우리나라 최북단 함북 온성군 풍서리nbsp스님은 “북한의 식량난을 해결해 보기 위해 북한의 온성군 하나를 연결해서 비료를 제공해 주고 농법을 개선해서 식량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보는 실험을 해보기도 했다”며 경험담을 들려주었습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계속 지속되지는 못했다”며 “앞으로도 꿈이 있다면 군 하나를 모델로 해서 식량 생산을 늘여서 그 모델을 전파해 보는 것” 이라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도문시에 있는 조중우호다리로 가서 두만강 건너편에 있는 함경북도 온성군 남양읍을 바라보았습니다.nbspnbsp▲ 조중우호다리. 건너편은 함북 온성군 남양읍.nbsp조중우호다리 앞에서는 극심했던 북한의 식량난과 탈북 난민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식량난이 극심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 이 근처에서 수많은 북한 동포들이 탈북을 했다고 합니다.nbspnbspnbsp강 사이에 섬처럼 되어 있는 부분에는 강을 넘다가 얼어 죽은 시체들도 자주 볼 수 있었고, 그 이후에도 중국에 친척을 둔 많은 북한 주민들이 친척들에게 먹을 것을 보내달라고 쪽지를 전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하는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지금은 철조망이 이중 삼중으로 쳐지면서 경계가 삼엄해 지고, 탈북을 해도 중국에서의 인권 유린이 심한 점이 알려지면서 탈북은 거의 멈춘 상태라고 합니다.nbspnbsp그리고 두만강변을 따라 난 산책로를 거닐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두만강에 직접 손을 담가 보며 북한 땅을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는 이 순간을 잠시라도 더 기억해 보고자 해 봅니다.nbspnbsp▲ 건너편 북한 땅을 바라보고 두만강에 손을 담가보며nbsp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연길시로 이동하면서 스님은 수월스님 이야기와 용성스님 이야기를 들려주며 지금 좋은벗들과 평화재단이 하고 있는 일은 우리가 새로 하는 일이 아니라 이런 선조들의 정신을 계승한 것도 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시대와 조건을 뛰어넘어 그 정신은 항상 계승되고 있음을 되돌아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연길시에 도착해 들른 식당은 북한 여성들이 공연을 보여주는 특별한 식당이였습니다. 스님은 “이곳까지 왔으니 북한 사람을 가까이서 보며 그들의 가진 재능을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 이라며 식당으로 안내했습니다. 우리들에게 낯익은 한국 가요와 북한 노래를 번갈아 가며 들려주며 정말 해맑은 목소리와 얼굴 표정을 보여주는 북한 공연단에게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 만약 통일이 되어 우리와 이들이 함께 어우러질 수 있다면 또 어떤 시너지 효과가 날지 기대가 되고 설레였습니다.nbspnbsp그리고 역사기행을 처음 개척할 때부터 지난 21년 동안 많은 가르침과 애정을 보여주신 연변대학교 방학봉 교수님 부부가 식당을 찾아와 기행단 대중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방학봉 교수님은 “20여년 간 스님의 지도 하에 역사기행을 해오며, 또 한국의 해결되지 못한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 가는 모습에 큰 감동을 받았다” 면서 “이번 역사기행도 무사히 마무리 되길 기원한다”고 축원해 주셨습니다.nbspnbsp▲ 평생 동안 발해사 연구를 해온 방학봉 교수님 부부nbsp또 좋은벗들이 북한돕기 활동을 할 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많은 도움을 준 조선족 사기 피해자 협회 분들도 식당을 찾아와 기행단 대중들을 위해 격려의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스님은 발걸음을 해준 모든 분들 한분 한분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선물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식사 후에는 숙소로 이동해 짐을 푼 후 곧바로 저녁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저녁 강의는 항일독립운동의 역사를 주제로 진행되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긴 시간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설명하면서 남한에서 중요시 여기는 독립운동 성과 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의 역사도 함께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또한 전쟁에 참여한 일본의 병사들의 아픔도 생각해야 함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지금 우리가 와 있는 이곳은 단순히 과거에 독립운동을 했다는 문제 뿐만 아니라 지금의 우리 문제의 뿌리도 여기에 있습니다. 첫째, 경신년 대참사라는 사건이 있어요. 청산리 전투를 승리할 때 우리는 승리만 이야기하는데 이럴 때 일본은 어떻게 하겠어요? 이곳에서 수십년 간 농경지 개간하며 살았던 사람들에게 농경지와 집을 다 버리고 내려오라고 그랬잖아요. 몇십년 땅을 일구고 집 짓고 살아왔는데 독립군의 근거지가 되니 내려오라고 하고, 안 내려오니까 집에 불 지르고 죽여서 수천명이 학살을 당하고 재산을 잃어버린 정도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nbspnbsp그래서 이겨도 문제가 되었습니다. 지면 그 부대만 죽고, 이기면 열배로 주민이 학살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내일 가게 되는 백운평 마을도 일본이 청산리 전투에서 져서 후퇴하면서 이 마을 사람들을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다 죽여버렸습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도 이런 그들의 아픔을 전혀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전쟁을 승리로만 볼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nbspnbspnbsp둘째, 우리가 일본을 미워하지만 일본 젊은이들도 일제에 아무 이유없이 징집되어 와서 이곳에서 개죽음을 당한 것이잖아요. 그런데서 우리가 일본 군국주의를 반대해야지 일본 민중들을 미워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봐야 합니다. 이런 비극을 잊지 않고 개선하되 평화로 가야 하거든요. 희생자들 중에 우리의 독립군들만 추모할 것이 아니라 비극적으로 죽은 민중들의 영혼도 위로해야 하고, 죽은 일본 병사들도 우리가 위로를 하지 않을 수가 없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nbspnbsp이 땅은 고조선 시대에도 우리의 영토였고, 고구려 시대에는 변방이였고, 발해 시대에는 중심 역할을 했던 곳입니다. 근세에 들어와서는 독립운동의 가장 주된 활동 무대였습니다. 어쩌면 시대가 좋아지면 김일성의 홍기와 전투터도 방문해야 합니다. 지금은 나무 푯말 하나만 세워져 있고 아무 것도 없거든요. 북한의 젊은이들과 남한의 젊은이들이 함께 청산리 전투터도 가고, 홍기와 전투터도 가보고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nbspnbspnbsp우리 조상들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세요. 조상들이 볼 때는 같은 민족인데 서로 싸우고, 한쪽이 굶어 죽고 있는데 식량을 주지도 않고 굶겨 죽이고 이렇게 하는 것은 조상들이 볼 때 적절치 않죠. 후손들이 그렇게 살아라고 독립운동을 한 것은 아니였을 것이잖아요. 여러분들도 형제끼리 싸울 때 ‘부모가 볼 때는 어떻게 여기실까’ 이렇게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타협점이 나오지 않을까 싶어요.”nbsp남한 만의 독립운동사에서 북한의 입장까지 생각해 보게 되면서 독립운동에 대해 더욱더 넓은 시야를 갖게 되는 소중한 가르침이었습니다.nbspnbsp밤 10시가 넘어 강연이 끝났고, 대중들은 모두 휴식을 하러 숙소로 돌아갔습니다.nbspnbsp내일은 새벽 3시 30분에 기상하여 4시에 연길 새벽 시장을 방문해 아침식사를 할 예정입니다. 오전에는 깊은 산속으로 산행을 하며 청산리 전투터를 둘러보고 오후에는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를 둘러보며 독립운동의 생생한 현장을 더 살펴보겠습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
2015.8.5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 백두산 그리고 발해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4일째를 맞이하여 민족의 성산인 백두산 천지에 올랐고, 오후에는 발해의 첫 수도 동모산을 본 후 발해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오늘은 백두산 천지에 오르는 날입니다. 새벽에 눈을 뜨자 창 밖으로 붉은 태양이 이글거리며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아, 오늘 천지를 볼 수 있겠구나’ 약간 기쁜 마음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습니다.nbspnbsp▲ 일출 모습nbspnbsp스님은 새벽 일찍 천일결사 기도를 한 후 대중들이 숙소에서 다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5시 정각에 버스에 탑승했습니다.nbspnbsp이도백하를 출발한 버스는 백두산 북편산문까지 약 40분 가량 자작나무와 각종 침엽수림으로 우거진 원시림을 통과했습니다. 해발고도가 점점 높아질수록 공기는 차갑고 싸늘한 기운마저 느껴졌습니다. 기행단은 사람들이 붐비지 않은 이른 시간에 가장 먼저 백두산에 오르려고 6시 정각에 매표소 앞에 줄을 섰습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중국인 관광객들이 매표소 앞을 가득 메웠고, 6시 30분에 매표소 문이 열리자 많은 인파가 순식간에 셔틀 버스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을 보며 순간 놀라기도 했습니다.nbsp▲ 매표소 앞nbsp이 모습을 보며 아직 중국은 공중 도덕에 대한 시민 의식이 부족한 것 같다는 얘기들이 오가기도 했습니다. 지난 3일 동안 비가 계속 와서 천지를 못 봤는데 오늘 해가 뜨자 갑자기 사람들이 몰렸다고 합니다.nbspnbsp미묘한 긴장감 속에 덩달아 우리 대중들도 종종 걸음을 걷게 되었는데 스님께서는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세요”라고 여러 차례 수신기로 알려주며 마음의 평정심을 유지하도록 도와주었습니다.nbspnbsp백두산 천지로 올라가기 위해 셔틀 버스와 승합차 두 번을 갈아탔습니다. 승합차에 타니 운전 기사는 신나는 리듬의 가요를 틀어주면서 마치 놀이 공원의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가파른 고개를 요리조리 꺾어가며 아찔한 운전을 했습니다. 짜릿한 즐거움과 두려움을 함께 느끼며 15분을 달려 천지에 도착했습니다. 정상 부위에는 벌써 많은 사람들이 바글 바글 모여 있었습니다.nbspnbspnbsp▲ 백두산 천지로 올라가는 길nbsp드디어 백두산 천지가 눈 앞에 펼쳐졌습니다. 바람이 불지 않아 천지의 호수 물도 아주 잔잔했습니다. 산과 하늘을 그대로 투명하게 비추며 ‘아’ 하는 탄성을 자아내었습니다. 짙푸른 천지 호수와 웅장한 바위산들의 위용에 왜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이라고 부르는지 온 몸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 백두산 천지nbsp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모여 있어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스님은 분주히 이곳 저곳을 살펴보며 조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적당한 곳을 찾았습니다. 스님은 중국인 관광객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적당히 틈을 보며 연이어 조별 사진을 함께 찍어 주었습니다.nbspnbspnbspnbsp롤러코스터 같은 승합차를 다시 타고 천지에서 내려왔습니다. 꼬불꼬불한 길이 산 아래 마을로 이어져 있는 모습이 무척 아름다웠습니다.nbspnbsp▲ 백두산 천지에서 내려가는 길nbsp다음은 비룡 폭포로 향했습니다. 셔틀 버스에서 내려 나무 계단을 따라 1.2km를 걸어가니 군데 군데 김이 모락 모락 피어나는 온천 물이 보이고, 저 멀리 회색 빛깔의 화산 지형 사이로 새하얀 물줄기가 힘차게 떨어져 내리는 비룡 폭포가 보였습니다. 여름 햇살이 따가웠지만 스님은 비룡 폭포를 배경으로 참가자 전체에게 개별로 기념 사진을 함께 찍어 주었습니다.nbspnbsp▲ 비룡폭포nbsp그리고 비룡 폭포에 대해 간단한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nbspnbspnbsp“수량의 70 가까이가 지하수이고, 경사면에서 떨어지는 계곡물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로 구성되어 있어서 폭포의 양은 연중 큰 차이가 없다고 합니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물이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으니까 홍수는 물양에 큰 영향을 주지 않고요. 오히려 눈이 녹아 내리는 초여름에 확실히 물양이 좀 많아지는 편입니다. 1.25km를 하얗게 흐르다가 큰 바위 앞에서 양쪽으로 갈라서 떨어지는데 두 폭의 비단을 편 것 같다고도 하고, 또는 용이 승천하는 것 같다고 해서 비룡 폭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폭포의 높이는 약 68미터입니다. 이렇게 흘러 내려가서 이도백하를 통해 송하강으로 합류해서 흑룡강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우리 나라의 폭포 중에서는 가장 웅장한 폭포라고 할 수 있죠.”nbsp울창한 원시림 사이로 난 나무 계단을 따라 내려와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소천지에 도착했습니다. 소천지는 작은 화산호인데 모양은 둥글고 아담하며, 주변에 빡빡하게 둘러 있는 나무들과 하늘에 떠 있는 구름들이 수면 위에 영롱하게 비춰진 모습이 어제 비가 많이 와서 평소보다 잔잔한 것은 아니라고 했지만 여전히 감탄을 자아내었습니다. 스님은 일찍 도착해 소천지를 한바퀴 돈 후 대중들이 모두 도착하자 간단히 소천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 소천지nbsp“물이 깨끗하죠? 입구로 들어오는 물은 골짜기 물이지만 빠져나가는 곳이 따로 없고 지하로 스며서 나가고 있습니다. 은환호라고 해서 둥근 은거울 같다고 하는 이름이 붙어 있어요. 바닥이 검어서 거울 역할을 합니다. 모든 것이 그대로 비칩니다. 비가 오지 않고 유입되는 물이 소량이 되면 잔잔해서 호수가 완전히 거울 같이 됩니다.” nbspnbsp소천지를 나와 녹연담으로 향했습니다. 녹연담은 원래 옥색의 맑은 물인데 어제 비가 많이 와서 황색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녹연담이 아니고 황연담이라면 대중들도 모두 웃었습니다.nbspnbsp▲ 녹연담nbsp녹연담을 나와 다시 셔틀 버스를 타고 지하삼림으로 향했습니다. 지하삼림은 말처럼 땅 속에 숲이 있는 것이 아니고 화산 활동의 영향으로 함몰된 넓은 면적의 땅에 숲이 형성된 것을 말합니다. 숲의 주변을 둘러싸고 절벽이 솟아 있어 마치 땅 아래에 숲이 형성된 것처럼 보입니다. 김홍신 작가님은 ‘대발해’라는 소설을 쓸 때 지하삼림을 보고 발해 군인들의 훈련장으로 묘사했다고 합니다.nbspnbspnbspnbsp대부분의 나무들은 바위 위에 붙어 있었는데 바위와 함께 툭 쓰러져 있는 나무들도 많아서 참 신기했습니다. 용암이 갈라진 틈 사이로는 깊고 좁은 계곡이 세찬 물살을 일으키며 흘러가고 있었습니다.nbspnbspnbspnbsp백두산에서 내려오는 길, 스님은 “백두산 보고 왔으니 백두산 노래를 다시 불러보자” 합니다. 올라갈 때 불렀던 노래보다 내려오면서 부르는 노래는 더욱 우렁찼습니다.nbspnbsp“백두산으로 찾아가자 ♬ 만주벌판 말을 달리던. 전사들의 투쟁의 고향 ♬ 살아쉬는 백두산으로”nbsp스님은 대중들의 우렁찬 노래 소리를 듣고 “백두산을 다녀오니 점심도 안 먹었는데 노래가 어제보다 훨씬 우렁차다” 며 칭찬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도백하에 도착해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오전 내내 걸음을 걸었더니 다들 허기가 졌는지 밥맛이 꿀맛이라며 허겁지겁 먹는 모습입니다. 서로 먹을 것을 챙겨주며 조별로 친목도 한층 다져진 느낌입니다. 이렇게 해서 압록강과 백두산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오후에는 발해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중원 대륙의 깊숙한 한복판을 향해 달려 갔습니다. 고구려 영토보다 2배나 넓은 광활한 영토를 갖고 중원을 누볐던 발해인들의 기상을 상상해보며 발해의 첫 수도였던 돈화에 위치한 동모산을 향했습니다.nbspnbsp버스 차창 밖으로 이도백하에만 있는 소나무인 ‘미인송’을 잠깐 볼 수 있었습니다. 미인송을 끝으로 노근한 몸을 이기지 못하고 모두들 하나둘씩 잠이 들기 시작했습니다.nbspnbsp이도백하에서 돈화까지 3시간 정도가 흐른 후 스님의 “동모산에 도착했다”는 알림 메시지에 잠에서 깨어 버스 밖으로 나왔습니다. 큰 평지에 삿갓을 덮어놓은 듯한 모양새의 낮은 산이 덩그러니 있었습니다. 성을 쌓기에는 좀 밋밋해 보이는 산 같았습니다. 그러나 큰 평지 위에 있어서 저 정도만 올라가도 주변이 훤히 보일 수 있을 것 같기는 했습니다.nbspnbsp동모산은 아직 발굴 중이라 출입을 금지하고 있었습니다. 직접 올라가 보지 못하고 먼 발치서 보기만 해야 해서 고구려의 산성 위에 올라가 봤을 때 보다 감흥은 조금 떨어지는 느낌이였습니다. 대중들의 이런 의구심을 읽었는지 스님이 간략히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동모산nbsp“아무리 봐도 저기에 어떻게 성을 쌓았나 싶죠? 저도 제일 처음에 왔을 때 그런 느낌이였어요. 성이 어떻게 쌓여져 있냐 하면요. 이게 대석하라는 강이예요. 지금은 물이 많이 말라 있는데 강물이 많이 흘렀다고 보시면 여기가 자연 해자가 되는 것입니다. 숲이 우거져서 그런데 가까이 가서 보면 약간의 절벽이 있습니다. 저기 능선이를 따라 성벽이 주욱 올라갑니다.nbspnbsp정상을 가운데에 두고 성벽이 뒤로 갑니다. 가까이 가보면 허물어진 성벽 위로 주욱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에서 접근도 못하게 하고 있죠. 앞에 길을 닦고 하는 것을 보니까 조만간 관광지로 열려고 하든지 무슨 수가 날 것 같기는 하네요.“nbsp스님의 자세한 설명을 듣고 나서야 ‘아, 그렇구나’ 하며 그제서야 모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스님은 설명을 덧붙였습니다.nbspnbspnbsp“여기는 고구려 때 북쪽 국경 지대였습니다. 대조영이 고구려의 북쪽 국경 지대까지 도망을 온 것이죠. 그래서 이 성은 마치 발해에 있어서 고구려의 오녀산성과 같아요. 적이 공격하면 여기로 들어와서 은거한다는 것이죠.nbspnbsp그렇다면 평지성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저쪽 넓은 들판에 영승유지라는 곳이 있어요. 거기가 평지성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북쪽으로 23km 떨어진 육정산에서 정혜공주묘가 발견되면서 발해의 왕실 귀족 공동묘지가 발견된 것이죠. 보통 공동 묘지가 궁성으로부터 35km 떨어져 있거든요. 그런데 아직 확정을 못하는 이유가 유물은 나왔지만 성벽이 분명하게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항상 처음 나라를 세울 때는 산성을 쌓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방어가 중요하니까요. 그래서 동모산성을 첫 수도라고 하는 것입니다.”nbspnbsp이렇게 설명하면서 스님은 예전에 역사기행을 처음 시작한 초창기 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역사기행 초창기에는 발해 유적지 답사가 주를 이루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국의 감시가 심해지면서 지금은 많은 곳이 접근조차 허용되지 않고 있어 지금은 예전보다 방문지가 많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조금은 씁쓸한 느낌을 간직한 채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고 뒤돌아서 나왔습니다.nbspnbspnbsp현장 방문이 허용되지는 않지만 스님은 조금이라도 더 보여주시려는 듯 버스를 서행시키면서 설명을 이어갑니다.nbspnbsp▲ 버스 창 밖으로 본 육정산nbsp“저기 동그란 봉우리가 6개 보이죠? 저곳이 육정산입니다. 발해의 3대 문왕의 세 번째 딸의 무덤인 정혜공주묘가 저곳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발해인이 스스로 쓴 역사 기록이 하나도 없었는데 그 무덤 속에서 기록이 나오면서 발해 역사 연구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 왔죠. 지금은 접근을 못하게 하고 있지만 영승유지는 육정산에서 오른쪽으로 더 가면 그 가까이에 있습니다. 여기 흐르는 강은 목단강입니다. 목단강 옆에 영승유지가 있습니다. 영승유지에서 동모산까지는 22.5km가 되기 때문에 유사시에는 동모산성으로 피난도 할 수 있었겠죠.”nbsp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방문 유적지인 강동 24개석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돈화 시내의 지하로 들어가는 도로 옆에 철책으로 둘러처진 채 잡초가 무성하게 자란 채 덩그러니 있는 모습이 왠지 방치되고만 있는 것 같아 조금 안타깝게 다가왔습니다.nbspnbsp▲ 강동 24개석nbsp스님은 24개의 돌이 무엇으로 쓰였는지는 아직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고 알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 이 수수께끼를 푼다면 아마 박사 학위는 따논 당상이라고 웃으면서 말씀 했습니다. nbspnbspnbsp이렇게 기나긴 오늘 일정을 마치고 숙소에서 맛있게 저녁 식사를 한 후 8시부터는 발해의 역사에 대한 스님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nbspnbsp돈화시는 작은 도시라 큰 규모의 식당이 거의 없다고 합니다. 가까스로 이 식당을 잡았는데 마침 식당의 에어컨이 고장나서 식사를 마치고 강연이 시작될 무렵 강연장은 찜통이 되었습니다. 찜통 더위를 대중들이 무척 힘들어하자 스님은 “사우나 하면 얼마나 시원해요? 기왕에 땀 흘린 거 흠뻑 흘립시다” 고 하며 대중들의 더위를 한방에 싹 날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고구려의 패망 과정과 발해의 건국 과정을 한편의 영화를 보듯이 재미있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발해와 신라와의 서먹했던 관계에 대해, 또 순식간에 대제국을 건설한 발해가 패망하는 과정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발해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발해라고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당나라가 발해와 국교를 정상화 하면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발해는 자신들을 ‘진국’ 또는 ‘대진국’이라고 불렀습니다.nbsp발해는 3대 문왕 이후 왕위가 짧게 짧게 바뀌어 오다가 10대 선왕에 와서 해동 성국이라고 불릴 정도로 대제국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행정구역으로는 5경 15부 62주가 될 정도로 번성을 했습니다.nbspnbspnbsp그러나 발해는 신라와는 앙숙이었습니다. 발해는 당나라와도 잘 지냈고, 거란족과도 잘 지냈고, 일본과도 잘 지냈는데 신라와는 전쟁을 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밀접한 관계도 없었습니다. 신라의 기록에도 발해와의 밀접한 교류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다만 강동 24개석 같은 것이 남경남해부 쪽으로 가는 길에 있고, 신라로가 있었다는 것을 보면 교류는 있었던 것 같은데 관계가 긴밀했다는 역사 기록은 없어요.nbspnbsp거기에는 자신들의 선조인 고구려를 멸망시켰다는 발해인들의 섭섭함이 있었을 것이고, 또한 신라는 발해에 대해 아쉬울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우리도 지금 미국 하고만 친하면 되지 북한한테 별로 아쉬운 것이 없듯이 신라도 모든 면에서 당나라가 더 앞섰지 발해한테서 배울 것이 많이 있는 게 아니였죠. 더군다나 신라가 그렇게 역사 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죠. 발해 입장에서도 신라와의 교류보다는 일본과의 교류, 거란과의 교류, 당나라와의 교류가 더 중요했죠. 그렇게 남북 관계를 유지해 간 것 같아요.nbspnbsp그래서 당나라에서 황제가 외국 대사들과 회의를 할 때 신라와 발해는 항상 자리 다툼을 했다고 해요. 당시 당나라의 제일 친선국은 신라였죠. 그러나 발해는 대국이기 때문에 무시할 수가 없었죠. ‘서로 얼마나 친하냐’, ‘누가 더 대국이냐’ 이런 이유로 ‘신라가 상석에 앉아야 한다’, ‘발해가 상석에 앉아야 된다’ 해서 경쟁이 골치 아팠다 할 정도였던 것 같아요. 우리도 지금 미국이 일본과 더 친하냐, 한국과 더 친하냐 하는 얘기가 자주 나오잖아요. 그래서 한 번은 신라 대사를 옆에 앉히고, 한 번은 발해 대사를 옆에 앉히고 했다고 할 만큼 신라와 발해는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던 것 같습니다.nbspnbsp800년대 말부터 900년대 초로 넘어오면서 당나라의 힘이 약해지면서 요서 지역이 비어 있는 상태에서 거란족이 일어나서 각기 흩어져 있던 거란족들을 야훌라보기가 통합해 요를 건국하게 됩니다. 그 힘을 빌어서 제일 먼저 공격한 것이 발해입니다. 상경용천부로 가는 길목인 부여성을 먼저 침공해서 함락이 되었고, 그러자 금방 상경용천부도 함락되어서 발해는 멸망하게 됩니다. 그 후 발해도 부흥군들이 일어나서 싸웠는데 결국 성공하지는 못하고 일부 지역에서 거의 100년 이상 독자성을 갖고 싸웠다고 해요.nbspnbspnbsp발해가 망하던 그 시기는 중국에서는 당나라가 망한 후 5대의 혼란 시기이고, 신라 말에는 후삼국이 쟁패하는데 특히 신라는 거의 쇠약해졌고 견훤과 왕건이 서로 격돌하는 시기였습니다. 이런 시기이다 보니까 발해가 망할 때 아무도 여기에 관여할 여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발해의 유민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와서 고려로 유입되는 그런 정도였습니다. 만약 고려가 강성했으면 발해의 역사를 좀 더 계승했겠죠. 현재 동북아의 역사 속에서 대제국을 건설했음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자료가 가장 빈약한 것이 발해입니다.”nbsp이어서 스님은 발해의 흥망성쇠와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말갈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일본의 이야기를 하면서 발해는 이런 동북아의 소수 민족들이 중원을 한벅씩 지배해 보도록 하는 기폭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nbspnbsp“발해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인구 구성 상 말갈족이 많았던 데다가 나라를 세울 때 처음부터 고구려족의 산하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의 둘이 힘을 합해서 나라를 세우다시피 한 점입니다. 그래서 고구려와는 다릅니다. 고구려 때 말갈족은 저 밑에서 자치권 정도 갖고 있는 수준이여서 중앙 정부에는 말갈 귀족이 진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발해는 중앙 정부까지 말갈 귀족의 대신들이 참여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말갈족은 국가 경영에 대해 큰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로 인해 발해가 망하니까 말갈족이 볼 때는 자신들이 고구려 때처럼 지배를 받는 민족이 아니였으니 발해는 자기들 나라라는 개념이 있었던 겁니다. 그런데 발해가 거란한테 망하게 되니까 자기들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는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그것이 금나라입니다.nbspnbsp그래서 금나라가 일어나자마자 맨 먼저 한 것은 철저하게 거란족을 없애는 것이였습니다. 여세를 몰아서 송나라를 압박을 했죠. 송나라가 요나라에게 시달리다가 이번에는 금나라에게 시달리다가 못 견뎌서 남쪽으로 내려간 것을 남송이라고 말합니다. 요나라와 고려가 부딪힌 것은 서희의 담판에 의해 화친을 했고, 금나라는 원래 고구려의 일부이기 때문에 서로 크게 부딪힐 염려가 없었고, 금나라는 고려를 가장 가까운 형제국으로 인식했기 때문에 큰 전쟁은 없었습니다.nbspnbsp그런데 이번에는 몽골족이 일어났습니다. 몽골족의 원나라가 일어나서 금나라를 쳐부스고, 그 힘으로 밀어 붙여서 남송까지 멸망시켜서 유라시아에 대제국을 건설했죠. 원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만주가 제대로 관리 안 되니까 말갈족인 여진족이 다시 후금을 세웠습니다. 거기다가 임진왜란으로 명나라와 조선이 피폐해진 약한 고리를 타고 여진족이 이곳 백두산에서 일어나 지금의 심양에 수도를 정하고 처음에는 후금으로 불리우다가 청이라 칭하면서 조선부터 항복 받고 명나라를 없애고 청나라를 건국했습니다.nbspnbsp청나라 입장에서는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켰으니까 철천지 원수잖아요. 그래서 청나라는 어떻게 했냐 하면, 몽골을 내몽고와 외몽고를 구분해서 통치를 했습니다. 내몽고는 직할 통치를 하고 외몽고는 자치권을 주고 간접 통치를 한 겁니다.nbspnbsp그런데 청나라가 망하니까 직할 통치했던 내몽고는 중국 땅이 되고, 외몽고는 러시아의 도움을 얻어 독립을 하게 됩니다. 몽고족이 전체 1100만명 정도 되는데 현재 독립국가인 몽고에는 300만명 밖에 살지 않고 내몽고에 한 700만명이 있습니다. 훨씬 더 많은 수가 중국에 소속되어 있죠. 그 다음에 러시아쪽에 있는 자치공화국에 100만 정도가 있습니다. 그래서 몽골에 가면 몽골 공화국이 있고, 1100만의 몽골인들이 독립해야 된다고 하는 대몽고 공화국 운동이 있습니다. nbspnbspnbspnbsp동북아의 여러 민족은 고대로 우리 민족의 아래에 같이 있던 소수 민족이였는데 그러다 결국 발해가 멸망하니까 종주자가 없어졌죠. 그래서 고조선이 약하니까 선비족이 제일 먼저 일어났고, 고구려가 멸망한 후 일어난 것이 거란족이고, 그 다음에 여진족이죠. 그 다음에 몽골족이 일어났고, 그 다음에 일본이 또 일어나서 만주를 점령했죠. 이런 전체 역사 속에서 발해를 봐야 합니다. 발해를 어떻게 계승했느냐 하는데 꼭 발해를 우리 민족의 역사만이라고 보지 말고 발해는 동북아의 소수 민족들이 중원을 지배하도록 하는 대변혁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내일 상경용천부를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nbspnbspnbsp스님의 역사관 속에는 꼭 우리 민족 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이웃의 주변 민족까지 함께 보는 시각이 늘 함께하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그 깊이에 감명을 받게 됩니다.nbspnbsp오늘 아침 백두산 천지를 보았다는 기쁨도 잠시 어느새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모두들 숙소로 돌아갔습니다.nbspnbsp내일은 발해의 중심이였던 상경용천부의 성터를 둘러보고, 주작대로를 따라 외성터 내에 위치한 흥륜사를 방문한 후 두만강 유역으로 이동해 주요한 독립운동 유적지인 봉오동 전투터를 보면서 이제 독립운동에 대한 공부로 넘어가게 됩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nbsp
2015.8.4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 압록강과 북한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3일째를 맞이하여 압록강을 따라 이동하면서 강 건너편 북한 땅을 보면서 ‘북한의 현실’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오늘도 스님은 새벽 3시에 일어나 기도를 한 후 4시 30분부터 숙소를 나오는 대중들을 반갑게 맞이하며 역사기행 3일째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nbspnbsp5시에 집안을 출발한 버스는 4시간 30분 후 림강을 지났고, 다시 림강에서 압록강 상류를 향해 4시간을 올라가는 여정을 가졌습니다. 림강에서 백두산 최상류까지 올라가면서 많은 계곡 물들이 압록강으로 합류하게 되는데 특히 중국 쪽에서 흘러드는 계곡 물은 차례대로 번호를 붙여 24도구로 구분하고 있다고 합니다. 6도구, 8도구 지나갈 때마다 스님이 알려주어서 현재 기행단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압록강 너머의 북한 땅을 바라보니 산이 온통 뙈기밭으로 개간되어 있었습니다. 사람이 서 있기도 힘든 가파른 곳에 옥수수, 콩 등 작물을 심었고, 산에 있어야 할 나무들은 혁명 전적 유적지를 제외하고는 거의 보이지 않아 중국의 울창한 산림과 너무나 대비가 되었습니다.nbspnbsp▲ 압록강 너머로 보이는 북한의 뙈기밭nbsp많은 북한 주민들이 출근하기 전이나 퇴근 후에 뙈기밭을 열심히 일군다고 합니다. 직장 일에 집중하기 보다는 각자의 뙈기밭에 연명해 식량을 마련하다고 하니 안타깝기만 합니다. 스님도 ‘문전옥답에 인력이 효과적으로 쓰여야 할텐데, 산비탈에 가서 농사를 지으니 생산량이 거의 없지요.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은 이해가 되지만 소중한 인력이 얼마나 낭비되고 있습니까’ 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nbspnbsp간혹 보이는 집들은 아주 낡아 보여서 한눈에도 남루함이 느껴졌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빨래하는 주민들, 물놀이 하러 나온 아이들을 많이 목격할 수 있는데,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어서 북한 주민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습니다.nbspnbsp▲ 버스 창문으로 보이는 북한 혜산시의 모습nbsp스님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멍하니 북한 땅을 바라보고 있는 대중들에게 북한이 왜 이렇게 어렵게 되었는지, 스님이 북한 동포 돕기 활동을 시작하게 된 동기와 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94년과 95년 대홍수가 있었고, 95년에 이곳에 역사기행을 왔을 때 북한이 많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96년에 왔을 때는 중국 친구가 저를 압록강으로 데려가서 영양 실조 상태의 북한 아이들을 직접 보여줘서 그때부터 북한동포돕기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정토회관 건립 불사를 하기 위해 7층 건물 짓는다고 땅도 구해놓고 설계도까지 다 만들어놓고 공사를 시작하려는 순간 이 소식을 접했어요. 그래서 제가 ‘사람이 죽어가는데 무슨 불사는 불사냐? 건물은 지금 못 지으면 10년 후에 지으면 되지’ 하고는 건물을 포기하고 북한동포돕기를 시작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반대했는데 심지어 어떤 신도는 ‘스님 평생에 서울 시내에 이 땅 팔아먹고 다시 땅을 사서 절을 짓게 되면 내 손가락에 장을 지지겠다’ 고 하기도 했어요. 이렇게 해서 96년 겨울부터 97년, 98년, 99년, 2000년 겨울까지 매일 울고 다니며 인도적 지원을 호소했습니다.nbspnbspnbsp97년에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울고 불고 하면서 죽어가는 북한 동포를 살리자고 강의를 하고 다녔는데 그 해에 대통령 선거가 있었어요. 선거가 시작되니까 북한 동포 돕기는 뒷전이 되었지요. 한국에서는 도저히 안 되니까 그해 가을부터는 미국으로 가서 호소를 했고, 그 때 미국에서 한반도 문제 관련해서 영향력 있는 사람들도 만나게 되었어요. 그 사람들을 통해서 대북 인도적 지원을 하도록 요청했고, 마침 다음 해에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 내의 분위기도 바뀌고 이렇게 해서 98년부터 대북 인도적 지원이 시작되면서 1999년에 대량 아사가 멈추었습니다. 저희들이 낸 통계에 의하면 95년 8월부터 98년 8월까지 만 3년 동안 300만명이 아사한 것으로 파악되었습니다.nbspnbsp그러면 왜 이렇게 북한이 대량 아사가 일어날 정도로 경제가 붕괴하게 되었는가? 1989년 동유럽이 붕괴되고 중국이 시장 경제를 도입해서 실물 거래를 하게 되어 북한은 외환 확보를 못했고, 결국 그로 인해 에너지 난을 겪었고, 에너지 난으로 모든 공장이 멈추었고, 농자재를 생산하지 못하니까 농업 생산량이 급격하게 떨어졌고, 노동자들에게 배급을 주지 못해서 함경북도의 노동자들이 먼저 대량 아사를 하게 되고, 시간이 지나니까 농업 생산량이 더 떨어져서 노동자 뿐만 농민도 굶어죽게 되었습니다. 즉 노동자에서 농민으로, 동부에서 서부로, 평민에서 당원으로 이렇게 확대가 되면서 군인들까지 굶어죽는 일이 벌어지게 된 거예요. 북한은 이 시기를 고난의 행군 시기라고 부릅니다. 어쨌든 일단 국제적인 지원과 함께 죽을 만큼 다 죽고 난 뒤에야 대량 아사는 멈추게 된 것입니다.nbspnbsp그렇게 사회의 기초가 무너지니까 장마당에서 장사해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 생기고, 북한 정부는 이를 단속하고, 굶어죽으니까 다시 풀고, 이렇게 국가 정책에 의해서 시장화가 이뤄진 것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민중들의 투쟁이 시장화를 가져오게 되었고, 뙤기밭도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허가 받고 다니는 것도 거의 없어지고, 북한 사회 안의 정보도 유출되면서 북한은 많은 변화를 겪게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생존 조건이 되었고, 그래서 주민들의 이탈을 막으려고 하다 보니까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인권 침해 상황에 놓인 것입니다.nbspnbsp국가 안보의 취약함을 보완할려고 핵 개발을 시도했는데 미국과의 합의로 그 핵을 동결시키면서 미국에서 유류 지원을 했죠. 그러나 부시 정부가 들어서면서 이것을 중단시키니까 북한은 핵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고, 이 핵문제는 지금까지도 아무런 진척 없이 북한은 핵보유국을 선언하고 이에 대해 미국은 봉쇄를 강화해서 대치 국면에 계속 놓여 있는 상태입니다.nbspnbsp북한은 처음부터 저렇게 가난했던 것이 아니라 60년대에는 대동강의 기적을 이루었다 할 만큼 제3세계 가운데에서는 잘 사는 축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미소의 분쟁과 그 사이에서 살아남기 위해 주체 사상을 내세운 독재 체재의 강화, 이런 것들로 기술 보다는 이념을 강조하면서 정체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이나 서유럽이 급격히 혁신 기술들을 개발했는데 이와 차단되면서 기술 혁신이 뒤지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동유럽의 붕괴와 중국도 시장 경제로 가면서 배후를 잃어버리게 되었고, 미국의 경제 봉쇄로 국제사회에 나올 수 없게 되면서 경제가 급격하게 붕괴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첫째 외환 위기, 둘째가 에너지 난, 그로 인한 모든 공업의 붕괴, 이것이 농업의 붕괴로 이어지면서 사회 붕괴로까지 가게 되었습니다.nbspnbsp그러나 정치와 군대라고 하는 상부 구조는 유지하고 있습니다. 하부 구조만 보면 내일 망할지도 모를 정도로 허약하지만 상부 구조는 내일이라도 한국을 제압할지도 모르는 극과 극의 상황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북한 정권은 불안정합니다. 그러나 단기적으로는 그렇게 쉽게 붕괴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이 두가지 측면을 동시에 봐야 합니다. 그러면서 북한만 볼 것이 아니라 국제 사회가 바뀌고 있기 때문에 이런 북한을 어떻게 포용을 해서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하고, 우리들도 더 성장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아내느냐. 이것이 통일의 과제입니다. 통일로 어떻게 나아가야 하며 통일 이후에 어떤 세상을 만들 것이냐. 이것이 이 땅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과제입니다. 여기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이예요.nbspnbsp북한을 무조건 적대하는 일부 우파도 바른 관점이 아니고, 북한에 대해서 동조하거나 동경하는 일부 좌파도 바른 관점이 아닙니다. 이런 것을 글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 와서 보고 아픔도 느끼고 그들의 모순도 보고 이 속에서 공부하고자 하는 것입니다.”nbsp단순히 뙈기밭을 구경하고 가슴 아파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행동하기 위해서 역사기행을 온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다행이 이번 기행단은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모인 통일의병들이 주축이 되어 있어서 그런지 스님의 간절한 호소에 더욱더 큰 공감을 보여주었습니다.nbspnbsp긴 시간을 달려 버스는 어느덧 장백현에 도착했습니다. 장백에는 발해 시대의 탑 중에서 유일하게 남아있는 영광탑이 있습니다. 비가 오는 와중에 끝이 보이지 않은 계단을 쉼없이 올라가니 정상 부위에 높은 탑이 하나 보였습니다.nbspnbsp▲ 영광탑으로 올라가는 계단nbsp스님은 “발해 시대의 사람들은 대부분 불교인이였고 옛 법도에 따라서 참배를 하려고 한다” 면서 “불교식으로 예참 공양을 함께 올리자”고 했습니다.nbspnbsp▲ 발해 시대에 세워진 영광탑nbsp정성껏 예참 공양을 올린 후 곧바로 평화와 통일에 대한 발원을 스님께서 해주었습니다.nbspnbsp“오늘 저희 한국에서 온 고구려 발해 역사기행 참가자 140여명은 발해 시대에 건립한 장백현 영광탑 앞에서 지난 1100년 동안 이 탑을 참배하고 공양 올리지 못한 잘못을 참회 드리옵고, 늦게 나마 이렇게 시간이 되어 저희 대중이 다시 찾아와 옛과 다름 없이 공양 올리노니 저희의 이 간절한 소원을 성취시켜 주시옵소서.nbspnbspnbsp저희 한민족은 하느님을 받들고 대대로 이 땅에 강과 산을 지켜왔는데 인연이 다했는지 저희의 공덕이 모자랐는지 저희가 살던 고향을 잃어버리고 반도에 갇혀 1100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이르러 그 강토 마저 일제의 침략을 받아 지배 당하고 또 해방이 되자 마자 외세에 의해 분단이 되어 올해로 분단 70년이 되도록 남북 간에 갈등이 잠들지 않고 곧 전쟁이라도 날 것처럼 갈등이 격화되고 있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저희가 피땀 흘려 쌓아온 재산과 인명이 전쟁의 참화로 잿더미가 되지 않도록 다시는 이 땅에 전쟁이 없는 항구적 평화를 발원하옵니다.nbspnbsp더 나아가 북쪽은 생존의 위기에 내몰리고 있고, 남쪽은 성장이 둔화되고 정체와 후퇴의 기로에 서 있습니다. 이 민족사의 위기를 극복하려면 통일만이 유일한 길이오니 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여 평화를 지키고 통일을 성취할 수 있도록 제불 보살님과 천룡팔부 신중님들은 옹호하여 주시옵고, 환인, 환웅, 단군 삼신님과 역대 조상 영가님들은 저희의 이 발원이 곧 성취될 수 있도록 저희에게 온갖 힘을 불어넣어 주옵소서.nbspnbsp저희의 통일은 저희만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이웃과 더불어 사이좋게 서로 도우며 살아갈 새로운 문명,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로 통일을 발원하옵나니 통일의 첫발을 딛고 동아시아의 평화 공동체를 형성하고 인류의 평화와 복리와 번영을 발원하오니 저희의 이 평화와 통일에 대한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또한 보살펴 주옵소서.nbspnbsp또한 이렇게 고단한 몸을 이끌고 이곳 혜산과 장백에 이르고 탑산에 올라와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순례 대중 일동들 건강하고 다생겁래 모든 업장 소멸되고 세세생생 보살도를 행하여 자유와 행복을 만끽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대중들도 스님의 간절한 발원을 가슴에 새기며 광활한 만주 벌판을 누빈 발해인들의 기상을 이어받아 새로운 통일 코리아를 열어갈 것을 함께 다짐했습니다.nbspnbsp발원 기도 후 스님은 “발해 시대의 탑이 다 없어졌는데 이 탑 만이라도 웅장한 모습으로 산 정상에 있다는 것은 우리들에게 큰 복이다” 라고 하면서 올라온 김에 함께 기념 사진을 찍자고 했습니다. 카메라가 찰칵 하자 모두들 ‘통일 의병’을 외치며 환하게 웃었습니다.nbspnbspnbsp그리고 양강도의 수도인 혜산을 내다보며 이곳에서 좋은벗들이 북한 난민 돕기를 했던 이야기를 듣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독립운동 할 때 만큼이나 위협을 무릅쓰고 춥고 배고픈 난민들을 도왔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nbspnbspnbsp버스는 드디어 점점 백두산에 가까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압록강 상류로 갈수록 강폭은 좁아지고 나중에는 작은 냇가처럼 좁아졌습니다. 폭짝 몇 발자욱만 건너 뛰면 곧 넘어갈 수 있는 거리가 되었습니다.nbspnbsp버스 안에서의 시간이 길어지자 스님이 “자기 소개 시간을 갖자”고 했습니다. 한명씩 앞으로 나와 어떻게 역사기행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3일을 함께 보낸 소감이 어떤지 속깊은 나누기를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역사기행에 참가하기 위해 2년 전부터 적금을 들었다는 분, 남편의 반대가 심해 참가신청 한달 전부터 남편에게 고분고분 숙였다는 분, 전생에 독립운동가였는지 이곳에 오니 매일 매일 가슴이 뛴다는 분 등 다양한 사연과 이야기를 들으며 버스 안은 웃음이 넘쳐 흘렀습니다.nbspnbspnbsp어떤 분은 통일 노래를 힘차게 부르기도 하고, 마음나누기가 일찍 끝난 버스는 자료집에 있는 통일 노래를 함께 배워보는 시간도 가졌습니다.nbspnbspnbsp오후가 되자 저 멀리 구름 사이로 붉은 해가 모습을 비추었습니다. 중국에 온 지 3일이 지나가고 있지만 아직 햇살 한번 구경하지 못했는데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해를 보고 대중들은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습니다.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는데 천지를 선명하게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에 모두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스님도 “너무 오랜만에 해를 봐서 그런지 저녁에 지는 해인데도 마치 아침에 뜨는 해 같다”며 웃음을 내비쳤습니다.nbspnbspnbspnbsp백두산의 깊은 산속으로 들어와 서쪽 문 밖 송강하 지역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식사 후에는 이번 기행의 실무를 맡고 있는 조춘호 선생님이 기행단 전체를 위해 통화 포도주를 보시해서 다함께 건배를 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장기자랑 시간을 가졌습니다. 각 지역별로 노래 부르고 싶은 사람들이 나와서 노래 한자락씩을 뽐내었습니다. 온갖 노래들이 이어지면서 후끈 열기가 달아올랐습니다.nbspnbsp장기 자랑을 마치고 스님은 내일 오르게 될 백두산에 대해 설명을 해준 후 오늘은 하루 종일 북한 땅을 보면서 왔는데 북한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과 인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오늘은 안개가 많이 껴서 북한의 모습을 그렇게 선명하게 보지 못하여 아프게 다가오지는 않았을 거예요. 정말 가슴 아픈 것은 뙈기밭입니다. 안 죽고 살려고 발버둥친 인간의 처절한 노력 같아서 너무 가슴 아프거든요. 이념을 떠나서 저렇게까지 살려고 발버둥을 치는데... 식량 버리는 게 엄청난 죄라는 것을 아시겠죠?nbspnbsp식량 정도 주는 것은 북한 정부하고는 아무 관계가 없는 거예요. 현재 유엔에서 말한 인도적 지원이라는 것은 사상과 이념, 종교, 체제, 남녀, 모든 것을 떠나서 인간은 굶어죽으면 먹여살려야 되고 병들면 치료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북한 주민만 유엔이 정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권리를 외면하느냐 말입니다. 이게 증오심이에요. 남북한의 증오심이 문제지요.nbspnbspnbsp북한에 끌려 가라든지 북한을 좋게 보라는 얘기가 아니라 그들이 정치를 잘못하고 그들이 나쁜 짓을 한 것과 인도적 지원은 관계가 없다는 것입니다. 굶어죽으면 일단 살려야 돼요. 극악한 범죄자도 최종적으로 판결이 나서 죽일 때 죽이더라도 살아있을 때까지는 보살펴야 되는 거예요. 북한 정권에 대해서도 나중에 심판을 할 때 하더라도 주민들은 살려야 하잖아요. 더구나 주민들은 범죄자도 아니잖아요. 그런 면에서 인도적 지원의 문제는 반드시 해야 되는 거예요. 저렇게까지 살고 싶어 하잖아요. 내가 북한 체제를 반대하는 것과 인도적 지원은 별개로 생각해야 되는데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면 이런 일이 생겨나는 겁니다. nbspnbsp예를 들어 친일배를 미워한다고 친일배의 후손까지 미워하면 안 됩니다. 당사자를 미워하는 것은 친일을 했기 때문에 그럴 수 있지만 그 자식은 친일에 대해 알고 태어난 것이 아니잖아요. 그걸 가지고 차별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일본의 군국주의를 미워하고 비판하고 경계하는 것은 좋지만 일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올바른 것이 아니예요. 그들이 저지른 침략의 범죄는 그들의 조상이 한 것이지 지금 태어난 아이들이 한 건 아니잖아요. 막연히 일본놈이라고 해서 미워하는 것은 옳지가 않습니다. 그런데 북한 주민들은 북한 정부로부터도 피해를 입는 사람들인데 이중적 피해를 준다는 것은 맞지 않아요. 이것을 너무 이념적으로 접근하면 안 돼요. 북한 체제의 유지와 붕괴에 관계없이 굶어죽는 사람은 구제해야 한다는 게 기본적인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nbspnbsp그리고 통일은 우리 남한의 미래의 비전을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이 해결되는 길이기도 합니다. 북한이 개혁 개방이 되어서 생존권이 보장되고 인권이 개선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릴 것이고 또한 그것은 쉽지도 않습니다. 긴장이 조성되면 어떤 나라든 체제를 유지한다는 명목 하에서는 사람이 굶어죽는 것도 외면하고 인권 침해도 외면할 수 밖에 없습니다.nbspnbsp그렇기 때문에 남북 관계의 긴장을 완화시키고 통일로 가는 것이 북한 주민들의 생존권을 제일 빨리 보장하고 인권 개선을 가장 빨리 하는 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미래 이익을 위해서나 북한 주민들의 이익을 위해서나 평화와 통일은 우리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nbspnbsp남한은 지금 경제가 정체되어 있는데 정체 국면을 돌파하려면 통일 만이 살 길이라고 하듯이 북한 주민의 생존권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도 통일만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한쪽의 이익을 위해서 한쪽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양자를 위해서 다 필요한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통일 문제는 같은 민족이니까 통일하자고 하는 것과 같은 옛날 운동권적인 통일과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 좌니 우니 옛날에 잘했니 못했니 같은 얘기는 더 이상 불필요해요. 우리들의 현재 이익을 훼손하지 않고 미래의 이익을 위해서도 통일만이, 이념적 통일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통일만이 우리의 미래에 희망을 가져올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 것들을 현장에서 보는 게 필요하다 싶습니다.”nbspnbsp남한과 북한 모두에게 통일은 큰 희망이 될 수 있다는 말씀에 대중들도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내일 올라갈 백두산과 관련해 잘못 이해하는 것이 있는 것 같다며 간략히 설명하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nbspnbspnbsp“내일 백두산에 올라가서 그 기상을 느껴볼 텐데요. 왜 환웅 천왕님이 태백산 아래에 신시를 건설했을까요. 한국적으로 산을 생각하니까 태백산 아래라고 하면 자꾸 골짜기 같은 것을 생각하는데 백두산은 동북아 대륙인 몽골과 만주, 중원 북부 지역 전체에서 제일 높은 산이에요. 만주벌의 어디에 나라를 세워도 다 백두산 아래에 세운 것이 됩니다. 백두산이 머리 부분이에요. 그래서 이름이 ‘백두’이잖아요. 인도나 양자강 이남 어디에 세웠다는 뜻이 아닙니다. 동북아 대륙, 한반도와 만주, 이 지역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산이 백두산입니다. 백두산에 대한 그런 이해를 하면서 내일 백두산 천지에 올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nbsp동북아 대륙에서 가장 높고 웅장한 산이 백두산이라는 말에 선조들도 자연적으로 백두산을 향한 마음이 남다를 수 밖에 없었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식당에서 간단히 강연을 마치고 숙소가 있는 이도백하로 향했습니다. 밤하늘에는 별도 보였습니다. 왠지 내일 백두산 천지가 맑게 개인 모습을 보여줄 것 같은 기대감과 함께 잠자리에 듭니다.nbspnbspnbsp내일은 이도백하에서 백두산 북편으로 올라 천지를 봅니다. 또 비룡 폭포와 소천지, 지하삼림을 본 후 발해의 땅으로 넘어 갑니다. 동모산, 강동 24개석을 본 후 돈화로 들어가는 일정입니다. 내일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