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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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8.21 전국 대의원 회의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의 최고 의결기구인 전국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여 정토회의 설립 취지에 대해 입재 법문을 했습니다.nbspnbsp어제부터 문경 정토수련원의 명상원에 머물고 있는 스님은 새벽 예불과 기도를 한 후 아침 일찍부터 각종 보고서들을 점검하다가 10시가 되자 전국 대의원 회의가 열리는 대강당으로 올라갔습니다.nbspnbsp전국에서 100여명의 대의원들이 자리한 가운데 10시30분부터 제6차 전국 대의원 회의가 시작되었습니다. 삼귀의와 반야심경 봉독 후 대의원들은 스님께 청법가와 삼배를 하며 ‘정토회 대의원의 역할’에 대해 입재 법문을 청했습니다.nbspnbspnbsp입재 법문을 통해 스님은 먼저 2015년이라는 지금 시기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지 물음을 던지며 말문을 열었습니다. 30년을 내다보며, 100년을 내다보며, 1000년을 내다보며 각각의 시야에서 볼 때 우리는 지금 어떤 준비를 해야 미래의 희망이 될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는 가운데 그 속에서 정토회의 설립 취지와 방향도 자연스럽게 강조해 주었습니다.nbspnbsp“2015년이라고 하는 올 한해는 30년의 긴 시간에서 볼 때는 어떤 시기로 인식이 될까요? 지난 50년을 경제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고도 성장기, 중간 성장기, 저성장기로 나눠볼 때 지금은 저성장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앞으로는 어떻게 전개될까요? 장기적 침체기로 나아갈 것이고, 더 시간이 흐르면 쇠퇴기로 나아가게 됩니다. 즉 공을 하늘 높이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며 올라가는데 우리는 이제 포물선 꼭지점의 막바지에 이르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nbsp나라와 민족의 100년을 내다본다면 어떻게 될까요? 전반기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일제 침략기였고, 그 이후에는 나라를 되찾았지만 분단된 시기였고, 지금은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의 시대를 내다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기려고 할 때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하는 의병 운동이 있었고, 나라를 빼앗겼을 때는 나라를 되찾으려고 하는 독립운동이 있었고, 나라가 분단되려고 할 때는 분단되지 않으려고 하는 통일 정부 수립 운동이 있었고, 분단이 되어서 서로 원수가 되었을 때는 서로 이기려고 하는 적대적인 경쟁의 시기가 있었고, 그 경쟁이 지나치면 서로에게 손실이 오기 때문에 경쟁을 완화시키려고 하는 평화와 공존의 시기가 있게 되고, 공존의 이익이 큼을 알게 되면 하나로 통합해야겠다고 하는 통일의 시기가 오게 됩니다.nbspnbsp그래서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이 시대적 과제였습니다. 분단이 되고 나서 남한 안에서는 가난했기 때문에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 하는 산업화 시기가 있었고, 먹고 살 만 하니까 우리도 자유롭게 살아보자고 하는 민주화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금은 어떤가요? 어느 정도 살 만 하고 자유롭게 사는 데도 늘 불안하고 쫓기며 사는 것은 경쟁이 지나치고 사회적 안정망 구축이 안 되어 있고 빈부격차가 심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이 보면 먹고 살 만 한데 그 안에 사는 국민들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이제는 국민들의 행복도가 높아질 수 있도록 빈부격차를 줄이는 경제민주화, 안전망을 구축하는 복지사회, 민주주의가 심화되어 시민이 진정으로 주권자가 되는 분권 사회, 이런 것들이 시대적 과제가 되었습니다. 남쪽만 생각하면 이런 것들이 시대적 과제가 되지만, 남북을 통합해서 보면 이제는 통일이 시대적 과제가 됩니다.nbspnbspnbsp우리 나라만 보지 않고 주변국까지 같이 보면 어떻게 될까요? 국제사회는 지금 질서가 새롭게 재편되고 있습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 중심의 세계 질서가 이제는 경쟁자인 중국이 부상하면서 미국과 중국이 경쟁하는 시대가 출발했습니다. 아직은 미국 중심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힘의 균형점에 도달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뒤집어질지 경쟁이 오래갈지 그렇지 않으면 도전자가 찌그러질지 그것은 지나가봐야 알겠지만, 그러나 세력이 새롭게 재편되는 시기입니다. 이렇게 세력이 새롭게 재편되는 시기에 대한 인식이 없다면, 즉 그 전 시기에 안주해 있다면, 새로운 변화의 시기에 낭패를 겪게 됩니다.nbspnbsp조금 더 크게 보면 어떻게 될까요? 세계를 주도하는 문명의 중심이 이동해가고 있습니다. 19세기의 유럽에서 20세기의 미국으로, 그것이 21세기 들어오면서 동아시아 지역으로 규모 면에서 조금씩 이동해가고 있습니다. 아직은 미국이 중심이지만 그 비율이 조금씩 바뀌어나가고 있습니다. 앞으로의 100년을 바라본다면 영토나 인구나 발전 속도를 봤을 때 동아시아가 그 규모 면에서 세계 재부의 중심으로 등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런 시대의 변화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nbspnbsp더 크게 보면 어떻게 될까요? 문명적 전환의 시기입니다. 인간은 인지 능력이 점점 발달하면서 자연의 주어진 한계 속에서 그 활동 영역을 넓혀 왔는데, 인간이 자연에 대한 이치를 터득함으로 인해서 이제는 오히려 자신을 규정했던 조건인 자연을 개조하는 시대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물질도 만들고 나아가서는 새로운 생명 종의 변화도 가져왔습니다. 즉 물질의 근원을 이해하게 되면서 물질적 변화도 가져오고, 생명의 근원을 이해하고 DNA의 비밀을 풀어서 종의 변화를 가져오기에 까지 이르렀습니다.nbspnbsp그러면 인간은 더욱 자유롭고 행복해졌을까요? 그렇지가 못합니다. 이런 자연의 변화와 종의 변화가 인간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건가요? 반드시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환경 변화를 가져와서 인류 문명을 멸망시킬 수도 있고, 그것은 어떤 바이러스를 출현하게 해서 인류가 멸망할 수도 있는 위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큰 변화이기는 한데 진정으로 우리의 자유와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nbspnbsp그런데 부처님은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에 자기에게 주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새로운 길을 열어서 괴로움이 없는 열반과 해탈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했습니다. 당시 우리의 삶은 자연으로부터만 규제받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인 운명이란 것으로부터도 규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인간들은 자신의 운명을 바꿔서 운명의 주인이 되는 삶 보다는 남을 바꾸고 환경과 물질을 바꾸는 것에 더 욕심을 냈기 때문에 오늘날 물질의 변화는 가져왔는데 자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두웠습니다. 그래서 물질의 변화가 오히려 우리의 삶을 위험에 빠트리기도 했습니다.nbspnbsp이런데서 현대 문명은 위기가 도래했습니다. 우리의 삶에 맞게 자연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자연을 파괴하는 데에 까지 이르러서 우리 삶의 토대를 붕괴시키고 있습니다. 인류 공동체의 모순을 극복한다는 것이 지나쳐서 공동체가 점점 파괴되고 있습니다. 인류 공동체는 말할 것도 없고, 국가 공동체와 민족 공동체가 해체되고 있고, 심지어는 가족 공동체까지 점점 해체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점점 외로워지고 있고, 이것이 더 나아가서는 자신의 삶 조차도 제대로 온전시키지 못하는, 그래서 마약에 의지하고 쾌락에 의지하고 이렇게 중독이 되어가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자아 마저도 상실되고 있습니다.nbspnbspnbsp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자연이 주인이고 인간이 노예인 것도 아니고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삶, 인간과 인간이 경쟁이 지나쳐서 서로 투쟁하고 살아가는 관계가 아니라 서로 돕고 조화를 이루는 평화로운 삶, 이런 삶을 추구함으로 해서 자유와 행복도가 높아지고 자기 삶의 주인이 자기가 되는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가야 됩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붓다가 가졌던 문제 의식은 오늘날 현대 문명이 갖고 있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데 좋은 해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장 크게는 문명 전환에 대비한 삶의 모델을 우리가 만들어나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적어도 현대 문명 이후를 내다보는, 현대 문명의 종말이 100년 후에 올지 200년 후에 올지 500년 후에 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우리는 1000년을 내다보고 그 씨앗을 심고 그 싹을 가꾸자는 것입니다.nbspnbsp더 좁혀서는 동아시아 시대의 도래에 대비해 서양 문명의 한계를 개선해서 이 문명 안에서는 동아시아 문명을 꽃피우는 준비를 해나가고, 조금 더 좁혀서는 나라의 통일을 통해서 민족사의 천년의 꿈을 실현하는 방향 위에 우리가 서 있습니다.”nbspnbsp붓다가 가졌던 문제 의식은 오늘날 현대 문명이 갖고 있는 한계 상황을 극복하는데 좋은 해답이 될 수 있다는 말씀에 온 몸이 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문명적 전환의 시기에 1000년을 내다보고 그 씨앗을 심고 가꾸고 있다는 말씀에 가슴이 뛰었습니다. nbspnbsp이어서 스님은 2600년 동안의 불교 역사 속에서 다시 정토회의 설립 취지를 조망해 주었습니다.nbspnbsp“불교사적으로 보면 기존에 있는 한 종파의 부분으로서 이 종파를 어떻게 혁신할 것이냐에 관심을 둘 것인지, 아니면 한 종파의 혁신이 아니라 새로운 종파를 형성해서 이 종파의 다음을 대비할 것인지, 아니면 종파를 넘어서서 새로운 불교를 준비할 것인지, 더 넘어서서는 새로운 불교를 넘어서서 모든 종교를 초월하는 새로운 정신 문명에 대비할 것인지, 이것 또한 우리가 우리의 시대를 언제까지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와 관계가 있습니다.nbspnbspnbsp지난 2600년의 불교사만 보더라도 크게 네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소승불교 시대, 대승불교 시대, 밀교 시대, 그리고 동아시아에 와서는 선불교 시대로 나눕니다. 소승불교 시대에는 많은 부파가 있었고 부파가 서로 경쟁하면서 흥망성쇠를 거듭했습니다. 부파 안에서 그 부파를 혁신하는 많은 운동이 있었습니다. 새로운 부파가 형성되고 기존의 부파가 사라지기도 했고, 혁신을 해서 다시 그 부파가 부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부파 운동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불교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입니다. 기존의 부파에서 볼 때 다른 부파는 경쟁의 상대였지만 그래도 하나의 부파로 인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대승불교는 그런 부파 수준도 안 되는 사이비라고 해서 ‘대승 비불설’이라고 규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대승불교는 그런 부파 가운데 하나가 되기 위해서 새로운 불교 운동을 시작한 것이 아니였습니다. 그 모든 부파가 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서 벗어났다고 보고 새로운 불교 운동을 일으켰기 때문에 이 운동은 기본 부파들의 공공의 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비불설이라는 누명을 썼습니다. 이것이 바로 대승불교 운동입니다.nbspnbsp부파 불교에서는 승단의 주체자인 출가 승려들 사이에서 경쟁을 했고, 지역 간에 경쟁을 했고,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어느 경전을 중요시하느냐 이런 경쟁을 했다면, 대승불교는 주체자가 아예 달랐습니다. 출가 승려가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재가 신자로 규정하던 사람들이 오히려 중심이 되었습니다. 수행자는 출가 사문을 지칭했는데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자를 보디사트바로 규정했습니다. 출가와 재가를 구분하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보디사트바로 승단을 구성했습니다. 소의 경전도 그 전의 경전 중에 하나가 아니라 대승 경전이라고 하는 새로운 경전이 출현했습니다. 그래서 대승은 소승의 한 부파가 아니고 소승의 부파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불교 운동이였습니다.nbspnbsp이 대승불교와 소승불교가 모두 중국에 와서 경쟁을 했는데 인도 안에서는 소승불교가 원조이기 때문에 경쟁에서 유리했는데 새로운 지역인 중국에 오니까 오히려 대승불교가 유리해져서 중국은 대승불교권이 되었습니다. 기득권을 갖고 있던 그 세계에서는 아무리 새로운 것이 일어나도 그 기득권을 극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개척지로 나아가게 될 때는 현실에 안주해 있는 집단은 규모는 크지만 경쟁력이 없고, 오히려 기존의 세력으로부터 온갖 탄압을 받고도 일어선 새로운 불교 운동이 탁월한 경쟁력을 보여 준 것입니다. 그래서 중국은 처음에는 소승불교가 먼저 들어왔지만 대승불교가 월등히 빠르게 민심을 잡게 되었습니다.nbspnbsp그런데 이 대승불교가 세력이 커지면서 그 안에서 또 수많은 종파가 생겨나 경쟁하고 또 흥망성쇠를 거듭했습니다. 종파 안에서 혁신이 일어나고 종파가 부흥하다가 소멸하기도 하고 신흥 종파가 일어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승불교의 한 종파가 아닌 전혀 다른 새로운 불교가 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선불교입니다. 그래서 기존의 제 종파가 경쟁하면서도 이 선불교에 대해서는 ‘저들은 부처님의 가르침인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있다’고 하면서 사이비로 규정했습니다. 첫째는 불교로 인정을 못 받았고, 이 새로운 운동이 땅에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자 나중에는 많은 종파 중에 하나로 규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선종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모든 종파가 통합이 되어 교종이 되고 새롭게 일어난 것은 선종이 되어서 선종과 교종의 양쪽으로 경쟁을 하다가 전체적으로는 선종으로 통합이 되고, 오히려 기존의 불교가 선종 안으로 흡수가 되어서 선불교의 새로운 시대가 생겨났습니다.nbspnbsp우리가 불교를 새롭게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선불교 안에서 한 종파의 혁신을 도모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한 종파가 될 것인가, 아니면 이 모든 제 종파와는 차원이 다른 새로운 불교가 시대적 요청인가, 이것을 볼 수 있는 안목이 있어야 합니다. 어디까지로 규정할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교에 있어서도 제4의 새로운 운동을 한다는, 또한 불교의 울타리를 넘어서서 문명 전환을 꾀하는 새로운 씨앗을 만든다는 꿈을 가지고 정토회를 창립했습니다. 즉 우리는 우리의 시대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지금 우리는 오늘 중 오전을 살고 있고, 이 달의 하순을 살고 있고, 이 해의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환절기에 살고 있고, 이렇게 좁게는 하루가 인식이 되지만, 크게는 통일을 준비하는 시대에 살고 있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꿈꾸며 살고 있고, 동아시아 문명의 미래를 보면서, 더 나아가서는 새로운 문명의 씨앗을 심으며 살고 있습니다.nbspnbsp그렇듯이 불교 안에서도 우리는 한 종파 안에서 한 시민단체로서 출발했지만 우리는 어떤 불교를 내다보고 어떤 시대를 내다보고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서 지금의 구조는 완성된 구조가 아닙니다. 우리는 새로운 불교와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는데 합당한 실행 체계와 조직 체계를 만들어나가야 되기 때문에 지금 규모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또 지금 규모가 작고 인정을 못 받는 것에 헐떡 거려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멀리 목표점을 보고 한발 한발 딛고 나가기에 이 역사적인 관점을 분명히 가져야 흔들림 없이 갈 수 있습니다.nbspnbspnbsp여름이라고 해서 하루만 보고 여름 옷만 준비해 왔더니 아침에 일어나니까 벌써 가을 기운이 돌아 날씨가 쌀쌀하다고 우왕좌왕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더워서 여름 옷을 준비하지만 환절기인 줄 알고 가을 옷도 한 벌 더 챙겨와서 찬바람이 불면 하나 더 걸치고 안 불면 입던 옷을 그냥 입어도 되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nbspnbsp이렇게 역사적인 안목과 큰 시야를 이야기해 주니 정토회의 설립 취지가 한 눈에 쏙 이해가 되었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이와 같은 정토회의 설립 취지와 방향 속에서 대의원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말씀해 주었습니다.nbspnbsp“이런 관점 위에 규모가 커짐에 따라서 점점 역할을 분담해야 하고, 자립을 시켜서 분권을 해야 하고, 더 규모가 커지면 분화를 해야 하고, 그럴 때 통합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감사 기능이 보완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먼 목표에서 보면 이제 우리는 겨우 씨앗이 싹을 틔워 자라는 수준이 된 것입니다. 이것을 한번 옮겨심게 되면 더 큰 변화가 올 수 밖에 없습니다.nbspnbspnbsp1차 만일결사는 씨앗을 심어서 대한민국이라는 틀 안에서 모종을 잘 키우는 것이라면, 2차 만일결사를 맞아 한국 밖으로 나갈 때는 이것은 온실에서 자란 모종을 밖으로 옮겨심는 것이기 때문에 죽는 것도 생기고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것도 생기고 그러다가 뿌리 내리고 다시 커져 나가는 과정을 겪게 될 것입니다. 그럴 때 거기에는 새로운 혁신도 필요하고 인내도 필요하고 실패와 정체를 감수해내는 인욕행도 필요합니다. 조급하거나 성과에 급급하면 결국 한 그루 보리수를 심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콩씨를 심는 것에 불과해집니다.nbspnbsp바로 대의원 여러분들이 이런 일을 해나가는 정토회 안에서의 최고 결정권자들입니다. 실제로 정토회를 지금 이끄는 것은 행정처의 임원들이지만 그것은 결정된 것을 집행하는 실행기구이지 방향을 잡아가는 기구는 아닙니다. 바로 여러분들이 앞에 서서 방향을 잡아가고 그 실행과정에서 나타나는 많은 문제점들을 모니터링해서 다시 보완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현실적으로 지금 당장 이 역할들을 해낼 수는 없겠지만 하루 하루 지날수록 대의원들의 역할이 무엇인지 인지가 되어야 하고 그 역할도 해내야 합니다. 그 핵심이 바로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정토회를 이끌어가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업을 결정하는 권한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초기에는 저 혼자서 그런 역할을 했고, 다음은 법사단이 그 역할을 했고, 그 다음은 더 넓혀서 보살단이 그 역할을 했는데, 이제는 서원행자 중에서 선출된 대의원회에서 이 모든 결정권이 넘어갔습니다. 여러분들이 정토회의 최종 책임자들입니다. 다만 아직은 조금 부족하기 때문에 법사단이 한번 더 결정을 걸러주는 감사 기능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nbspnbsp여러분들은 이렇게 정토회의 미래를 보고 정토회가 현실에 뿌리를 두지 않은 공허한 단체가 되지 않도록, 정토회가 현실에 안주하는 비전 없는 단체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정토회는 현실에 두 발을 딛고 있되 문명 전환의 꿈과 새로운 불교 운동의 꿈을 가진 단체라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정토회는 대중 조직이기 때문에 소수의 선각자에 의해서 이끌어지는 단체가 아닙니다. 늘 민의가 수렴되어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의 개인 생각을 갖고 이 자리에 와서 이러쿵 저러쿵 한다면 대한민국의 국회의원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이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해준 10명의 정회원을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10명의 정회원들의 의사를 대변하는 사람이지 자기 생각을 얘기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nbspnbsp그렇다고 대중들의 의사만 물어서 가면 중우 정치가 됩니다. 각성된 수행자들이 앞에서 방향을 잡아나가고 개척하지만 대중들은 따라오기만 하라가 아니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중의 애로와 의견을 늘 수렴하면서 나아가야 합니다. 여러분들에게는 앞서 가야 하는 원래의 사명이 하나 있고, 또한 대중의 의사를 늘 반영하면서 대중을 함께 이끌고 가야 할 사명도 있습니다. 이 둘을 함께 가야 합니다. 이런 관점에 서서 이번 전국대의원대회에서는 올해의 상반기를 어떻게 평가하고 하반기를 어떻게 계획할 것인가, 동시에 3년 천일결사의 중반기이기 때문에 앞선 1년 반을 어떻게 평가하고 향후 1년 반을 어떻게 마무리지을 것인가, 또한 만일결사의 제8차 시기이니까 9차와 10차에 대비한 준비를 지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더 크게 보면 만일결사의 후반기이니까 제1차 만일결사를 어떻게 마무리짓고 제2차 만일결사의 출발을 위해서 우리가 어떤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인가, 이런 문제들이 모두 함께 살펴져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들이 진지하게 대의원의 역할을 해나가시기 바랍니다.nbspnbspnbsp이미 서원행자가 되었다는 것은 여러 경험을 해서 정토회의 취지와 방향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방향대로 갈 수 있도록 사업 방향을 잡아주어야 하고, 그것을 행정처에서 실행하는 것을 잘 도와주고 지켜보면서 대중과의 사이에서 괴리가 생길 때 대중의 처지를 잘 반영시켜서 현실 괴리가 생겨나지 않도록 민의를 반영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nbsp대의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직은 부족함이 많지만 대신 문명 전환이라는 큰 목표를 향해 나아가고 있음을 알게 되자 가슴 한켠에서 뿌듯함이 느껴졌습니다.nbspnbsp스님의 가슴 뛰는 이야기가 끝나자 대중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 갈채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표했습니다.nbspnbspnbsp입재 법문이 끝나자 곧바로 자리를 정비한 후 제6차 전국 대의원 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전국 대의원 대회는 정토회 대표 이기혜님을 의장으로 해서 2015년 상반기 사업보고와 하반기 사업 계획, 분과별 토론 시간, 안건 토의 등을 하루 종일 이어가 밤 10시 30분이 되어서야 중간 갈무리를 짓고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 정토회의 사업 방향에 대해 열띤 토론을 해나가는 대의원들의 모습을 보며 대중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가는 정토회의 미래가 현실 속에서 잘 뿌리내려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대의원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동안 전국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지 않고 명상원에 머물며 원고 교정 업무를 보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내일 스님은 전국 대의원 회의를 마치는 대중들을 위해 회향 법문을 한 후 연이어 계속되는 서원행자대회에서도 입재 법문을 해줄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nbspnbsp ※ 법륜 스님의 쉽고 명쾌한 강의 2015년 정토불교대학 가을 학기가 전국 114개 지역과 해외 33개 지역에서 동시 개강합니다.nbsp마음이 작용하는 이치와 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세요.nbsp nbsp nbsp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찾는 분들의 많은 신청 바랍니다.

2015.08.22. 43,218 읽음 댓글 24개

2015.8.20 종교인 모임 및 실무회의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을 가진 후 평화재단과 정토회 행정처 실무자들과 하반기 행사와 업무들에 대해 회의를 하였습니다.nbspnbsp새벽 4시30분 서울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오전 7시부터 민족의 화해와 평화를 위한 종교인 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종교인 모임에서는 8월말에 예정된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선언 내용 중 일부 수정 작업과 기자 회견 및 평화와 통일을 위한 1000일 기도에 대해서 실무 준비를 어떻게 할지 의논하였습니다.nbspnbspnbsp오전 10시부터는 평화재단 실무자들과 함께 평화재단 하반기 사업 계획에 대해 공유하고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이어서 오전 11시에는 정토회 행정처 집행위원들과 정토회 하반기 사업 계획에 대해 공유하고 의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nbsp평화재단에서 간단히 점심 식사를 한 이후에는 「평화와 통일을 위한 종교인 선언」을 위해 지난 한달 동안 각 종교별로 서명 받으면서 들어온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여 선언문 내용을 일부 수정하기로 하였는데 그 실무적인 교정 업무를 하였습니다.nbspnbsp이후 각종 업무들을 보고 받고 결재한 후 오후 2시에는 문경 정토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문경 정토수련원에서는 내일부터 1박2일 동안 정토회의 최종 의결기구인 전국대의원대회가 열립니다. 전국대의원대회에 이어서 다시 1박2일 동안은 서원행자대회가 열립니다. 스님은 문경 정토수련원에 머물며 밤 늦게까지 통일의병 교육 교재로 사용된 원고 교정 업무를 보았습니다.nbspnbsp내일 스님은 정토회 제6차 전국대의원대회에 참석해 입재 법문을 해주실 예정입니다.nbsp nbsp

2015.08.22. 11,747 읽음 댓글 4개

2015.8.19 불심 도문 큰스님 친견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은사 스님이신 도문 큰스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드린 후 9월에 있을 통일의병대회 법문을 요청드렸습니다.nbspnbsp▲ 도문 큰스님이 머물고 계신 장수 죽립정사nbspnbsp새벽 5시, 서울 정토회관에서 공동체 대중들과 함께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한 스님은 기도 후 6시 30분에 장수 죽림정사로 출발했습니다.nbspnbsp죽림정사에 도착한 스님은 도문 큰스님을 찾아 뵙고 인사를 올린 후 이번 9월에 있을 통일의병대회에서 정토회 회원들을 위해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법문과 기도를 요청드렸습니다.nbspnbspnbsp큰스님은 법문 요청을 수락하신 후 큰스님의 스승의 스승인 용성조사님으로부터 지금의 큰스님에게 이르기까지의 법맥과 인연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nbspnbsp용성 조사님은 불교의 정법안장을 확립하신 수행자이시고, 기미년 3.1 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중 불교계 대표로서 이 운동의 막후기둥이셨고, 대한제국 부흥운동을 대한민국 수립운동으로 향도하셨으며 태극기를 독립운동의 깃발로 쓰도록 이끄셨고, 대한민국 국호를 제정하신 독립운동가로서 온 겨레의 육신보살이십니다. 그리고 용성조사님의 제자가 동헌 스님이시고, 동헌 스님의 제자가 도문 큰스님이며, 도문 큰스님의 제자가 법륜 스님입니다.nbspnbspnbsp정토회는 용성 조사님의 정법 안장의 법맥을 이어 이 땅에 불교를 널리 전하기 위한 다양한 포교활동을 하고 있으며, 또한 용성조사님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많은 활동들을 펼치고 있습니다.nbspnbspnbsp오늘은 큰스님으로부터 정토회 활동의 뿌리가 되는 그 연원에 대해 많은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큰스님 친견을 마치고 다시 서울로 올라온 스님은 집무실에서 그동안 명상수련, 동북아 역사기행 등으로 밀린 여러 가지 업무를 파악하고 결재하였습니다.nbspnbsp내일은 오전에 평화재단으로 찾아온 손님들과 미팅을 몇 차례 가진 후 문경으로 내려갈 예정입니다.nbsp

2015.08.20. 16,156 읽음 댓글 13개

2015.8.18 JTS 안산 다문화센터 개원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JTS 안산 다문화센터 개원식에 참석해 “다문화센터의 개원 취지와 앞으로의 역할”에 대해 법문했습니다.nbspnbsp어제밤 두북에서 주무신 스님은 새벽 5시에 두북을 출발하여 오전 9시 무렵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에 도착한 후 평화재단에서 연이어 미팅을 가진 후 목소리가 갈라지고 편두가 붓는 통증이 있어서 이비인후과에 들러 진료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단식 후 연이어 동북아 역사기행에서 과로를 했는데다가 입재식과 간담회에서 계속 법문을 하다보니 목에 무리가 간 것 같았습니다.nbspnbsp저녁 7시 30분부터는 JTS 안산 다문화센터 개원식에 참석했습니다. 안산시 단원구에 새롭게 자리잡은 JTS 다문화센터 입구에 들어서자 많은 봉사자들이 환한 웃음으로 반갑게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nbsp안산시 단원구에 위치한 JTS 다문화센터nbsp▲ 개원식에 참석해 방명록을 적고 있는 스님nbspnbsp개원식에는 인근 태국 절에서 스님 두 분이 오셨다가 가셨고, 스리랑카 공동체 대표인 닐락샤님, 조선족 분들 등과 안산 지역의 정토회 회원분들 170여명이 함께 자리해 발디딜 틈도 없이 빼곡이 자리를 메워주었습니다.nbspnbspnbsp삼귀의 반야심경을 봉독한 후 정토회 이기혜 대표님과 JTS 김기진 대표님의 인사 말씀이 있었습니다. 정토회 이기혜 대표님은 “지금 우리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노동자들이 170만명을 넘어섰고, 이렇게 많은 외국인들이 우리들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미처 몰랐다”고 하면서 “이런 시기에 안산 다문화센터가 개원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에 정말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축하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 인사 말씀을 하고 있는 정토회 이기혜 대표님nbspJTS 김기진 대표님은 “오늘 개원하기까지 많은 봉사자들과 후원회원들의 정성이 있었다”며 “JTS도 외국인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을 위해 최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nbspnbsp▲ 개원을 위해 정성을 모아준 회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있는 JTS 김기진 대표님nbsp다음은 개원 준비를 하신 정토회 인천경기서부 사무국장 송순애님의 경과보고와 회계보고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정성이 모여져 이렇게 정갈한 공간이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안산정토법당 회원들의 축하 공연이 있었습니다. 노래 ‘터’와 ‘행복의 나라’를 기타 반주에 맞춰 신나게 부르자 대중들도 기쁜 마음으로 박수를 치며 함께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마치 잔칫집 같은 분위기 속에서 개원식은 한껏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습니다.nbspnbsp▲ 안산정토법당 회원들의 축하 공연nbsp대중들은 스님께 청법가를 부르고 삼배를 하며 개원 법문을 청했습니다. 스님은 먼저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면서 법문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오늘 한국JTS가 안산 지역에 다문화센터를 개원하면서 ‘죄송합니다’라고 먼저 미안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또, 늦게나마 다문화센터를 개원하게 됨을 기뻐하며 축하를 드립니다. 왜 제가 다문화센터를 개원하는 날에 ‘죄송합니다’ 하는 말을 맨 먼저 드리냐 하면, 지금으로부터 꼭 20년 전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우리 나라에 와서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이해학 목사님이 계신 성남 주민교회 한 켠을 빌려 김해성 목사님이 처음으로 외국인노동자센터를 개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거기에 참석해서 종교를 떠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어려움을 함께 풀어나가자고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을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지키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왜 이렇게 되었냐면, 그렇게 약속을 하고 나서 한달도 지나지 않아서 중국 조선족 분들이 한국에 오려고 했다가 비자 정책이 바뀌면서 사기 피해자가 엄청나게 늘어났습니다. 중국에서는 조선족 사기 피해자 협회가 구성되고 자살하는 사람들도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사기 피해자를 돕기 위해서 중국을 오가게 되었고, 또 연이어 북한 주민들의 아사 소식을 듣게 되어서 굶주리는 북한 동포들을 돕기 위해 인도적 지원을 호소하고 국경을 넘어온 북한 난민들을 지원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23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거기에 지난 20년을 온통 집중을 하다가 국내에 나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10만명에서 170만명으로 늘어났고 임금을 못 받는 사람, 불법 체류, 의료 사고 등 여러 가지 인권 침해가 발생하면서 법률적인 지원과 쉼터 제공 등 여러 지원이 필요함에도 조그마한 도움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북한에 대한 인도적 지원과 인권 문제에 몰두해 있으면서도 이 부분이 늘 마음에 걸렸습니다.nbspnbsp그래서 한국에 공부하러 온 스리랑카, 미얀마, 태국 스님들에게 ‘JTS에서 사무실 한 칸을 내어줄 테니까 여러분들의 나라 국민들이니까 여러분들이 좀 이 일을 하셨으면 좋겠다. 우리 국민들도 북한에서 굶어 죽는다고 하기 때문에 제가 도저히 이 일을 할 형편이 못 됩니다’ 라고 말했어요. 그 분들은 그렇게 할 의향은 있었지만 대부분 한국에 공부하러 오셨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어요. 이렇게 해서 이 사업이 20년 동안 지체가 되었습니다.nbspnbsp또, 제가 스리랑카에 가면 스리랑카 스님들이 저에게 불평을 많이 해요. ‘스리랑카에 기독교가 들어와서 식민지 지배를 겪은지 3백년이 지나도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이 별로 없는데 어떻게 되었는지 한국만 갔다오면 다 기독교인이 되어서 오느냐. 도대체 한국이 어떤 나라이길래 이런 일이 벌어지느냐?’며 항의를 해요. 그러면 제가 할 말이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에 와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을 때 주로 개신교 사람들이 그 분들을 여러 가지로 많이 돕기 때문에 아마 종교까지도 바꾸게 된 것 아닌가’ 이렇게 얘기했더니 ‘그럼 불교는 뭐 하고 있느냐?’ 그래요. 그래서 ‘부끄럽지만 한국 불교는 빠른 속도로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 자기도 적응을 제대로 못해서 헐떡거리고 있어서 남을 도울 여력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미안하다. 그러니 당신들이 한국에 와서 당신들의 국민들을 좀 챙겨라’ 이렇게 변명 아닌 변명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nbsp오늘 스님은 20년 전에 한 약속을 이제서야 지킬 수 있게 되었다며 무척이나 미안한 마음을 내비쳤지만 ‘먼저 간 자 나중 가고, 나중 간 자 먼저 간다’는 성경 구절처럼 비록 시작은 늦었지만 그동안 쌓아온 JTS의 튼튼한 신뢰의 기반 위에서 앞으로는 더욱 의미있는 활동들을 많이 해나갈 수 있을 것이란 기대감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JTS의 창립 취지를 이야기하면서 그 연결선 상에서 오늘의 다문화센터를 개원하게 되었음을 상기시켜 주었습니다. nbspnbsp“JTS를 창립할 때 인도의 불가촉천민 아이들을 보면서 사람으로 태어나서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는데 나라, 민족, 인종, 계급, 종교 이런 것들을 따져서 도와주지 않는다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은 누구나 다 먹어야 합니다. 아픈 사람은 치료 받아야 합니다. 거기에는 어떤 차별을 해서도 안 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도 못 다니고 글자도 모르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셈본은 할 줄 알아야 하고 글자는 읽고 쓸 줄 알아야 되지 않느냐. 그래서 아이들은 제 때에 배워야 합니다.nbspnbspnbsp이 세가지는 우리 인류가 공동으로 책임을 져야지 우리나라 사람이 아니니까 기독교인이니까 무슬림이니까 이런 이유로 배제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대한민국에 태어났다고 한국 문제에만 늘 빠져있었는데 이제 우리 나라 문제에만 빠져있어서는 안 되고 인류로서의 책임을 지고 도움을 받는 존재에서 도움을 주는 존재로 전환해야 하지 않느냐. 이런 생각으로 지금으로부터 23년 전에 JTS를 창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에서 활동을 해오고 있습니다.”nbspnbsp그리고 외국인노동자센터라고 하지 않고 다문화센터라고 이름을 붙이 이유를 설명하면서 다문화센터가 한국 사회에서 해나가야 할 역할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외국인노동자센터라고 하지 않고 다문화센터라고 한 것은 외국에서 태어나 한국에 이주해 와서 사회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크게 네 종류이기 때문입니다. 첫째, 외국인노동자입니다. 가장 숫자가 많고 실제로 가장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합법적으로 들어와 있는 분들도 있고 불법 체류를 하고 있는 분들도 있습니다. 특히 불법 체류하시는 분들은 법적으로는 문제의 소지가 있지만 인권적으로는 가장 열악한 상황에 처해 있습니다.nbspnbspnbsp둘째, 한국의 농촌 남성들과 결혼하기 위해 이주해온 외국인 여성들입니다. 한국이 잘 산다는 것만 생각하고 결혼해서 왔는데 와보니까 결혼 상대자가 한국 안에서는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잖아요. 그래서 실망도 크고 말이 안 통하니까 결혼 생활도 어려워서 정신적으로 굉장한 고통을 겪습니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이 학교에 가면 놀림도 당하게 되면서 많은 문제를 야기합니다.nbspnbsp셋째, 중국에서 온 조선족입니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사람이 한 60만명 정도 된다고 해요. 이분들은 한국말도 할 줄 알고 민족적으로도 한국 사람이니까 외국인노동자들 보다는 훨씬 월급도 많고 적응도 쉽지만 그래도 국적이 중국이다보니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비자 문제도 있었고 나름대로 차별을 받는다고 느끼는 부분들이 많습니다.nbspnbsp넷째, 북한을 이탈해서 한국에 정착한 사람들입니다. 지금 3만 5천명 정도 되는데 이 분들은 한국 국적을 바로 취득할 수 있고 정착금까지 지원받는 등 최고의 혜택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워낙 서로 다른 체제 속에서 살았다 보니까 여기 와서 적응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nbspnbsp이렇게 이주민은 크게 네 종류가 있습니다. 낯설고 물설은 곳에 와서 적응해서 살기 위해서는 갖가지 애로점이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태어나서 살았기 때문에 우리가 별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도 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어려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이야기인데 그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상처가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nbspnbspnbsp이를 막기 위해서는 어릴 때부터 다문화 사회를 이해하는 교육을 시켜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남을 차별해서 생기는 피해는 오히려 적고, 몰라서 자기 식대로 행동하는데 실제로 상대에게는 엄청난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 사람도 해외에 나가서 사는 사람들이 지금 700만명인데, 이 700만명의 역사를 보면 정말 피눈물이 나는 고통의 역사입니다. 이런 고통을 겪었으면 이제 우리도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사는 이주민들에 대한 포용이 더 나아져야 하는데 거꾸로 더 못합니다. 외국인들에게 물어보면 제일 살기 힘든 나라가 한국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단일 민족이여서 다른 민족이나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과 같이 살아본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르고 그냥 하는 행동인데 상대는 굉장히 상처를 받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우리 사회에 들어와 있는 동남아시아의 제 국가의 제 민족들에게 많은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또 이 분들은 불교 신자가 많은데 현실적으로 도움은 기독교에서 받아야 해서 종교도 바꾸게 되고, 고향으로 다시 돌아가면 종교 때문에 또 전통 사회와 충돌을 겪어야 합니다. 즉 현실적인 도움을 받기 위해서 기독교로 개종하면 또 정신적인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nbspnbsp이 사람들을 불쌍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분들은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예요. 다 그 나라에서는 똑똑한 사람들이예요. 불쌍하다는 것이 핵심이 아니고 그들이 가진 정당한 권리를 갖고 살아갈 수 있도록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이 핵심입니다. 피부 색깔이 다르다고 왜 차별을 받아야 하고, 나라가 다르다고 왜 차별을 받아야 합니까. 그래서 첫째, 도와주기에 앞서 우선 차별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둘째, 적응하는데 어려움을 겪으니까 서로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말을 잘 모르면 말을 가르쳐주고, 문화를 잘 모르면 문화를 가르쳐주고, 또 외국인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법률적 도움을 받기기 힘들기 때문에 법률적인 상담을 받을 수 있게 도움을 준다든지, 의료보험 혜택을 못 받으니까 진료비가 비싸서 치료를 제 때에 안 받는 것을 도와준다든지 등 이런 일들을 해나간다면 그 분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큰 병을 고쳐주라는 얘기가 아니라 작게라도 우리가 할 수 있들을 많이 있습니다. 만약 불교 신자들이라면 이런 공간을 빌려줘서 한국 불교를 가르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전통 방식으로 법회를 할 수 있게 해주고, 꼭 불교 신자만이 아니라 힌두교나 무슬림들을 위해서도 이런 공간을 마련해준다면 작은 도움이 됩니다. 이렇게 자기 전통을 지켜나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은 우리는 큰 힘이 들지 않지만 그 사람들에게는 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nbspnbsp자신들의 고국에서 큰 스님이 온다고 하면 JTS 다문화센터 이름을 강당 대여도 해줄 수 있을 것이고요. 정신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상담도 해주고, 한국말과 문화도 배울 수 있게 해주고, 스리랑카의 날이나 미얀마의 날 같은 것도 마련해서 자기들끼리 전통 문화를 즐길 수 있게 지원도 해주고, 그렇게 이 땅에 와서 사시는 분들의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덜어주는 일을 우리가 작게라도 시작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안산에서 이 일을 먼저 시작하는 이유는 앞으로 한 30년이 지나면 인구의 10가 외국인 거주자가 된다고 해요. 그렇게 되면 사회적으로 굉장히 많은 문제가 나타납니다. 특히 외국인 여성들이 결혼해서 낳은 아이들에 대한 차별은 굉장한 사회 문제를 야기합니다. 그런데 안산 지역은 이미 외국인 거주자가 인구의 10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안산 지역에서 나타나는 문제는 앞으로 10년, 20년 후에 한국 사회 전체가 직면해야 할 문제의 샘플이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작은 첫발을 우리가 내딛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가 작지만 도움이 된다고 한다면 안산 지역에서 더욱더 확대해 나갈 수도 있고, 창원 공단이나 지방의 중소 공단과 농촌 지역으로도 확대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늦었지만 소박하게 출발해보고자 하니까 여러분들께서 관심을 갖고 참여를 해주면 좋겠습니다. 재정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자원봉사자가 많이 필요합니다. 다들 살기 바쁘시겠지만 시간을 내어서 봉사를 많이 해주십시오.”nbsp이주민 여성들이 낳은 자녀들이 받는 차별은 나중에 굉장한 사회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는 말씀에 많은 대중들이 안타까워하며 탄성을 터뜨렸습니다. 그리고 스님의 법문을 통해 우리 주위에 소외받는 이웃들이 이렇게 많이 있었음을 새삼 깨닫게 되자 자신의 안위 만을 생각해 온 우리들의 모습에 많은 반성이 일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안산 다문화센터 원장으로 취임한 월광 법사님을 소개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월광 법사님이 이 다문화센터 운영에는 가장 적격인 것 같아요. 월광 법사님은 아무 하고나 잘 지냅니다. 노숙자들과도 잘 지내고, 경찰들과도 잘 지내고, 군인들과도 잘 지내고, 외국인들과도 잘 지내거든요. nbspnbsp처음 만나도 오랜 만난 친구처럼 잘 해주시기 때문에 가장 적격이신 것 같아요. 그래서 월광 법사님이 다문화센터 원장님으로 임명이 되었습니다. 박수 부탁드립니다.”nbspnbsp대중들은 다문화센터 원장으로 월광 법사님이 적격이라는 사실에 크게 웃으며 전적으로 공감하며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 월광 법사님은 대중들의 환호에 응답하며 간단한 인사 말씀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JTS 안산 다문화센터 원장 월광 법사님nbsp“인도 어린이들과 북한 동포들을 돕는 스님을 통해서 저보다 훨씬 더 어렵고 힘든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때부터 구걸하는 마음을 버리고 돕는 마음으로 전환했던 것이 여기까지 오게 된 것 같습니다. 안산 지역을 행복이 피어나는 동네로 만들어보고 싶어요. 정말 많은 분들의 도움과 정성으로 이 공간이 마련되었습니다. 희망과 자신감을 갖고 오늘 출발합니다. 고맙습니다.”nbsp다시 큰 박수가 이어지면서 개원식장은 훈훈한 열기가 감돌았습니다. 이어서 스리랑카 공동체 닐락샤 대표님이 외국인들 대표해서 다문화센터의 개원을 축하하는 인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nbspnbspnbsp“외국인노동자들을 돕는 센터들은 많이 있지만 정말로 외국인노동자들이 자신의 힘든 점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센터는 보기 힘든 것 같아요. JTS 다문화센터는 다른 센터에서 하지 못하는 일들을 하면 좋겠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지금 많은 외국인노동자들이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을 때 3개월간 구직 기간이 있는데 이 때 쉬어갈 수 있는 쉼터가 안산 지역에 없는 것 같아요.nbspnbsp그리고 저는 불교 신자인데 불교에서 만든 센터는 오늘 처음 보았습니다. 모두 교회에서 운영하는 것들인데 제가 가진 종교에서 이런 센터를 운영한다고 하니까 너무 반가워요. 저는 스리랑카에서 태어남과 동시에 불교를 갖게 되었거든요. 한국이 불교 나라라고 알고 있었는데 막상 와보니 불자들을 만날 수 없었어요. 그런데 오늘 이렇게 많은 불교인들이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nbspnbsp한국 사회에서 저같은 외국인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이렇게 많다는 것에 너무나 감사한 마음을 느낍니다. 저도 작은 역할을 하겠습니다.”nbsp다른 외국인노동자센터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해달라는 부탁에 JTS 봉사자들도 공감을 표현하며 명심을 하였습니다. 무엇보다 불교에서 만든 센터는 오늘 처음 보았다는 닐락샤님의 이야기는 오늘 개원식의 의미를 더욱 뜻깊게 여기도록 해주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스리랑카 닐락샤 대표님의 제안에 대해 감사를 표하면서 “조금 더 실태 조사를 해보고 차근차근 시작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라고 답해 주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태국에서 오신 분도 휠체어에 앉은 채 환하게 웃으며 “감사하다”고 기쁜 마음을 표현하였고, 도문이 고향인 조선족 분도 자리에서 일어나 기쁜 마음을 표현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우리도 의지할 곳이 생겼다는 것이 너무나 좋습니다. 저희 동포 하나가 4개월 동안 월급을 못 받고 있지만 어디서 하소연 할 곳이 없었는데 오늘 다문화센터가 생기니까 우리도 도움을 받을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저도 도움을 줄 일이 있으면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nbsp다문화센터를 보고 희망이 생겼다는 말씀에 개원식장은 감동의 물결로 출렁였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개원식을 축하하기 위해 와 준 대중들을 위해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아이가 공부에 흥미가 없는 것 같아 오히려 사회적인 활동을 많이 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어머님의 질문과 회사를 그만두고 쉬고 있는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묻는 남성 분의 질문, 이렇게 두 명의 질문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각각에 대해 명쾌한 답변을 들려주며 우리가 어떻게 행복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지 소중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nbspnbsp▲ 즉문즉설 시간nbsp마지막의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케익 켓팅식을 가졌습니다. 대중들이 축하 노래를 부르자 내외빈들이 앞으로 나와 컷팅식을 가졌습니다.nbspnbsp“개원 축하합니다 ♬ 개원 축하 합니다 ♬ 다문화센터의 개원 축하합니다”nbspnbsp▲ 케익 컷팅식nbsp대중들의 열띤 합창 속에서 드디어 외국인노동자들과 이주민들을 돕기 위한 JTS의 활동이 첫발을 내딛었습니다. 큰 박수가 쏟아지고 잔잔한 기쁨이 일었습니다. 우리 사회에 소외받는 이웃들이 없기를 간절히 소망해 보고, 내가 작은 역할이라도 해보기를 다짐해 봅니다.nbspnbsp▲ 다과 시간nbsp이어서 다과 시간이 이어졌고, 대중들이 정겹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내외빈들은 현수막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nbspJTS 안산 다문화센터는 매주 일요일 오전 11시부터 1시까지 외국인노동자들과 이주민 여성들을 위한 한국어 교실을 운영합니다. 그리고 센터 운영을 위한 봉사자들이 많이 필요합니다. 변호사, 의사, 노무사, 한국어 교사, 공양, 당직, 센터 관리에 관심 있는 분들의 재능 기부를 기다립니다. nbsp행사장을 나온 스님은 밤 10시 30분이 다 돼서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장수 죽림정사로 가서 도문 큰스님을 찾아뵐 예정입니다.nbspnbsp 법륜 스님이 안내하는 마음공부 불교에 대한 종합적이고 체계적인 이해, 가슴으로 다가오는 쉽고 명쾌한 강의 정토불교대학이 전국 114개 지역과 해외 33개 지역에서 개강합니다.nbsp nbsp nbsp 내 삶을 변화시키는 법륜 스님의 명강의를 지금 만나보세요.nbsp

2015.08.19. 39,348 읽음 댓글 35개

2015.8.17 공동체·대중부 간담회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두북 정토수련원에서 정토회 공동체와 대중부와 함께 모임을 하며 정토회의 사업 방향에 대해 법문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새벽 5시, 스님은 전국에서 모인 70여명의 자원활동가들과 함께 새벽 예불과 천일결사 기도를 하며 하루를 시작했습니다. 기도 후 따뜻한 국과 반찬으로 아침 식사를 한 후 7시 30분부터 간담회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먼저 오늘 간담회를 갖게 된 취지에 대해서 스님이 공유를 해주었습니다. 1년에 두 번 1박2일 동안의 전국대의원회의를 통해서는 정토회의 전체 사업을 꼼꼼하게 챙기기가 어렵고, 또 모든 사업이 통합적으로 이루어지기 보다는 대중부, 공동체, 사회활동위원회가 각각 돌아가고 있는 상황이여서 통합적인 기능이 보완되기 전까지 우선 세 단위가 모여서 함께 의견 교환을 하는 자리라도 가져보기 위해 오늘 간담회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nbspnbsp집중적인 토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정토회의 설립 취지와 창립 목적’에 대해 스님이 기조 발제를 해주었습니다. 공동체와 대중부 활동가들은 정토회가 어떤 취지로 창립이 되었는지 다시 한번 새겨들을 수 있어서 무척 뜻깊은 시간이 되었습니다.nbspnbsp“정토회가 창립된 목표는 인류의 새로운 문명 전환을 선도해보자는 것입니다. 문명 전환의 가장 핵심적인 기초는 근본 불교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의 근대 문명이 갖는 문제는 지구 전체적으로 보면 환경 파괴가 가장 크고, 인간 사회를 보면 공동체가 붕괴되고 있다는 것이고, 개인으로 보면 인간성이 상실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 이 세가지를 되살릴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의 해답을 붓다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이것은 1차 만일결사든, 2차 만일결사든, 3차 만일결사든 할 것 없이 정토회의 설립 목표입니다.nbspnbspnbsp그 가운데서 1차 만일결사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불교 중흥이고, 다른 하나는 민족 중흥입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 나라 안의 이야기에 해당합니다. 새로운 문명을 향도하기 위해서 불교의 근본 가르침에 입각해서 해법을 찾아보려고 하는 것이 정토회의 근본 설립 취지이기 때문에 1차 만일결사에서 하고자 하는 불교 중흥은 불교 신도 수가 늘어나고 절이 많이 생기고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앞으로 문명 전환을 할 수 있는 근본 불교적 입장에서 수행 정진하는 불교를 현실 속에서 재현해보자는 것입니다. 그럼 어느 정도까지 되면 우리가 이 땅에 불교를 다시 중흥시키는 기초를 닦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대한민국 인구의 1 정도가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약 50만명 정도가 될 것입니다. 즉 수행을 해서 자기를 행복하게 하는 모임을 마을마다 만들자는 것입니다. 1 정도만 되어도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큰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nbspnbsp‘바른 불교’가 근본 불교를 의미한다면, ‘쉬운 불교’는 누구나 일상적인 용어로 쉽게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것이고, ‘생활 불교’는 일상 생활이 수행이 되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가지 관점에서 근본 불교를 현실에 재현해보자는 것이 우리들의 원입니다.nbspnbsp그리고 다른 하나의 원이 민족 중흥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한반도가 남북으로 갈라져 갈등하고 있고, 이미 전쟁을 치뤘고, 다시 전쟁을 치룰 위험이 있으니까, 이 땅에 어떤 이유로도 다시는 전쟁을 용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것을 잿더미로 만들 수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발전하려면 통일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국제 정세의 조건 속에서도 통일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비전이 없고, 지금 우리 경제가 처한 현실을 봐도 통일 없이는 더 이상의 성장이 불가능합니다.nbspnbsp그러면 왜 지금 시기에 통일이 다가왔다고 강조하느냐? 20년 전, 10년 전에 통일을 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 때는 통일을 안 하고도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통일을 하지 않으면 전쟁이 일어날 위협도 높아졌고, 경제도 정체와 후퇴 국면으로 갈 위험이 생기면서 통일은 이제 우리의 생존이 걸린 문제로 다가왔습니다. 예전에는 통일이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문제였다면, 지금은 통일을 안 하면 안 되는 문제가 되었기 때문에 이제 통일의 시기가 가까워졌다는 것입니다. 아직은 국민들이 통일에 대한 관심이 작지만 점점 절박해지면 통일이 일순간에 시대적 과제로 등장하게 됩니다. 밤이 깊어지면 새벽이 가까워지는 것처럼 통일은 지금 오히려 더 가까워져 있는지 모릅니다. 또한 일제 시대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지만 분단이라는 미완의 독립을 완성시키는 것이 통일입니다. 이렇게 민족 중흥의 의미는 바로 평화와 통일입니다.nbspnbsp물론 대부분의 정토행자들이 수행을 하려고 정토회에 왔기 때문에 ‘엉뚱하게 웬 통일 이야기냐?’ 할지 모르지만 정토회의 설립 취지의 두 가지 축 중에 하나가 통일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지금 통일을 강력하게 추진할 정부가 들어서지 않으면 통일은 더 어려워집니다. 우선 미국과 중국이 세력 변화를 일으키면서 새로운 판이 짜여져 가고 있는데 그 판이 점점 굳어져 가고 있습니다. 강대국 간의 세력 판이 짜여져 버리면 우리가 그 판을 변화시키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판이 어떻게 짜여질지 불확실한 상태에서 조금씩 조금씩 판이 짜여져 가고 있는 중입니다. 즉 미국은 동아시아에 있어서 일본을 가장 중요한 파트너로 이미 선정을 했고, 한국은 그 밑으로 넣는 것으로 입장을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이 한미일 군사동맹체제에 들어가게 되면 중국과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어려워집니다. 안보는 미국의 보호를 받는 장점이 있는 반면에 중국의 공격 포인트가 되는 위험이 동시에 따르게 됩니다.nbspnbsp그리고 북한이 점점 고립이 되고 있고 아직은 저렇게 자주성을 갖고 버티고 있으니까 통일의 기회가 있는데, 만약 민족주의적인 정권이 무너지고 친중적인 정권이 드러서면 통일의 기회를 잃게 됩니다. 그러면 북한의 안보가 중국의 보호 하에 들어가면서 북한 정부의 정책이 개혁 개방으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아지겠지만 그러나 통일은 물건너 가게 됩니다.nbspnbsp그럼 평화 문제는 어떻게 될까요? 미중이 첨예하게 경쟁하게 되면 그것의 실제적인 부딪힘은 결국 한반도에서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때보다 전쟁의 위험이 높아집니다. 이렇게 되면 한국은 안보도 위태롭고 경제로 어려운 지경이 되고, 우리의 배후인 일본과 미국은 지금은 가장 큰 세력이지만 점점 지는 해에 속하기 때문에 결국 앞으로 더 큰 어려움에 부딪히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판이 짜여지면 통일의 희망이 없어지게 됩니다. nbspnbsp그런 의미에서 한번 더 통일의 기회를 잡아보자는 것입니다. 정토회의 발전도 좋지만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우리가 한번 미약하지만 작은 힘이라도 보태보자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힘만으로는 안 되겠죠. 다른 종교나 다른 사회 단체들과 협력을 해서 만들어 가야겠죠.”nbspnbsp스님이 그려주시는 큰 그림을 들으며 활동가들은 큰 박수로 공감을 표현했습니다. 무엇보다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이루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자 하지만 지금 현실은 녹록치 않아서 마음이 조금 무거워지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기회를 만들어보자는 스님의 간곡한 호소에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의 기조 발제를 토대로 이어서 활동가들이 함께 토론해보고 싶은 내용들을 자유롭게 발표하였습니다. 오전에는 크게 4가지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토론이 전개되었습니다.nbspnbspnbsp봉사할 수 있는 인력풀은 많지만 봉사 인력을 전문적으로 개발해내는 부서와 전담자가 없는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유튜브에 즉문즉설이 올라가는 것과 수행법회에 대중들이 안 오게 되는 문제 사이에서 종합적인 컨텐츠 관리 방안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힘들어 하는 내부 활동가들을 우선적으로 상담해주는 시스템 마련의 필요성, 불교대학 학생들을 관리할 때 원칙은 있되 유연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서 활동가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고 스님은 이를 경청하고 이에 대한 스님의 지혜를 들려주었습니다. nbspnbspnbsp오후에도 다양한 주제에 대해 집중적인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평화와 통일을 위한 1000일 기도를 가을부터 시작하게 되는데 각 지역 법당에서는 이것을 어떻게 진행할지, 감사 기능은 강화하지만 행정 절차는 간소화하는 방안의 필요성, 중앙에서 지역으로 권한을 내려주는 방안 등에 대해서 토론이 있었고, 스님께서도 많은 조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집중 토론을 마치고 나서는 오늘 제기된 문제들을 포함해 인력 양성, 불교대학 운영 등에 대해 더욱더 전문적인 의견을 수렴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새로운 팀을 구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오늘 논의된 것을 각 파트별로 더욱 세부 계획을 세워서 전국 대의원회에서 사업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도록 하면 좋겠다”고 당부하였고, 사홍서원을 끝으로 오후 2시 30분 무렵 오늘 모임을 모두 마쳤습니다. nbspnbspnbsp활동가들은 각자 집으로 돌아갔고, 행정처 임원들과 대구경북지부 임원들은 스님과 함께 오는 9월에 있을 제1차 통일의병대회 답사를 위해 경주 지역 일대를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먼저 입재식이 열릴 황룡사터에 가서 설법단을 어디에 놓을지, 대중들은 어느 방향으로 어디에 앉히게 할지, 참가자 모두가 앉을 수 있는지, 현수막은 어디에 걸지 등 실무적으로 점검해야 할 것들을 꼼꼼히 체크하였습니다.nbspnbspnbsp▲ 황룡사터nbspnbsp그리고 능지탑과 선덕여왕릉, 사천왕사지를 걸으며 중간에 간식 먹는 시간을 어디서 주고, 특히 사천왕사지에서 기도를 할 때는 어느 곳에 앉아서 하는 것이 좋을지를 점검했습니다.nbspnbsp▲ 선덕여왕릉 가는 길nbsp▲ 사천왕사지nbsp이어서 회향식이 열리는 통일암으로 가서 설법단을 어디에 놓을지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어떻게 땅을 고를 것인지, 화장실 사용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등에 대해 체크했습니다.nbspnbsp▲ 통일암nbsp행정처와 대구경북지부 임원들은 직접 답사를 하면서 혹시나 발생할지 모를 우려 사항을 꼼꼼히 체크하는 스님의 모습을 보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특히 많은 대중이 이동할 때는 어떻게 하면 효과적인지 스님이 제안한 아이디어를 듣고 감탄을 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답사는 3시간 동안 계속되었고, 스님은 무더위 속에서 오후 내내 답사를 하면서 허기가 진 행정처와 대구경북지부 임원들에게 칼국수를 사준 후 두북으로 돌아왔습니다.nbsp내일은 두북에서 서울로 올라가 오전부터 평화재단에 찾아온 손님들과 연이어 미팅을 갖고, 저녁 7시 30분에는 안산 JTS 다문화센터 개원식에 참여해 격려 말씀과 더불어 다문화센터의 역할에 대해 법문을 해주실 예정입니다.nbsp

2015.08.18. 26,694 읽음 댓글 31개

2015.8.16 8차 천일결사 6차 백일기도 입재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은 맑은 마음, 좋은 벗, 깨끗한 땅을 실현하고자 큰 서원을 세우고 시작한 만일결사 중 제8차 천일결사 5차 백일기도 회향식 및 6차 백일기도 입재식이 있는 날입니다. 스님은 입재식에 참가한 대중들을 위해 새로운 백일을 맞이하는 마음 자세에 대해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입추가 지나 더위가 한 풀 꺾인 가운데 전국 각지에서 모인 정토행자들이 알알이 여무는 곡식처럼 김천 실내체육관을 가득 채웠습니다.nbspnbspnbsp회향식은 예불과 반야심경에 이어서 사회자 김병조님과 힘찬 파이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정토회 대표 이기혜님의 인사 후 호주와 뉴욕에서 오신 행자님과 전국 각 지역 정토회 및 청년대학생, 교사정토회, 길벗, 공동체, 상근 및 자원활동가 등 총 4,001명의 소개와 인사가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일어나 환하게 웃으시며 따뜻한 눈길로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nbsp다음은 백일출가 25기생들의 합창 공연이 있었습니다. ‘슈퍼스타’와 ‘여름’ 노래를 따라 부르며 모두 즐거웠습니다. 밝은 표정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준 백일출가생들에게 환호와 힘찬 박수를 보냈습니다. 백가지 기교보다 한 가지 순수함이 더 낫다는 말이 와 닿는 무대였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백일간의 발자취’ 영상을 통해 통일 역사기행, 부처님 오신 날, 명상수련 및 바라지, 불교대학경전반 졸업식 및 수계식, 불사 신규 법당 소개, 통일 의병학교, 희망세상만들기 즉문즉설 강연 등 수행, 보시, 봉사로 백일을 채워온 정토행자들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백일 동안의 활동 모습을 모아보니 시간을 정말 알차게 보냈다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고 뿌듯한 마음이었습니다.nbspnbspnbsp그 후 85차 실천과제 발표가 있었는데, 법당 과제인 ‘총3회 이상 모둠 법회 열기’는 62가 달성했고, 개인과제 ‘통일 활동 3회 이상 참여하기’는 25가 달성하여 개개인의 과제는 아직 달성률이 낮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정토세상 만들기를 위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수행 정진해 오신 분들의 수행담을 들어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세 분의 발표가 있었는데 정토회 행사에 처음 참석했을 때의 느낌에 공감하며 웃기도 하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꿋꿋하게 정진해가고 있다는데 모두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내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3,000배 정진은 불가능 할 것 같았지만 절하다 죽는 사람 못 봤다는 말씀은 진리였습니다. 무릎 통증이 거짓말처럼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이 실상보다 더 큰 통증으로 다가온 것 같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육체적 통증에 대한 두려움은 사라졌으나 불대 담당을 맡으면서 예상보다 많은 인원이 입학해 심리적 불안감이 증폭되었습니다.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 이대로는 안되겠다 싶어 법당에서 새벽 정진을 결심하였습니다. 법당 새벽정진의 백일 서원이 이루어지던 날 눈물이 펑펑 쏟아지며 그냥 하면 된다는 스님 말씀이 온 몸과 마음으로 체득되었습니다. ‘노력은 적게 하면서 얻는 것은 많기를 바랐으니 잘 될 턱이 없었구나’, ‘불대 봉사를 한다고 했는데 내가 오히려 배우겠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잘하겠다는 부담이 줄었습니다. 법당 새벽 정진을 시작한지 1년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불대생들을 귀한 인연으로 여기고 불법 깨닫고 끝까지 배우도록 도와주겠다는 굳건한 원이 생겼습니다.” nbsp nbsp여수정토회 이미순님nbspnbsp“인터넷에서 스님 즉문즉설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서점에서 ‘답답하면 물어라’는 책을 보고 법당에 찾아갔습니다. 천일결사 입재식에 같이 가자고 했지만 진짜 가기 싫었습니다. 워낙 간곡한 말씀에 참석은 했지만 이건 더 가관이었습니다. 넓은 체육관에 뭔가 상기된 표정의 사람들. ‘이건 사이비다’ 싶었지만 나만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된다 생각했습니다. nbsp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나보자. 사람들이 왜 열심이지? 이건 뭐지? 스님께서 ‘백일을 기도하면 내 꼬라지를 볼 수 있다. 천일기도 하면 스스로를 바꿀 수 있고 운명도 바꿀 수 있다’ 하셨는데 그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아 기도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열심히 기도를 하다 보니 5시를 기다리다 어떤 때는 3시부터 잠이 오지 않아 밤을 샌 적도 있습니다. nbspnbsp천일 기도가 끝났지만 저는 하나도 안 변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은 제가 변했다고 합니다. 여전히 아이들은 만나보지 못하고 있고 상황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나 자신을 예전처럼 괴롭히지는 않습니다. 천천히 끊임없이 정진하겠습니다.”nbsp 대전정토회 김태우님nbspnbsp“스물한살 때 야간 대학에서 강직성 척추염을 앓는 남편을 만났습니다. 난치성 질환자이지만 그가 좋아 가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살다보니 모든 것을 남편 탓으로 돌리고 속으로 무시하고 ‘몰라’ 하는 대답을 자주 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법당에 못나가다가 출가열반재일을 맞이해 8일간 용맹 정진 중 ‘내가 참 많은 은혜 속에서 살고 있구나, 나누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집에서 5개월 동안 열린 법회 후 바쁜 생활 속에서도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정토회 활동을 열심히 하였습니다.nbspnbsp그러던 중 큰 아들은 서울대학교에 입학하고, 너무나 건강하고 독립적이던 둘째 아들이 작년 12월에 하늘 나라로 떠났습니다. 18세 나이였습니다. 일요일 저녁 머리가 너무 아프다는 아이를 데리고 병원 응급실에 갔더니 뇌출혈이었고 수술했으나 3일째 뇌사 상태였습니다.nbspnbsp눈물만 났습니다. 남편은 귀하고 예쁜 아이를 그냥 보낼 수 없다고 했고, 그래도 정신을 차려야 했습니다. 이대로 정신을 놓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겠다는 생각에 사후 장기 기증 서약을 했습니다. 워낙 건강했던 아이는 여섯 명에게 새 생명을 선사하고 떠났습니다. nbspnbsp아이를 보내고 열흘 뒤부터 49재 동안 사시예불 집전을 했습니다. 눈물이 나면 울면서 염불 집전을 했습니다. 아이는 아빠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습니다. 형이랑 비교하지 않아서... 자기는 정말 행복한 집에서 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아이의 제사 비용을 모두 기부하고 집에서 제사를 지냅니다.nbsp어느새 제 입에서 ‘몰라’라는 말 대신 ‘예, 알겠습니다’ 는 말이 나옵니다. 남편을 미워한다는 말 대신 고마워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 한마디 바뀌는데도 수행해서 3년이 걸리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행에 욕심 부리지 않고 서두르지 않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괴롭지 않고 행복하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그냥 일일 뿐, 그것을 복으로 만들지 재앙으로 만들지는 나의 몫입니다. 저는 삶이 수행임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제 남편을 가장 존경합니다.”nbsp 창원정토회 이숙미님nbsp하늘 나라로 간 아이 이야기에 많은 대중들의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마지막에 남편을 죽도록 미워했으나 지금은 남편을 가장 존경하는 말에는 울컥 눈물이 나왔습니다. 기적이 있다면 이런 것이 기적이겠지요.nbspnbspnbsp감동적인 수행담을 들으며 어쩐지 마음 한 구석이 뜨끈해지더니 ‘지난 백일을 나만 혼자 넘어지고 깨진 것은 아니구나’ 싶어지면서 ‘내 고민은 저 분들에 비하면 가벼운 고민이였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nbspnbsp수행담의 깊은 울림을 느끼며 입정 후 법륜스님 백일기도 회향 법문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천일결사자들에게 왕의 제자인지 부처님의 제자인지 되물으며 무엇이 수행자인지를 상기시켜 준 후 왜 우리가 백일 마다 이렇게 모임을 갖는지 그 취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우리가 아무리 돈을 많이 모아도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아무리 얼굴이 잘 생겨도 아무리 능력이 있어도 나보다 더 돈이 많은 사람 더 지위가 높은 사람 더 잘 생긴 사람 더 능력있는 사람과 같이 있게 되면 우리는 열등의식과 빈곤의식을 갖게 됩니다. 그러니 이 열등의식과 빈곤의식은 능력을 키운다고 돈을 더 번다고 지위가 더 높아진다고 성형을 한다고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비교하느냐에 따라서 생겨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항상 돈을 더 벌면 해결될 것이다, 더 승진하면 해결될 것이다, 기술을 더 익히면 해결될 것이다, 코만 성형하면 해결될 것이다, 눈만 동그랗게 하면 해결될 것이다, 가슴에 뭘 짚어 넣으면 해결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가는데 그렇게 하면 이 문제는 죽을 때까지 해결될 수가 없습니다.nbspnbsp그래서 인간의 고뇌는 나이가 든다고 해결되어지지 않고, 돈이 많아진다고 해결되어지지 않고,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결되어지지 않습니다. 옛말에 이런 말이 있어요. 논을 99마지기 가진 사람과 1마지기 가진 사람이 만났을 때 99마지기 가진 사람이 1마지기 가진 사람에게 1마지기을 자기에게 달라고 한다고 하잖아요. 그 이유는 100마지기를 채우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기에는 인물이 잘났거나 지위가 높거나 돈이 많은 사람이 행복해 보입니다. ‘저 사람은 무슨 걱정이 있을까’ 이렇게 생각이 드는데 정작 그 사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 사람은 그 사람 나름대로 온갖 고뇌를 가지고 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300여개 나라 중에 가장 큰 나라인 마가다국의 왕은 누가 보기에도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인생이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늘 부처님을 찾아와서 인생 고민을 하소연하고 법문을 듣고서야 마음의 안정을 찾고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많은 것을 갖고 있는 왕은 부처님께 아무것도 해줄 것이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부처님이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괴로우면 스스로 부처님을 찾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을 가진 왕은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아무것도 갖지 않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밥을 얻어 먹고 나무 밑에서 자는 부처님은 아무런 괴로움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왕이 부처님을 도와주어야 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부처님이 왕을 늘 도와주었습니다. 고민이 있어서 찾아오면 어리석음을 깨우쳐주고, 욕심을 부리면 욕심을 내려놓게 하고, 자기 생각을 고집하면 아집을 내려놓게 하고, 때로는 위로도 해주고, 때로는 깨우쳐 주었습니다.nbspnbsp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입니까? 아니면 왕의 제자입니까?nbspnbsp만약 여러분들이 ‘돈을 더 많이 벌면 행복할 수 있다’, ‘출세하면 행복할 수 있다’, ‘이뻐지면 행복할 수 있다’, ‘아이가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행복할 수 있다’ 이런 생각들을 한다면 그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고 왕의 제자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것들이 우리들을 진정한 자유와 행복으로 이끌지 않는다고 자각하시고 왕위를 버리시고 모든 재물을 버리시고 잘못된 행복관을 버리시고 새로운 길을 찾아 온갖 시행착오를 거듭하며 정진을 하시다가 마침내 중도를 발견하시고 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이루셨습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이루신 후에도 45년 평생을 분소의를 입으시고 맨발로 걸으시고 나무 밑에서 잠자고 남의 집에서 얻어 먹는 등 거지와 다름 없는 삶을 사셨습니다.nbspnbsp그러니 물질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물질만으로 행복해질 수가 없고, 지위를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지위만으로 행복해 질 수가 없고, 몸뚱이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몸뚱이를 만족시킨다고 행복해질 수가 없고, 인기를 누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인기가 행복의 근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진정으로 자유롭고 행복하고 싶다면 여기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합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고, 지위의 노예가 되지 말고, 인기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의 노예가 되지 마라. 거기에 집착할 때 그것이 사라지면 우리는 다시 더 큰 괴로움에 빠지게 됩니다. 그런 것으로 복을 삼으면 복이 곧 재앙이 됩니다. 그것을 즐거움으로 삼으면 그것이 곧 괴로움이 됩니다. 즐거움과 괴로움이 반복되는 세상이 윤회의 세상이고, 윤회의 세상이 곧 괴로움의 세상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우리 모두 붓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서 자유와 행복을 누리자는 취지로 정토회가 설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토행자는 신자가 아니라 수행자입니다. 신자는 부처님을 신처럼 생각하고 복을 비는 사람이고, 수행자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해탈과 열반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부처님 당시를 보면 이 붓다의 길을 깨우친 사람들 중에는 지위를 버리고 인기를 버리고 출가하여 출가 수행자로서의 길을 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러나 자신의 삶의 처지가 그렇게까지 할 수 없을 때는 재가에 있으면서 수행자로 살아가는 길도 열어주었습니다.nbspnbsp그래서 제가 여러분들에게 누누이 얘기하잖아요. 많은 절들이 있고 많은 종파가 있는데 거기에 가면 되지 왜 주지도 없고 시내 한 가운데에 사무실 하나 내어 놓고 그것도 없으면 가정집에 모여서 활동하는 정토회로 오느냐? 그래서 누구는 사이비 같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왜 이렇게 하느냐? 그것은 바로 여러분들이 신자가 아니고 수행자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가 아니고 자기를 닦는 자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여러분들은 하루 종일 수행하지는 못하더라도 매일 아침 일어나서 한 시간은 수행을 해야 합니다. 비록 내가 세속에 살지만 내가 수행자라는 것을 늘 자각하고 살아야 합니다. 부처님 당시처럼 장사도 그만두고 직장도 그만두고 딱 절에 들어와서 수행자처럼 사는 것이 제일 좋은데 그게 안 된다고 하니까 조금 풀어준 겁니다. 그래서 ‘내가 신자이다’ 하고 생각할 때는 정토회가 좀 센 편이에요. 그런데 ‘내가 수행자이다’ 하고 생각할 때는 많이 풀어준 겁니다. 그래서 평상 시에도 검소하게 살면 좋은데 재일날 만큼은 검소하게 살아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하도록 했을까요? 너가 비록 몸은 세속에 있지만 수행자라는 것을 잊지 말아라 하는 뜻입니다. 매일 매일 나무 밑에서 자고 남의 집에서 밥을 얻어 먹고 그렇게 안 해도 된다. 그러나 조금은 해야 된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에 재가 수행자들은 자신들에게 이런 길을 열어준 것에 대해 너무 너무 감사했기 때문에 출가 수행자들에게 존경을 표하고 그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그들이 수행정진 하는데에 불편함이 없도록 도운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 오늘날 출가 수행자는 복을 빌어주는 사제로 전락하고, 재가 수행자는 복을 비는 신자로 전락해서, 마치 돈을 내고 물건을 구입하듯 거래하는 것과 같이 세속적으로 변해 있습니다.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에서 벗어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수행자로 돌아가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만일결사, 천일결사, 백일정진을 하는 거예요. 한번 수행자라고 다짐한다고 해서 세상에 살다보면 지켜지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자리에 와서 ‘아, 내가 정진을 놓쳤구나’ 반성을 하고 다시 또 입재를 해서 ‘내가 수행자이지. 나는 붓다의 길을 가는 자야’ 이렇게 다짐을 하고 또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놓치고, 또 와서 다짐하고, 또 놓치고, 또 와서 다짐하는데, 그래도 괜찮아요. 오기만 하면요. nbspnbspnbsp그래서 앞에서 세 사람이 나와서 세 가지 다른 차원의 수행담을 들려주었잖아요. 넘어지고 자빠지다가 길을 찾았다는 사람이 있고, 길을 찾아서 좀 더 나아갔다는 사람도 있고, 나만이 아니라 길을 잃고 헤매이는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는 쪽으로 기여를 하고 있다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조금씩 다른 세 사람의 경우를 보았습니다.nbspnbsp왜 이렇게 백일 마다 모일까요? 이렇게 백일 마다 모여서 다시 환기시키지 않으면 만일 끝나고 나서 이 자리에 남아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거예요. nbspnbspnbsp‘내가 수행자다’ 하는 것을 놓친 분들에게 ‘내가 수행자다’ 하는 것을 자각하게 하고 다시 발심해서 다음 백일은 정진을 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모임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을 환기시켜 주려고 중국에 있다가 어제밤 비행기 타고 한국에 들어온 겁니다. 그래서 본래의 목적인 해탈과 열반에 중심을 두고 한발 한발 정진해 나가시기 바랍니다.“nbspnbsp스님은 우리는 수행자임을 늘 자각하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여러차례 반복해서 자각시켜 주었습니다. 또 그런 취지로 오늘의 백일 입재식이 매번 열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명심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지난 백일 동안 수고가 많았던 정토불교대학 학생들을 잘 안내해준 담당자들, 모둠을 잘 관리해준 모둠장들, 직장생활과 가정생활 정토회활동의 삼중고에 시달리면서도 많은 활동을 해 온 저녁부 활동가들, 이 전체를 총괄하면서 자기 수행을 해나가고 있는 임원과 간부들, 사천왕사지와 임진각, 봉림사지에서 자발적으로 통일 기도를 하고 있는 대구경북지부, 인천경기서부지부, 경남지부 활동가들, 바쁜 중에도 통일의병학교를 이수하신 분들을 차례대로 언급하면서 대중들에게 이들의 노고에 대해 큰 박수를 부탁했습니다. 대중들은 뜨거운 박수 갈채로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어제가 광복 70주년인 동시에 분단 70년이 되었다고 하면서 아직도 남북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000일 동안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1초도 쉬지 않고 함께 기도하자고 제안했습니다.nbspnbsp“어제는 광복 70주년이면서 분단 70주년이었습니다. 광북 70주년을 마냥 기뻐만 할 수 없는 이유는 광복이 되자마자 분단이 되어서 70년이 지나도록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번 8.15에서도 남북의 화해와 협력이 확대될 수 있는 대통령 담화가 나오지 않겠나 기대했는데 지금 상황은 거꾸로 되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북 간에는 오히려 국지전이 생길지도 모를 일촉즉발의 험악한 말들이 오고가는 상황입니다.nbspnbspnbsp우리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고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많은 선조들이 투쟁을 하면서 희생을 했습니다. 저는 대중들을 데리고 봉오동 전투터,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 이런 독립운동 유적지를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명복을 빌고 그들에게 고마움을 표했습니다. ‘당신들이 없었다면 어찌 지금의 대한민국의 번영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우리가 당신들의 은혜를 잊지 않고 당신들이 그렇게 바라던 독립이 지금도 미완성이니 완전한 독립인 통일을 이루겠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nbspnbsp대종교 3인묘의 시신이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이유도 우리가 분단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나철 선생님이 죽으면서 ‘식민 지배를 받고 있는 이 땅에 나를 묻지 마라’고 하셔서 지금까지 백두산 아래 화룡에 묻혀 있는데, 나라가 두 쪽이 났기 때문에 돌아갈 곳이 없어 초라한 묘소가 그대로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통일이 된다면 그들이 얼마나 영광스럽게 생각할까요. 이렇게 3.1 독립운동을 비롯해서 수많은 운동이 있었지만 우리의 힘만으로 독립을 이뤄내지 못하고 결국 연합군에 일본이 패함으로 해서 해방이 되었습니다. 즉 남의 도움으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에 해방이 된 것은 좋은 일이였지만 그들에 의해서 우리는 분단의 고통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해방이 분단보다 낫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이 분단의 고통도 식민 지배의 고통에 못지 않은 고통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습니다. 특히 6.25 전쟁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우리는 70년이 지나도록 아직도 분단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나아지기는커녕 관계가 더 나빠지고 있습니다. 백용성 조사님께서는 독립운동을 지원하는 자금을 모으기 위해서 저 백운산에 수백만평에 화과원이라는 과수원을 만들어서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을 몰래 상해임시정부에 전달했습니다. 거지로 분장을 해서 전달하기도 하고, 불상 안에 숨겨서 전달하기도 하고, 그래서 많은 오해를 받기도 했습니다. 3.1독립선언의 불교계 대표로 참석하셨을 뿐만 아니라 용정에는 대각교당을 지어서 교민들을 위로하고 거기서도 농장을 지어서 그 수입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제공하고,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된 이들의 가족들이 그곳에서 살게 하고, 국내에서도 그냥 자금을 모으면 들통이 나니까 과수원을 만들어서 그 수익금을 전달했습니다. 아무도 몰랐는데 결국 용성 스님이 돌아가시고 김구 선생이 1945년에 귀국해서 대각사를 방문해 용성 스님의 영정 앞에서 ‘스님께서 이렇게 독립 군자금을 보내주지 않았다면 우리가 어떻게 독립운동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이렇게 고백함으로 해서 그 때 그 돈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여졌음을 나중에 알게 된 것입니다.nbspnbsp그러니 우리는 용성 조사님의 법을 계승하고 그 분의 독립운동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에 우리 정토행자들은 한쪽으로는 바른 법을 따라서 수행정진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조사님께서 독립을 위해 활동했듯이 우리는 통일을 염원하고 통일을 성취하는데에 한발 나아가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nbspnbsp그래서 이번 입재식이 끝나고 가을부터는 1000일 동안 민족의 평화와 통일을 발원하는 기도를 1초도 쉬지 않고 매일 매일 하려고 합니다. 남북이 갈등이 첨예한 이럴 때 우리는 불보살님의 힘을 빌어서 평화와 통일을 성취하자는 취지로 통일 기도를 시작하니까 여기에 조금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줄 것을 당부드립니다.”nbsp용성 조사님의 헌신적인 활동 이야기에 가슴이 뭉클해져 오면서 지금 이 시대에는 통일을 위해 우리가 그 역할을 해내자는 스님의 간곡한 호소도 가슴 깊이 새겨졌습니다. 1초도 쉬지 않고 1000일 동안 기도하자는 제안에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늘을 감동시켜서라도 통일을 이뤄내자는 스님의 간절한 염원이 느껴졌는지 많은 대중들의 눈에 눈물이 맺혔습니다.nbspnbspnbsp점심 시간에는 오랜만에 만난 도반들과 돗자리에 둘러앉아 소박한 도시락을 함께 했습니다. 스님도 대중들과 인사를 나누고, 홍보 부스를 돌아보았습니다.nbspnbsp2부 여는 마당에서는 창원, 대구, 울산, 마산, 양덕 법당의 통일염원을 담은 영상을 모아보았습니다. 각 법당의 보살님들 중에는 핸드폰으로 직접 찍은 영상물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찾으며 행복해하는 분들이 있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순천정토회 순천법당 정호원님이 “두 바퀴로 가는 자동차”, “일어나” 노래를 불렀습니다. 떨린다고 하면서도 박수를 유도하고, 혼자 하모니카, 기타까지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외모까지 가수 김건모씨를 닮아 순간 정말 유명 가수의 콘서트에 온 것 같은 느낌이었습니다.nbspnbspnbsp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를 뒤로 서울제주지부 신규발심행자 25명의 특별한 무대가 있었습니다. nbsp랩에서부터 트로트까지 뮤지컬처럼 가사를 쓰고 춤을 추는 멋진 무대 여럿이 저렇게 노래를 하고, 춤을 추려면 얼마나 고민하고 연습을 했을까? 도반들과 땀 흘리며 보냈을 시간들이 여름날의 추억으로 고스란히 남았으리라는 생각에 빙긋이 웃음이 났습니다.nbspnbspnbsp다음은 장엄한 분위기 속에서 신규 천일결사자 결의식이 있었습니다. 천일결사자의 다짐을 하는 모습에서 초심자의 굳건한 결의가 느껴졌습니다. 선배 행자들도 초심을 떠올리며 새롭게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법사님들이 직접 환하게 웃으며 염주를 일일이 목에 걸어주었는데 앞으로 백일, 천일, 나아가 새로운 만일결사 동안 이 많은 사람들이 든든한 도반으로 함께하기를 발원하였습니다.nbspnbsp“이제 부처님 법 만나 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오늘은 이렇게 발원하지만 그러나 내일은 경계에 부딪혀 원망하고 탓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제불 보살님께서는 저희들이 수행정진 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시옵소서. 모든 신중님들, 조상 영가님들께도 이 수행 대중을 잘 보살펴 주시기를 바랍니다. 먼저 수행정진 출발한 도반들도 처음 발심한 결사자들을 잘 도와주옵소서. 이제 껍데기는 범부중생이지만 그 속에 부처의 씨앗을 심었습니다. 이것이 자라면 나도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고 수행 정진하도록 하십시오. 잘 된다고 자만하지도, 안 된다고 좌절하지도 말고 나아가십시오.”nbsp제불 보살님과, 신중님, 조상 영가님들에게 까지 꾸준히 수행할 수 있도록 보살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하시는 스님을 보니 그 정성에 감동해서라도 계속 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진 입재 법문에서는 삼귀의부터 수행문, 참회, 명상, 경전독송, 정토행자의 서원, 천일결사의 목표, 보왕삼매론, 사홍서원, 수행나누기, 보시, 봉사의 의미까지 그 의미와 방법을 세세히 알려주셨습니다. 특히 스님은 참회 기도를 하면서 대중들이 오해하기 쉬운 내용을 강조하면서 참회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려주었습니다.nbspnbsp“불자는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고 계정혜 삼학을 닦는 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첫째 계율을 청정히 지키고, 둘째 선정을 닦고, 셋째, 지혜를 증득해야 합니다. 수행 원칙의 첫 번째가 계율을 지키는 것이예요. 그럼에도 계울을 어기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우선 어긴 것을 알아야 하고 다시는 안 어기겠다는 참회와 발원을 해야해요. ‘아이고, 내가 어겼구나’ 알아차리는 것이 참회이고, ‘다시는 어기지 말아야지’ 하는 것이 발원입니다. 참회 뿐만 아니라 발원까지 해야 합니다. 참회와 발원을 할 때는 그냥 앉아서 하는 ‘어기지 말아야지’ 하는 방법이 있고, 그것을 좀 더 몸으로 표현하는 것이 엎드려 절을 하면서 ‘죄송합니다. 제가 어겼습니다. 다시는 안 어기겠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계율에 따른 수행입니다.nbspnbspnbsp‘내가 옳다’는 한 생각을 내려놓으라고 하니까 ‘그럼 상대는 잘하고 나는 잘못했다는 것이냐’ 하는데 그런 얘기가 아닙니다. 본래 제법이 공하기 때문에 옳고 그름이 없는데 내가 내 관점에서 보고 내가 옳다고 고집하니까 상대는 저절로 틀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대는 맞고 나는 틀렸다’는 것이 참회가 아닙니다. ‘내가 옳다’는 것을 내려놓으면 그것이 참회입니다. 본래 옳고 그름이 없는데 내가 옳다고 상을 짓고 집착했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긴 것입니다. 이것을 놓아버리는 것이 참회입니다. 참회는 상대에게 싹싹 빌면서 ‘제가 잘못했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옳다’고 움켜진 것이 진리에 어긋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놓아버리는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이렇게 참회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니까 ‘내가 잘못했습니다’ 이렇게 기도하다가 ‘뭐 나만 잘못했나? 니는 잘못 안 했나?’ 이렇게 악에 받치게 됩니다. 그래서 염주도 집어 던져 버리고 ‘참회 안 할거야’ 이러잖아요. 이것은 참회를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본래는 옳고 그름이 없는데 내가 옳다고 상을 짓다가 보니 너는 틀렸다고 상이 지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화내고 짜증내고 미워했는데 ‘내가 옳다’는 상을 놓아버리는 것이 참회입니다. ‘내가 잘못 생각했구나. 내가 사로잡혔구나’ 하고 놓아버리면 상대가 틀렸다는 생각도 저절로 없어집니다.nbspnbsp그러면 남편에게 절을 하면서 ‘죄송합니다’ 하는 것은 남편이 잘했고 나는 잘못해서 참회를 하는 것이예요? 본래 잘하고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내가 옳다고 고집을 해서 남편을 미워한 것을 참회하는 것입니까? 남편을 미워한 것을 참회해야 하는 것입니다. 상대는 잘했고 나는 틀려서 참회하는 것이 아니고 나는 잘한 것이 없으면서 잘했다고 착각을 해서 상대를 미워했기 때문에 ‘아이고, 죄송합니다’ 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절을 한다는 것을 미워한 것을 참회하는 것이지 ‘너는 잘했고 나는 틀렸다’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미워하는 것은 내가 일으킨 것입니다. 그것을 반성해야 하는 것입니다.nbspnbspnbsp그래서 정말 잘못했다는 것에 대한 표현으로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는 절을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잘했다고 하면 고개를 쳐들고 잘못했다고 하면 고개를 숙이게 되잖아요. 그래서 엎드리면서는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나의 어리석음에 대해 참회하고, 일어날 때는 ‘다시는 이런 어리석음에 빠지지 않겠습니다’ 하고 발원을 하는 것입니다. 이 때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해도 되고 그냥 절만 해도 됩니다.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자꾸 복을 비는 쪽으로 가기 쉬워요. 그러나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진짜 이유는 내가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복을 주기 때문이 아닙니다. 관세음보살은 누구든지 중생이 괴로움에 처하면 그 부모보다도 그 자식보다도 그 부부보다도 더 빨리 아시고 그 괴로움을 덜어주려고 그를 돕는 자가 관세음보살입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면서 ‘관세음보살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죄인까지도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인데 나는 그렇게까지는 못하더라도 관세음보살의 천분의 일, 만분의 일은 닮아야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고 그래서 ‘우선 내 남편 하나 정도는 내 마음에 안 들어도 좀 보살펴 주어야겠다’ 이렇게 관세음보살을 닮아가고자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내가 작은 관세음보살이 되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nbspnbsp관세음보살이 되겠다는 것은 얻겠다는 것이 아니라 주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이해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사랑 받겠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겠다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다. 참회를 하면서 ‘아, 내가 사랑 받겠다는 마음을 내다 보니 상대를 미워하게 되었구나. 오히려 내가 상대를 이해하고 내가 베풀어주어야 되겠구나’ 이렇게 마음을 내라고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은 그렇게 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참회 기도를 할 때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냥 ‘죄송합니다. 제가 또 당신에게 짜증을 내었군요’ 이렇게 구체적으로 하나 하나 생각하면서 참회하는 방법이 있고, 다른 하나는 관세음보살을 염하면서 관세음보살을 닮아가겠다고 마음을 내면 ‘관세음보살은 일체 중생을 위해서 사는데 나는 속이 좁아서 내 남편 한 명에게도 마음을 내지 못하고 싸우고 있구나’ 하는 반성이 되고 그런 의미에서 관세음보살을 부르는 방법이 있습니다.nbsp그 다음에 선정을 닦기 위해서 명상을 하는 것이고,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 이어서 경전을 독송하는 것입니다.”nbsp대중들은 참회 기도의 의미에 대해 듣고 나서는 모두 ‘아하’ 하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항상 의문이 들었던 점들이 명쾌하게 해소되면서 마음도 한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nbsp입재 법문 후 김해정토회 김해법당 이지영님의 ‘청산에 살리라’ ‘once upon a dream’ 성악 공연이 있었습니다. 식사 후 조금은 나른해진 분위기에 청량제 같은 목소리와 맑은 피아노 연주를 들으니 비타민을 먹은 듯 다시 힘이 났습니다.nbspnbsp이번 입재식 명심문은 ‘나는 법을 전하는 정토행자입니다’라는 것과 ‘우리동네 열린강좌 3회 열기, 우리 동네 열린강좌에 3번 참여하기 혹은 3명 인연맺기’ 실천 과제를 안내받고 옆 도반들과 손을 잡고 산회가를 부르며 헤어졌습니다. 스님과 법사님들은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도록 무대에서 손을 흔들어 주셨습니다.nbspnbsp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피곤하지만 맑은 기운이 퐁퐁 솟아나 보였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또 다른 백일을 맞이하려는 사람들에게로 시원한 바람이 새로운 계절을 알리듯 불어왔습니다.nbspnbsp이렇게 백일기도 입재식을 성황리에 마치고 스님은 곧바로 두북 정토수련원으로 향했습니다. 오늘 저녁부터 내일까지 두북 정토수련원에서는 전국에서 정토회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두 모여 스님과의 간담회를 가집니다. 오후 6시30분에 두북에 도착한 스님은 입재식 행사 후 곧장 두북으로 달려온 정토회 활동가들과 함께 저녁 예불을 올린 후 곧이어 간담회를 이어갔습니다.nbspnbsp스님은 간담회에서 “상반기 동안 모두들 고생이 많으셨어요” 라고 활동가들을 모두 격려해 주신 후 “그동안 힘들었던 것이 있으면 마음껏 하소연을 해보라”고 하면서 활동가들이 그동안 마음 속에 쌓아 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도록 장을 열어주었습니다. 3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활동가들은 그동안 힘들었던 점들을 편안하게 이야기하였고, 스님은 각각의 제안에 대해 그 해법을 조언해 주었습니다. 10시 30분이 되어 간담회를 마무리 짓고 모두 잠자리에 들었습니다.nbspnbsp내일은 계속 이어서 정토회가 갖고 잇는 각종 현안과 방향에 대해 주제를 잡아서 스님의 기조 발제와 그에 따른 활동가들의 집중적인 토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nbspnbsp ▼ 법륜 스님의 명쾌한 강의 ‘2015년 정토불교대학’에서 신입생을 모집하고 있습니다. 8월23일에 신청 접수가 마감되오니 많은 신청 바랍니다. nbsp

2015.08.18. 53,433 읽음 댓글 28개

2015.8.15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 백암산성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7일째를 맞이하여 백암산성에 올라 고구려의 기상을 느끼고 청년들과 함께 버스 안에서 즉문즉설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오늘도 어김없이 새벽 4시에 기상해 버스에 몸을 싣고 동북아 역사기행의 마지막 7일째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길림 시내에 위치한 새벽 시장을 찾아갔습니다. 오늘은 길림에서 심양까지 꼬박 7시간을 버스로 달려가야 하는 일정이여서 각자 아침과 점심을 미리 시장에서 구입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길림 새벽 시장nbsp중국 사람들은 아침 식사를 직접 요리하지 않고 사먹는 경우가 많아서 새벽 시장이 굉장히 활성화 되어 있다고 합니다. 새벽 5시부터 새벽 시장은 인산인해를 이루며 활기를 띠었습니다. 콩국, 연두부, 죽, 빵, 튀김, 과일 등 먹을 거리를 주섬 주섬 들고 버스에 올라타 먼 거리를 달릴 채비를 마쳤습니다.nbspnbsp길림에서 심양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는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스님께 마음껏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청년들은 지난 6일 동안 하루 종일 스님의 역사 강의를 들으며 방대한 시간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 속에서 더 알고 싶은 점과 의문이 들었던 점이 많았는지 1호차, 2호차, 3호차 차량별로 연이어 많은 질문들을 쏟아내었습니다.nbspnbsp▲ 버스 안 즉문즉설nbsp자칫하면 버스 안에서 잠만 자며 그냥 흘려보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스님은 이 시간 조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시려고 즉문즉설 시간을 마련한 것 같았습니다. 스님은 한 명 한 명의 질문에 대해 애정을 갖고 정성껏 답변을 이어갔습니다. 청년들은 지난 6일 동안의 역사기행 소감을 간단히 말하거나 노래 한자락을 신나게 부른 후 자신의 질문을 스님에게 말했습니다.nbspnbsp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우리의 역사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반성하는 마음이 많이 들었다는 한 친구는 “위안부 문제를 보면 식민지 문제는 아직도 진행 중인 것 같은데, 일본과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을 하기 위해서 한국 국민들은 어떤 시각을 가지면 좋을지요?” 라고 질문했고, 어떤 친구는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다문화 시대에는 자기 정체성을 갖기 위한 민족적인 역사관을 어떻게 가져야 하는지요?” 라고 물었습니다. nbspnbsp스님과 같이 역사기행을 하면서 민족적 열등의식에 대해 집단적인 심리 치료를 받은 기분이 들었다며 감사한 마음을 표현한 한 친구는 “사회 초년생으로서 무한 경쟁에 내몰리고 있어서 사회 변화에 대한 동참이 망설여집니다” 라고 자신의 고민을 말했습니다. 또 한 친구는 “통일 이전에 대한민국은 남남 갈등이 심각한데 갈등의 해결 방법과 통일을 위해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이 있는지?” 물었고, 스님이 항일무장투쟁에서 희생된 민간인들과 일본 군인들까지 헤아리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 친구는 “통일을 위해서 정부는 현재 어떤 노력을 하고 있고, 개인적으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nbspnbsp또 어떤 친구는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로 불안해 하는 상황에서 과연 얼마나 통일에 대해 지지해 줄지 걱정이 됩니다.”라고 질문했고, “통일을 고려한다면 앞으로 어떤 직업이 전망이 있어질까요?” 라고 묻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또, “개인적인 문제이든 사회적인 문제이든 객관화해서 바라보려면 어떤 연습을 해야 하나요?”, “스님은 어떤 대선 후보를 지지하시는지요?”, nbsp“일본 천황이 백제의 후예라고 알고 있는데 일본을 답사하는 기행을 해보실 생각은 없으신지요?”, “고양이 한 마리를 키우고 있는데 중성화 시키는 것이 좋을지 고민입니다”, “안중근은 나라의 영웅이였지만 가족에게는 큰 고통이였다는 말에 대해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 “훌륭한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며 그런 지도자를 알아보려면 어떤 안목을 가져야 하는지요?” 등 다양한 질문들이 연이어 펼쳐졌습니다.nbspnbsp각각의 스님의 답변이 모두 궁금하실테지만 그 중에서 많은 감동을 주었던 한 가지 질문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일정이 빡빡해서 피곤했지만 스님의 말씀을 들으며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어 보람있었다는 한 친구가 스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통일의 모습은 무엇인지 물었습니다.nbspnbsp“솔직히 통일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고, 통일이 되면 북한 주민 입장에서는 돈 많다고 잘난체 하는 남한 사람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다고 느낄 것이고, 남한 주민 입장에서는 북한 사람들 때문에 우리가 세금을 많이 내야 해서 힘들어진다고 받아들일 것 같습니다. 통일 이전에 미리 투자를 해서 북한과 남한의 수준과 차이를 일정 수준까지 맞추는 작업을 해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듭니다. 스님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통일의 모습이 궁금합니다.”nbspnbsp▲ 송수신기로 스님께 질문하는 청년nbsp“통일을 하는 것이 좋은지 안 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해서 젊은 사람들은 ‘굳이 할 필요가 있겠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것은 너무 좁은 생각입니다. 앞으로 우리 주변의 정세가 바뀌어 나가고 새로운 세계 질서가 성립되고 또 우리 경제의 성장이 둔화되는 이런 모든 상황들을 감안할 때 통일로 가지 않고는 지속적 성장도 어렵고, 우리의 자주권을 지키기도 어렵고, 평화를 유지하기도 어렵습니다.nbspnbspnbsp지금까지 분단된 상태로도 안보를 지키고, 경제 성장도 이루었고, 민주화도 이루었으니 앞으로도 분단된 상태에서 안보가 지켜지고, 경제도 계속 성장하고, 민주주의는 더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래서 ‘통일을 꼭 해야하나’ 하고 마음 속에서 망설임이 생겨나는 것이겠죠. nbspnbsp지금까지와 앞으로가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경제 성장은 둔화될 것이고, 자칫 잘못하면 정체 국면에서 후퇴 국면으로 갈 가능성도 매우 높아졌습니다. 미중의 패권 경쟁이 강화되면 될수록 우리의 입지가 넓어지는 것이 아니고 좁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한미일 삼각군사동맹 체제에 묶일 가능성이 높아서 미국에 대한 예속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본에 대한 예속까지도 조금씩 조금씩 진행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평화 문제에 있어서도 미·중 두 개의 판이 충돌할 때 그 충돌판이 남북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측면에서 우리의 미래가 매우 불확실해져 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100년 전의 재판이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똑같은 건 아니지만 판이 그런 구조로 갈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nbspnbsp그러나 우리가 100년 전에는 잘못 대응해서 실패를 했다면 굳이 같은 실수를 반복할 필요는 없잖아요. 이를 교훈 삼아서 우리가 잘 대응한다면 이미 짜여진 판에서 일방적으로 규정 받는 것이 아니라 판이 짜여오는 속에서 우리의 이익과 안전, 평화를 관철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통일은 우리의 지속적인 성장을 어느 정도 담보할 수 있고, 이 판에서 자주성을 확보할 수도 있고, 지속적 평화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통일 없이는 이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지금 통일을 얘기하는 것입니다.nbspnbsp질문자는 통일을 하면 오히려 손해가 생기지 않느냐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첫째, 북한은 지하 자원이 많습니다. 무역 규제만 안 받으면 지하 자원만 팔아도 북한은 경제 회복을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원자재 값이 좀 떨어지기는 해도 적게 잡아도 1조, 많이 잡으면 8조 달러 가치의 지하 자원이 있습니다. 특히 희토류 등 희귀 금속도 굉장히 많이 가지고 있습니다.nbspnbsp둘째, 북한이 갖고 있는 노동력은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필리핀에 비해 굉장히 우수합니다. 현재 임금도 훨씬 더 쌉니다. 이것은 단순히 먹여 살린다고 생각하면 엄청난 돈이 드는 일이지만, 그러나 그 사람들이 값싼 노동력이다 하는 측면에서는 굉장한 자산입니다. 북한 주민들에 대한 규제가 풀려서 해외에 나가서 1인당 한달에 500불만 벌어 들여도 북한 경제는 굉장히 살아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개성공단에서 1인당 57불 주면서 남북이 서로 갈등하고 그러잖아요. 수당까지 다 합해도 임금이 150불이 채 안 되는데 이것은 임금 착취에 해당합니다. 전 세계에 그런 임금은 없습니다. 현재 도문시에 있는 조중 공단에 북한 노동자들이 3천명 와서 일하고 있는데 거기에서 지급되는 임금도 250불에서 300불이 안 됩니다. 중국에서는 최저 임금에 해당합니다. 중국 사람들은 그 돈 받고 일할 사람이 없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을 데려다가 일하는 것이죠.nbspnbsp▲ 스님의 답변을 송수신기로 듣고 있는 청년들nbsp북한 주민들의 노동력을 소비의 관점에서 볼 거냐, 생산적 관점에서 볼 거냐 하는 문제입니다. 북한 사회의 여러 산업을 재건시키는 것을 투자로 볼 것이냐, 소비로 볼 것이냐 하는 문제와도 같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우리 나라에 와서 철도도 놓고 도로도 닦았는데 그것은 한국 사람을 위해서 해준 것이냐,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했느냐 하는 문제죠. 남의 나라 땅도 뺏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건설을 하잖아요. 하물며 북한은 앞으로 돌려줘야 할 남의 나라가 아니고 앞으로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우리나라 땅인데 거기에 재건설하는 것이 왜 낭비가 됩니까? 그것은 투자이지요. 그래서 통일을 위해 북한을 개발하는 것은 투자의 관점에서 봐야지 소비의 관점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투자는 돈이 모자라면 외자 유치를 하면 돼요. 북한 개발을 한다고 하면 해외에서 투자하겠다는 곳이 무궁무진할 거예요. 왜냐하면 돈은 있는데 투자처를 못 찾아서 특정한 곳에 돈이 몰리면서 지금 금융 위기가 오고 하잖아요. 안전된 투자처를 제공하면 투자자는 얼마든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통일 문제를 새로 봐야 합니다.nbspnbsp통일은 내일 휴전선 싹 허물어 버리고 두 나라를 당장 하나로 합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고, 또 그렇게 하면 혼란이 엄청나게 가중됩니다. 우리가 통일을 하자고 아무리 방침을 정하고, 설령 통일 지향적 정부가 들어선다 하더라도 완전히 하나가 되는 통일은 시간이 꽤 걸립니다. 그러니 하나가 다 되어야 통일이 아니라 그런 입장이 딱 정해지면 그게 바로 통일인 것입니다. 모든 투자가 통일 지향적으로 이뤄지게 되면 그것은 이미 통일된 사회입니다.nbspnbsp나무도 심으면 금방 자라는 것이 아니잖아요. 현재 남북한 간에 갈등이 있는 이 상황 속에서도 미래를 생각하면서 일단 북한에 나무부터 심는 겁니다. 나무는 앞으로 30년 자라야 하니까요. 현재 북한에 나무 한그루 심는 데는 100원이면 되는데, 통일된 뒤에 나무를 심으려면 5000원으로도 못 심습니다. 나무 값 뿐만 아니라 인건비가 엄청나게 오르기 때문이죠. 지금 북한 주민들이 하루 종일 뙈기밭에서 일해 봐야 1000원의 생산량도 못 만들어내는데, 뙈기밭 하지 말고 여기 와서 나무를 심으면 쌀 1kg을 주겠다든지, 밀가를 2kg을 주겠다고 하면 전부 나무 심으러 올 겁니다. 그러면 하루에 2000원만 갖고도 나무를 심을 수 있는 거예요.nbspnbsp통일 지향적이 되면 투자도 달라집니다. 철도도 러시아와 중국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모두 개선을 해야 되는데, 통일된 후에 이 일을 하려면 너무 늦습니다. 이런 식으로 도로도 닦고, 하천 재방도 쌓고, 전기도 넣어서 주민 생활도 개선하고, 산업 시설도 돌리고, 이를 위해 남한의 중소기업이 여기저기 공단을 만들어서 북한으로 들어가 생산을 해낼 수 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이 중국에 와서도 일을 하는데 북한 안에 공단을 만들어서 전기는 우리가 지원해 주면서 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겠어요?nbspnbspnbsp이렇게 추진해 나가는 과정이 곧 통일입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협력해 나가는 것이죠. 그러면 북한에서도 우선 100불, 200불 짜리 일자리라도 늘여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거기에서 생산한 물건들이 가치가 있다면 노동 인건비도 올려줘야 하겠죠. 처음에는 필리핀이나 베트남 수준에서 시작하고, 다음에는 중국 수준으로 올려주고, 이렇게 조금씩 향상시켜 나가야 합니다. 여기에 남북 간의 교류와 방문도 자유로워져야 하겠죠. 또 기업인들의 북한 투자에 대한 보장도 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북한의 부동산을 무작위로 매매하게 하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또 개발의 이익이 남한 사람에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북한 사람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주어야 합니다.nbspnbsp흡수 통일처럼 그냥 합치게 되면 북한은 2등 국민이 되고 개발의 이익이 남한의 자본가들에게 다 돌아가게 되겠죠. 그러면 북한 사람들도 남한 수준의 최저 임금으로 먹여 살려야 하니까 사회적 부담도 엄청나게 늘어나겠죠. 그러면 세금을 많이 내야 하니까 남한 사람들의 불만이 늘어납니다. 왜냐하면 남한 주민들 입장에서는 통일에 대한 이익이 없고, 그 이익을 재벌기업이 다 가져가니까요. 그런데 하나의 나라가 갑자기 되면 북한 사람에게도 남한 수준의 사회 보장 제도를 해야 되잖아요. 그럴려면 세금이 두 배로 뛰어야 되고 사람들의 불만도 가중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단순한 흡수 통일은 일어나기도 어렵지만 바람직하지도 않습니다. nbspnbspnbsp그리고 북한이 어느 정도 개발을 한 뒤에 통일을 해야 된다고만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우리는 꾸준히 통일의 기반을 구축해 나가면 됩니다. 북한 주민들이 투표에 의해서 합하자고 결정이 되면 부담이 좀 되더라도 하나의 시스템으로 가야 하고요. 반면 북한 주민들이 자신들의 독자적인 시스템을 당분간 유지하고 싶다고 하면 그렇게 가면 됩니다. 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는 것은 우리가 해야 되고, 통일을 선택하는 것은 북한 주민들에게 그 권리를 주어야 해요. 북한이 통일하자고 하면 하고, 지금 이대로 당분간 가자고 하면 그렇게 해주는, 그러나 상호 협력 체제를 가져야 합니다.nbspnbsp지금 남한의 입장에서도 지방자치제를 강화해야 하잖아요. 그래서 남한이 5도, 북한이 3도라면 남북한이 8도 연방이 되도록 해서 북한이 남한에 예속되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지방자치제가 강화되면서 자연스럽게 북한이 자신들이 선택하는 체제를 가지고 들어올 수 있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남한의 경상도처럼 신자유주의적 시장 질서가 좀 강한 곳도 있고, 북한의 평양이나 평안도처럼 사회주의적 요소가 강한 곳도 있죠. 한 나라 안에서도 이렇게 다양할 수 있습니다. 도 마다 집권 세력이 다르고요. 그러면서 연방 정부를 어떻게 구성할지 서로 경쟁을 하게 되겠죠. 사회주의를 더 지지하면 어떤 지방 정부는 거기에 맞게끔 추진해 나가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열어주어야 합니다. 이것을 우리가 인위적으로 하려고 하지 말고 주민들의 의사가 최대한 반영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합니다.nbspnbsp자기 지방의 결정권을 자기 지방이 갖도록 권리를 돌려주는 것을 분권이라고 합니다. 권리를 먼저 주고 발전의 속도가 낙후한 곳을 지원해서 균형을 잡아가는 방식이 되어야 하겠죠. 그래서 권리를 주는 것과 동시에 경제적인 발전의 격차를 줄여주는 지방 발전 계획도 함께 수립해야 합니다. 이런 식으로 통일을 만들어나갈 수 있습니다. 우리 민족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는 외교, 안보, 국방은 중앙 정부가 해야 하지만, 나머지는 다 자신의 처지에 맞게끔 시간을 좀 더 가지면서 풀어나가면 됩니다.nbspnbsp통일은 단순히 남북이 하나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제2건국입니다. 그래서 많은 정치 시스템, 경제 시스템 등이 재구성 되어야 합니다. 분단 국가는 불안정한 정부이기 때문에 이제 새로운 통일 코리아를 건국하는 운동을 해야 합니다.”nbsp통일은 제2건국 운동이라는 말에 버스 안의 청년들도 큰 박수로 공감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질문을 주고 받으며 미진했던 부분들은 점점 사라져갔고, 그럴수록 역사적 자부심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nbspnbsp버스 안에서 즐겁고 명쾌한 즉문즉설을 들으며 7시간을 달려 낮 12시 30분 무렵 이번 역사기행의 마지막 코스인 백암산성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 백암산성으로 올라가는 길nbsp스님은 청년 130여명을 이끌고 맨 앞에 서서 백암산성의 남문에서 시작해 웅장하게 쌓여진 서쪽 성벽 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성벽을 오르느라 송수신기를 통해 들려오는 가쁜 숨소리 사이로 스님은 백암산성의 구석 구석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수도인 본거지는 깊은 산 속에 숨겨 놓았습니다. 졸본성이든 국내성이든 우리가 직접 가서 확인해 보았죠. 깊은 산 속에 딱 숨어 있다가 광할한 만주벌에 나와서 대륙을 경영했습니다. 그래서 바깥에 드러난 부분에 크게 성을 쌓은 것이 요동성입니다. 즉 요동성을 중심으로 해서 대륙을 경영했던 것이죠. 미국 같으면 수도는 워싱턴이지만 실제로 큰 도시는 뉴욕이잖아요. 그런 것처럼 요동성이 훨씬 컸습니다.nbspnbsp▲ 백암산성nbsp요동성을 대륙에 딱 배치해 놓고, 그러다가 만약 위기에 처하면 요동성은 포기하더라도 자신들의 본거지는 유지를 해야 하니까 치고 빠졌습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산속으로 들어가 버려서 추격해 오면 산 속에서 공격을 해서 적을 막아 내었습니다. 그래서 적이 도망가면 다시 뒤따라가서 공격을 했습니다. 이렇게 산 속에 수도를 정한 것은 안전을 유지하기 위해서이고, 대륙에서 요동성을 경영했던 것은 고조선의 옛 영토를 확보하기 위함이였습니다.nbspnbsp이 요동성을 중심으로 남쪽으로 안시성이 있고, 더 남쪽으로 내려가면 건안성이 있고, 지금의 요동 받도 끝인 대련에 비사성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개모성, 신성, 저 위쪽으로 부여성까지 있었고, 나중에 당나라의 침공을 막기 위해 그 사이 사이를 연결했는데 그것을 천리장성이라고 합니다. 고구려는 천리장성을 쌓기 위해 엄청난 국력을 소모했고, 이로 인해 국민들이 도탄에 빠지고 여기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많았습니다.nbspnbspnbsp이 백암산성은 만주벌에서 가장 중요한 도시였던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입니다. 환도산성이 국내성을 보호하는 산성이듯이 요동성을 보호하는 산성이 백암산성입니다. 요동성에서 도저히 못 견디면 백암산성으로 도망올 수도 있고, 적의 공격을 여기서 막아내는 역할도 한 곳입니다. 왕이 있는 성을 보호하는 산성이 아니고 대륙을 경영하기 위한 고구려의 제2도시 요동성을 보호했던 산성입니다.nbspnbsp산을 보면 동모산과 비슷합니다. 환도산성처럼 험준한 것도 아니고, 홀본산성처럼 웅장한 것도 아니고, 그냥 들판에 있는 언덕 같은 산에 쌓은 산성입니다. 그런데 꼭대기에 있는 망대에 올라가면 사면이 훤히 보입니다. 특히 적이 쳐들어오는 서쪽 지역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고, 동쪽에는 태자하가 흘러서 자연 해자가 이루어져 있고, 남쪽은 절벽으로 되어 있고, 산성 안에는 샘물이 있어서 아주 천연의 요새입니다.nbspnbspnbsp547년에 돌궐족 부대가 1만명이 공격했는데 결국 함락시키지 못하고 돌아갔다 할만큼 견고한 성이였습니다. 또 당태종이 침입했을 때 요동성이 함락되었는데, 요동성이 함락이 되자 이 성의 성주가 항복을 해버렸다고 해요. 아무리 성이 견고해도 그 성을 지키는 사람이 나약하면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이런 기록이 남아있는 성입니다.”nbsp고구려의 웅장함이 많이 이야기 되었지만 실제로 환도산성과 국내성은 대부분 허물어져 있었던 반면 이곳 백암산성은 지금 봐도 ‘우와, 잘 쌓았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nbspnbspnbsp남쪽 성벽을 통과한 전체 대중은 먼저 서쪽 성벽 위를 걸으며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서 그 웅장함을 느껴보았습니다. 이어서 다시 성벽 아래로 내려가 성벽 위를 쳐다보며 다시 그 웅장함을 느껴보았습니다.nbspnbsp아랫 기단은 피라미드처럼 탄탄하게 계단식으로 받추고 있고, 그 위로는 적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수직으로 우뚝 솟아있는 모습은 고구려의 기개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습니다.nbspnbspnbsp적을 공격하기 위해 5060미터 간격으로 설치한 ‘치’는 성 밖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 안에도 있는 점이 특이했습니다. 스님은 “아마도 적을 공격하기 위해 물자를 비축하는 등 방어 면적을 더 확보하기 위해 그런 것 같다”는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성 밖에 23미터 떨어진 지점에 작은 성벽을 더 쌓은 덧성의 흔적도 보였습니다. 얼마나 정교하게 적의 공격에 대비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전체 대중은 높고 튼튼한 서쪽 성벽을 지나 이제 북쪽 성벽 위를 걸었습니다.nbspnbspnbsp북쪽 성벽 끝에는 깍아지른 절벽과 맞닿아 있었고, 그 아래로 태자하가 유유히 흐르는 모습과 광활한 벌판이 시야에 펼쳐졌습니다. ‘과연 천연의 요새이구나’ 하는 탄성이 나왔습니다.nbspnbspnbsp내성 안으로 들어와 망대에 오른 스님은 사방이 훤히 보이는 풍경을 가르키며 이곳 저곳을 짚어가며 당시에 백암산성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설명해 주었습니다. 망대까지 오르느라 흘린 땀방울이 만주벌판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맞닿으며 시원한 기분을 느끼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내려오는 길에는 빗물을 저장하기 위해 바위를 파서 만든 샘터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조금 더 시간을 여유있게 가지며 고구려인들의 숨결을 깊이 느껴보고 싶었으나 내일이 정토회 천일결사 백일기도 입재식이기 때문에 스님께서 오후에 심양공항으로 바로 이동하셔야 해서 아쉬움을 뒤로하고 종종 걸음으로 백암산성을 내려왔습니다.nbspnbsp아래 마을에서 수박을 깨어 먹으며 땀을 식힌 후 곧바로 버스를 타고 심양 공항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공항에 내리기 전 스님은 동북아 청년 역사기행팀을 향해 “마지막 마무리 잘 하고 오세요. 저는 먼저 갈게요” 라고 인사한 후 공항 출국심사대로 향했습니다.nbspnbsp오후 4시 35분에 심양 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저녁 7시 45분에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정토회관에 도착해 짐을 푼 스님은 늦게까지 그동안 밀린 업무를 처리하시다가 오늘 일정을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정토회 제8차 천일결사 제6차 백일기도 입재식이 열리는 날입니다. 지난 백일을 돌아보고 새로운 백일을 맞이하는 스님의 법문과 정토행자들의 다채로운 모습들을 담아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nbsp

2015.08.16. 48,030 읽음 댓글 36개

2015.8.14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 열등의식의 극복과 통일코리아

▲ 일송정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6일째를 맞이하여 청산리 전투터, 대종교 3인묘, 일송정, 용정중학교 등 독립운동의 현장을 둘러보고 민족적 열등의식의 극복과 통일코리아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오늘은 동북아 역사대장정 6일차, 항일독립운동 유적지를 둘러보는 날입니다. 연길 새벽시장에 가기 위해 평소보다 1시간 일찍 3시 20분에 기상을 하고 4시에 모두들 들뜬 마음으로 시장을 향해 출발했습니다.nbspnbsp▲ 연길 새벽 시장으로 가는 길nbsp이른 시간인데도 시장의 상인들은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내느라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중국식 빵, 떡, 두유, 장국, 도시락, 신선한 과일에서부터 한국 음식인 김밥까지 다양한 음식이 있는 중국 시장은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nbsp시장에서 산 음식으로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오늘의 첫 번째 답사지인 청산리로 출발했습니다. 청산리 전투가 있었던 백운평 마을 옛터에서 스님으로부터 청산리 전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습니다.nbspnbsp▲ 백운평nbsp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김좌진과 홍범도의 부대가 합동하여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벌인 10여차례의 전투를 통틀어 청산리 전투라 하며, 상대적으로 열세인 독립군 유격대가 적은 병력과 무기로 일본군 사단 병력을 물리친 전쟁사에 길이 남을 만한 전투였음을 알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깜깜한 밤,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독립군 유격대가 청산리 협곡에 매복해 있다가 일본군이 협곡 안으로 들어왔을 때 사방에서 공격을 퍼부어 200명의 일본군이 사망하였고, 이 기세를 몰아 천수평에 주둔하고 있던 기마 중대를 기습 공격하여 120여명을 사살하고 많은 무기 뿐만 아니라 군사 배치도도 손에 넣었다고 합니다. 이 군사 배치도를 이용해 어랑촌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본대를 사방에서 포위하여 공격했지만 포병 연대까지 갖춘 일본군의 반격으로 전세가 불리해지자 홍범도 장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김좌진, 홍범도 두 부대가 협동하여 일본군 1000여명이 사살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이로써 사단 병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3300여명의 사상자를 내어 일본군 토벌대를 사실상 궤멸시켰다고 합니다.nbspnbsp청산리 전투의 승리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 고통받는 동포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었다는 스님의 말씀에 청년들은 저절로 조상님들에 대한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nbspnbsp그러나 자랑스러운 항일 운동의 이면에는 민간인 학살이라는 비극도 있었습니다. 답사를 시작한 곳은 백운평 마을 옛터로 20여가구 정도가 모여 살던 마을이었으나, 청산리 전투에서 패한 일본군이 후퇴하면서 마을로 내려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뛰어나오는 사람을 총으로 사살하여 마을은 초토화되고 지금은 터만 남아있다는 스님의 말씀에 청년들도 모두 숙연해졌습니다.nbspnbsp마을 사람 중 한 명이 사건 발생일 이웃 마을에 갔다가 그 이튿날 돌아와서 보니 마을 전체가 불에 타 있고 모든 사람이 죽어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했는데 그들이 당했던 고통이 그려져 마음이 아팠습니다.nbspnbsp스님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실제 청산리 전투가 벌어진 직소택이란 곳으로 이동했습니다. 백운평에서 직소택으로 향하는 길에는 물을 건너야 했는데 물살이 강해서 철퍼덩 물에 주저 앉는 친구들도 생겼습니다. 하지만 손을 맞잡고 서로를 지탱해 주며 모두가 안전하게 물길을 건널 수 있었습니다.nbspnbsp또 도중에는 끊어진 나무 다리도 나왔습니다. 이 때도 먼저 건넌 사람이 손을 당겨주며 전체가 무사히 끊어진 나무 다리를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산길을 누비니 마치 독립군이 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nbspnbspnbsp직소택에 모인 청년들은 전투에서 희생된 모든 이들의 넋을 기리며 잠시나마 묵념을 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민간인과 희생된 한국 독립군 뿐만 아니라 이국 땅에서 비참하게 죽음을 맞은 일본군 병사 모두가 군국주의 전쟁의 희생자라고 하셨습니다. 청년들은 희생된 모든 분께 묵념을 하며 기도하였습니다. 차가운 계곡물, 좁은 협곡에서 변변한 군복도 없이 전투에 임했던 젊은 병사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마음이 먹먹해졌습니다. nbspnbspnbsp다음으로 대종교 3인묘로 향했습니다. 항일운동의 지도자이자 대종교를 이끌던 나철, 서일, 김교헌의 세 개 묘소는 대종교의 발상지인 청호리의 탁트인 언덕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준비해온 음식과 술을 올려 제사를 지내고 묵념을 하며 기도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 대종교 3인묘nbsp나철은 국조 단군을 섬기는 대종교를 창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매국노를 암살하는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활동했지만 결국 일본의 폭정을 규탄하며 자살로 생을 마감했는데, 유서에 자신의 유해를 백두산 밑에 안장해 달라고 했다는 설명에 대중은 숙연해졌습니다. 통일이 되지 않아 묘소를 한국에 안장시키지 못했다는 스님의 말씀에 빨리 통일이 되어 이 분들을 고국에 모셨으면 좋겠다는 발원을 해보았습니다. nbspnbspnbsp점심시간이 되어 화룡에서 냉면을 맛있게 먹고 다음 목적지인 일송정으로 향했습니다. 한국에서 온 130여명의 청년들은 비암산의 일송정 언덕에 올라 드넓은 평야를 바라보며 주변 일대에 대한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nbspnbsp▲ 일송정nbsp일송정에 오르니 탁트인 전망에 해란강과 용정 시내가 한눈에 보이고 시원한 바람까지 불어와 더위를 식혀주었습니다. 모두 일송정 정자에 모여 해금 반주에 맞춰 ‘일송정’, ‘홀로 아리랑’을 부르며 일송정에 찾아와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을 조상들을 생각했습니다.nbspnbsp▲ 해금 반주에 맞춰 부르는 ‘일송정’ 노래nbsp이어서 ‘고향의 봄’을 다함께 부르니 고향을 떠나 만주 벌판에서 삶을 일구어 낸 우리 선조들의 고향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느껴지고 넓은 들판이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버스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용두레 우물을 구경하고 윤동주 시인의 모교인 용정중학교로 향했습니다. 용정중학교 옛 건물은 조선족 사회의 독립운동 역사, 윤동주 시인, 학교 연혁에 대한 전시관으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용정중학교nbsp전시관을 둘러보며 만주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배울 수 nbsp있었습니다. 한국 교과서에는 깊이 다루지 않는 독립운동 역사를 세세히 배우고, 조선족 사회에 대한 이해도 한층 깊어진 시간이었습니다. 타국에서 이렇게 우리 조상들의 독립운동 역사에 대해 전시해 놓은 모습을 보니 조상에 대한 자긍심이 깊어지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전시관에는 윤동주시인이 친필로 쓴 서시의 원고지도 전시해놓고 윤동주 시집도 판매 하는 등, 윤동주 시인의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학교 차원에서의 노력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하루 답사 일정이 끝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스님은 즉문즉설을 해주었습니다. 통일이야기를 친구에게 하면 친구는 통일보다 나 자신 내 가족의 안보가 더 중요하다고 이야기 한다는 분의 질문에 대해 스님은 “일제 강점기 때에 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도 인구의 극소수였다”고 하며 “분단을 직접 겪어보지 않은 지금 세대에게는 통일이 가슴에 와 닿지 않고 절실하지 않은 것이 당연한 현상”이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한국이 직면한 문제를 말하며 통일을 통해 우리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한국은 모방을 통해 성장을 이루어왔는데 모방에는 한계가 있고 창조를 통해서만 이를 극복할 수 있다”고 하면서 “국내 저성장의 한계를 과거에는 식민지화 등 영토 확장을 통해 벗어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창조를 통해서만 저성장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특히 “이를 위해서는 교육, 제도 등 사회의 변화도 함께 일구어 가야 한다”고 말한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저성장 국면을 맞은 한국에서 통일은 양적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회이고, 사람들이 서서히 이것을 깨닫기 시작할 때를 대비해 통일의병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해주니 청년들도 “아하” 하며 공감했습니다.nbspnbsp여러 시간 버스로 달려 길림에 도착해 저녁 식사를 한 후 이번 역사기행에서 스님의 마지막 저녁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nbsp강의에서 스님은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천 및 과거의 실패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셨습니다. 강대국들의 역학 변화에 따라 한국이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 과거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역사로부터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등에 대해 스님은 열정적으로 강연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역사 공부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알려고 하는 지적 호기심의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과 미래에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답을 찾는데에 과거의 경험을 살려서 좀 더 정확하고 알맞은 답을 찾기 위해서입니다.nbspnbsp조선은 명나라에 대해 사대의 예를 취했다고 하죠. 명나라는 그 당시에 세계 최대 강국이였습니다. 그런 중국과 우리가 같이 살면서 그 문명을 받아들였는데 거기다가 임진왜란 때 일본이 우리 나라를 침공했는데 명나라가 원군을 파견해서 막아주기도 했었죠. 명나라는 일본의 조선 침략을 막는데 국력을 많이 낭비했기 때문에 명나라 자국의 관리는 되었지만 변방의 관리는 소홀하게 되었고 그 소홀한 틈을 타서 청나라가 일어난 겁니다.nbspnbspnbsp그 때 토요도미 히데요시는 조선 사람으로서는 생각도 하지 못한 명나라를 정벌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조선에게 ‘야, 우리는 명나라를 침공할테니 너희는 길을 열어주라’ 이렇게 말한 겁니다. 그런데 조선은 자신이 부모처럼 생각하는 명나라를 치겠다는데 그 요구를 들어줄 리가 없었겠죠. 그래서 결국 조선이 공격의 포인트가 된 것입니다. 어찌보면 명나라의 대리 전쟁을 해준 셈이 된 것이죠. 그래서 명나라가 조선을 도와준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였습니다. 조선이 패하게 되면 결국 명나라에게 피해가 오기 때문입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조선을 도와준 것이 아니고 어쩌면 우리가 명나라를 위해서 방패 막이가을 되어 준 것입니다.nbsp이럴 때 과연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옳으냐? 그러나 그 시대로 돌아가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어요. 명나라와 조선의 관계, 조선 관리들의 의식구조, 이런 것들을 생각할 때 감히 왜인 오랑캐가 부모 국인 명나라를 치겠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얘기였고, 그런 불충한 나라에게 우리는 길도 비켜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유 방식으로는 어쩔 수 없던 것이였습니다. 그러나 지나놓고 보면 ‘우리는 그 일에 관계가 없으니까 너희끼리 싸우든지 말든지 해라. 그러나 우리 영토 안에 들어오는 것은 안 된다’ 이렇게 할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죠. 그런 자주성이 당시 우리들에겐 전혀 없었다는 것입니다. 명나라는 곧 우리 나라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어쨌든 임진왜란에서 일본의 도전은 실패로 끝났습니다.nbspnbsp일본의 침략은 막아내었지만 국토는 엄청나게 황패화 되었죠. 조선, 명, 일본이 싸우는 틈에 만주 지역에 대한 관리가 비니까 이곳에서 여진족이 다시 일어나서 청나라를 세웠습니다. 청나라는 똑같이 일본처럼 우리에게 ‘명나라와 단교하고 우리와 관계를 맺자’고 요구했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조선의 관리들은 여진족을 야만인으로 봤거든요. 그런 여진족이 ‘내가 형님할게. 니가 동생해라’ 하니까 엄청 기분 나빠 한 겁니다. 그래서 ‘No’ 했더니 청나라의 침공을 받아서 완전히 굴복해서 신하가 되어버렸습니다.nbspnbspnbsp그러나 그 때는 명나라가 지고 청나라가 뜰 것이라고 아무도 예측을 못한 겁니다. 만주의 여진족이 일어나서 중원을 점령할 것이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죠. 그런데 역사는 실제로 그렇게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청의 속국이 되었는데, 청이 다시 기울기 시작하고 일본이 다시 일어나서 조선을 두고 청과 대립을 하게 되었죠. 그럴 때 다시 우리는 청이 지는 해이고 일본이 뜨는 해라는 것을 내다보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포지션을 가져야 이 기회를 활용해서 청으로부터 독립할 수 있고, 독립함과 동시에 자칫 잘못하면 일본에게 먹힐 수 있으니 일본으로부터의 위험은 어떻게 방지할 것인지 예상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사람들은 청으로부터 어떻게 독립할 것인가만 생각했지 일본이 어떤 위협이 될 것인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반면 수구파들은 일본이 우리들에게 위험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알았지만 청이 멸망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청은 몰락하고 우리는 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하게 되었죠.nbspnbsp일본의 식민지배를 당했을 때 우리는 독립운동을 했는데, 이 때도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고 일본이 중국과 전쟁을 해서 이기고 일본이 베트남, 미얀마, 필리핀까지 지배하니까 일본이 마치 세계를 재패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도 1940년대로 들어오면서 거의 다 친일로 바뀌어 버립니다. 희망이 없어졌기 때문에 일본에 협력하는 수 밖에 없다고 여긴 겁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도 그 때 모두 자진 패간 했거든요. 기미독립선언에 서명했던 대다수의 사람들도 일본에 협력하게 됩니다. 조금만 참으면 독립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절대로 넘어가지 않았겠죠. 그런데 사실은 1945년에 일본이 패망하잖아요. 5년 앞을 못 본 겁니다.nbspnbsp지금 시대에서 다음은 어떻게 될까요? 중국이 뜨는 해로 올라올 것이고, 미국은 지는 해로 가게 되겠죠. 그러나 소비에트처럼 중국이 뜨다가 가라앉고 미국이 패권을 유지할지, 이번에는 확실히 중국이 뜨고 미국이 가라앉을지는 또 지켜봐야 할 일이지만요. 아무튼 이런 세력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이 지금입니다. 이런 시점에 잘만 하면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할 수 있겠다는 것입니다. 이미 판이 짜여지면 분단이 고착화되는데, 이런 세력 변화가 일어날 때는 잘만 하면 통일을 할 수가 있는 겁니다. 즉 미국의 단독 판에서 미국과 중국의 판으로 새롭게 짜여질 때 이것이 고정화되면 다시 몇십 년은 꼼짝할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런 세력 변화의 기회를 활용할 시기는 아주 짧습니다. 우리가 마음 먹는다고 언제든지 통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nbspnbspnbsp이런 좋은 기회가 왔는데 문제는 이런 좋은 기회를 활용할 수 있는 주체 세력이 지금 없는 것입니다. 북한은 예전에는 통일의 주체 세력으로 역할을 했는데 지금은 자신들의 체제 방어에 급급하고, 남한은 역량은 되는데 과거 체제 유지에 급급했던 습관이 남아서 아직도 북한에 대한 두려움으로 체제 유지에 급급합니다. 즉 이제 우리의 책임은 남한을 어떻게 발전시키냐 만이 아니라 북한까지 포함한 전 민족적인 이익을 어떻게 유지하고 발전시키느냐 이렇게 책임의 범위가 넓어져야 하는데, 지금 민족 전체에 대한 아무런 책임 의식을 안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통일의 기회는 왔지만 통일의 길로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그래도 평화는 유지되었는데 이제는 평화마저도 깨지고 있는 겁니다.nbspnbsp만약에 북한에 친중 정부가 들어서서 우리가 미국에게 하듯이 북한이 안보도 중국에게 맡기고 핵우산도 쓰게 되면 첫째 통일은 물건너 가게 되고, 둘째 평화도 유지되기 어렵습니다. 미중의 세력 충돌이 남북의 충돌로 나타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현재 남북의 갈등은 옛날에 비해서 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10년 전에 평화재단을 세우고 이에 대한 대비를 했지만 이명박 정부가 이렇게까지 반통일로 가버릴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습니다.nbspnbsp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미래 이익을 지혜롭게 찾아낼 것인가가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러나 사실 분단된 한국에서는 방법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안보와 성장은 중국 없이도 어렵지만 그렇다고 미국 없이도 어렵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붙는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판이 짜여지기 전에 통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중국이 갖는 앞으로의 위험에 대비해서 미국과의 관계도 잘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시키는 대로 하는 종속적 한미 관계가 아닌 한반도에서는 우리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자주적 한미 관계를 갖고 있어야 합니다. 즉 옛 친구도 잘 관리하고 새 친구도 잘 관리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아요. 양다리를 잘 못 걸치면 낭패 당하기기 쉽죠.nbspnbspnbsp그래서 남한이 지혜가 있다면, 우선 남북 관계를 초보적으로라도 풀어야 합니다. 너무 남북 관계를 많이 풀면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을 흐트러 놓으니까 미국에게 뒷통수를 맞게 되요. 미국 입장에서는 남북 관계의 긴장이 고조되어야 한국 사람들이 일본 사람들과의 군사 협력에 동의하겠죠. 이 흐름을 깨기 위해서는 남북 간의 긴장을 약간 낮추면 한일 간의 군사 협력을 할 필요성이 떨어지게 되니까 국민들이 동의를 안 하게 되어 미국이 무조건 밀어 붙이기가 어렵게 됩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nbspnbsp그리고 일본과의 관계를 적대시 하면 이것도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어긋나니까 군사적인 관계만 빼고 다른 것은 오히려 과거사 문제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본과의 협력을 더욱 강화해 나가면 됩니다. 한미 동맹만 갖고도 충분히 북한에 대응을 할 수가 있는데 여기에 일본의 군사적인 도움까지 받을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 분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과의 군사 협력은 중국이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중국과의 우호 협력을 위해서도 한일 간 군사 협력은 하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nbspnbsp그러나 이런 문제에 대한 바른 답을 찾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옛날 역사를 살펴보고 지금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찾기 위해서 역사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nbspnbsp특히 스님은 강대국과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에 시간을 많이 할애해 설명했는데, 강대국들의 세력 판이 이미 짜여 졌을 때는 변화를 꾀하기가 어려우니 기존의 판이 무너지고 새로운 판으로 고착되기 전에 통일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는 대목에서 청년들도 공감하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우리 국민들이 갖고 있는 세가지 열등의식이 있다고 하면서 이 열등의식을 극복하고 통일 한국을 만들고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여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는 가슴 뛰는 비전을 제시해 주었습니다.nbspnbsp“우리 국민들은 민족적으로 세 가지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첫째, 상고사에 대해서 중국 문명의 아류라고 생각하는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둘째, 근대사에 있어서는 일본의 침략을 받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셋째, 현대사에 들어와서는 서양 문명을 벤치 마킹하고 모방하고 있기 때문에 서양에 대한 열등의식이 있습니다. 열등의식은 심리적으로 병에 속합니다. 이것이 극복되어야 심리가 덜 불안해지고 떳떳함이 생깁니다.nbspnbspnbsp이 중에 서양으로부터 갖는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이것은 역사기행의 주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반드시 우리가 극복해야 할 일입니다.nbspnbsp그리고 일본으로부터의 열등의식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우리의 독립이 외세에 의해서 저절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가 독립운동에 소홀한 것은 아니였음을 알아야 해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통일 만큼은 우리 손으로 이뤄내면 일본에 대한 피해의식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많이 벗어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독립운동 유적지를 우리가 살펴보는 것입니다.nbspnbsp그리고 고구려는 수나라와 당나라의 100만 대군을 막아내었습니다. 중국의 주변에서 이런 정도의 전투력을 갖는다는 것은 굉장히 드문 경우입니다. 세계 최강이였던 원나라와도 고려 시대 때 90년이 넘게 전쟁을 했습니다. 다른 나라와 달리 쉽게 복속되지 않았습니다. 발해는 당나라가 한참 번영할 시기에 당나라의 추격군을 물리치고 나라를 새로 만들어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보여주는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였습니다.nbspnbsp그런 고구려는 도대체 어디서 이런 전통을 가져왔느냐. 고구려의 뿌리는 부여였습니다. 또 유물과 유적으로는 배달 문명을 계승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역사를 연결해보니 고구려의 웅장한 기상은 부여를 계승하고 조선을 계승하고 배달 문명을 계승한 것이구나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문명과는 처음부터 갈래가 다른 문명이었음도 알았습니다. 우리는 중국 문명의 아류가 아닙니다. 모든 면에서 다르지만 인접했기 때문에 서로 교류 협력했던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고구려를 보면서 민족의 뿌리에 대해 정리를 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고구려는 다시 신라로 계승된 것이 아니라 발해로 계승되었습니다. 발해 이후부터 우리 역사의 단절이 시작되었습니다. 신라는 또 조상 없는 역사로서 부강하게 등장했습니다. 이 연결 고리가 고구려에서 고려로 연결되게 됩니다. 그 사이인 발해를 고려로 연결하고, 신라를 고구려로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고구려에서 고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큰 혼란을 겪었지만 그러나 대를 이어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또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면서 역사적 위기를 겪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해서 남북 간이 멀어지면 북한이 멸망하고 중국으로 흡수되어도 남한에서는 ‘적이 없어져서 좋다’ 이렇게 생각해버릴 수도 있잖아요. 그러면 발해 시대의 실수를 되풀이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민족사의 왜곡이 또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nbspnbsp그래서 우리는 통일로 나갈 때 남북의 갈라진 두 역사를 모두 계승해 주어야 합니다. 남한이 중심이 되어 통일을 하더라도 북한을 포용해서 그 역사를 같이 계승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독립운동사가 완성이 됩니다. 북한의 역사를 없애버리면 독립운동사가 아주 빈곤해지기 때문입니다.nbspnbsp이제 우리의 주 과제는 통일입니다. 통일은 우리 삶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통일로 가는 핵심 키는 남한 정부입니다. 만약 남한에 통일의 주체 세력이 형성되면 당연히 북한을 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영토만 통합할 것이 아니라 민족사도 통합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통일 한국은 다시 한일 간의 협력을 통해서 또 한중일 삼국 간의 협력을 통해서 또 미국과의 협력을 통해서 동아시아의 평화를 정착시키고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새로운 길을 열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우리는 창조성을 확보해서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웠고, 로마도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웠는데, 왜 우리가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우지 못하겠습니까. 반도 국가는 양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문명의 꽃을 피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와 로마도 반도 국가였습니다.nbspnbsp노력하다가 안 될 수도 있지만 젊은이가 이런 꿈이라도 가지고 인생을 살아야 하지 않겠어요? 이런 꿈도 없이 돈만 벌어서 뭐 하려구요? 이런 인생의 목표가 있다면 삶이 전혀 달라집니다. 만약 의사라면 환자 치료도 열심히 하지만 돈이 벌리면 그 돈 갖고 북한의 의료 개선에 투자를 할 것이고, 역사 연구에 재정적인 지원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저는 이런 것을 꿈꾸며 동북아 역사기행에 여러분들을 초청했는데 여러분들은 백두산 천지 보러 온 것 같아요. nbspnbspnbsp그래서 여러분들이 인생의 다이어트를 좀 하면 좋겠어요. 여러분들은 지금 너무 비만적인 삶을 살아요. 삶을 다이어트해서 심플하게 만들면 시간이 좀 남게 됩니다. 돈도 좀 남게 됩니다. 그 시간과 돈을 통일이라는 우리들의 목표를 향해 좀 쓰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래서 다른 것은 몰라도 선거 때가 되면 손가락만 좀 저한테 빌려주세요. 손가락만 좀 잘 놀려도 세상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nbspnbsp이제는 총 들고, 돌멩이 들고 안 싸워도 세상 변화가 가능합니다. 그것은 우리 선배들이 우리 사회를 민주 사회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손가락만 잘 놀리면 되는데 대신 나 혼자만 잘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소액주주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동의하는 인원을 많이 모아야 합니다.nbspnbsp이런 목표를 딱 갖고 살면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 하고 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필요할 때 손가락을 좀 빌려야 되기 때문이죠. 이 목표를 달성시키기 위해서 주위 사람들에게 잘하라는 말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손가락을 좀 빌릴려면 평소에 잘 해야 합니다. 평소에 말도 안 듣고 맨날 싸우면 결정적인 순간에 그 얘기를 꺼내면 미워서 엉뚱한 사람에게 투표합니다. 그러나 이런 목표 의식이 분명히 있으면 인간 관계에서의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모두 고마운 존재가 되어 버립니다. 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내가 꿈꾸는 문명의 전환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되어 버리기 때문에 인간 관계를 맺는 방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nbspnbspnbsp그러니 매일 절을 하는 것만이 수행이 아니라 이렇게 관점만 바꾸어도 벌써 여러분들의 삶의 자세가 달라질 수 있는 것입니다. 때가 다가오고 있으니 그런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그리고 이런 기적이 지속되려면 한 세대가 노력해야 합니다. 한 세대가 노력하면 저는 그런 기적이 정말로 온다고 생각합니다. 그 과정을 모르는 사람이 볼 때 기적이지 그 과정을 아는 사람이 볼 때는 기적이 아닙니다. 기적은 하나 하나 쌓아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그냥 주어지지 않습니다.”nbsp강연은 밤 11시가 넘어서까지 이어졌습니다. 청년들은 졸린 눈을 부릎뜨고서라도 강연에 집중하기 위해 벌떡 일어서서 강연을 듣는 열정을 보여주기도 했습니다.nbspnbsp무엇보다 스님이 동아시아 공동체를 만들어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고 하자 청년들의 얼굴에도 희망이 엿보였습니다. 통일 더 나아가 동아시아 공동체 건설이라는 문명 전환의 원을 세우면 인간관계에서 오는 사소한 문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고 하면서 통일을 실현할 정부를 선출하기 위해서는 많은 이들의 도움이 필요하니 평소에 사람들에게 잘해줘야 한다고 하자 청년들 모두 큰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기적을 만들고 이를 지속하려면 한 세대가 힘써서 노력해야 한다는 스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며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많은 청년들이 스님의 강연을 듣고 나서 조금 더 활기있어지고 자긍심이 생긴 분위기가 되었는데, 한 청년은 “이번 역사기행을 통해 우리 청년들 모두가 스님으로부터 열등의식 극복이라는 집단적인 심리 치료를 받은 것 같다”는 소감을 말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내일은 버스로 장시간 이동하기 때문에 길림의 새벽 시장에 들러 각자 아침과 점심 식사 끼니를 구입한 후 오후에는 고구려의 성곽이 가장 잘 남아있는 백암산성에 도착해 고구려의 기상을 마지막으로 느껴보면서 역사기행의 모든 일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nbspnbsp그리고 스님은 내일 있을 정토회 천일결사 86차 백일기도 입재식에 참석하기 위해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팀 보다 하루 일찍 한국으로 귀국할 예정입니다.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임여원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08.15. 36,469 읽음 댓글 27개

2015.8.13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 독립운동의 역사

▲ 발해 흥륭사의 대불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청년 동북아 역사기행 5일째를 맞이하여 발해의 수도인 상경용천부를 둘러본 후 봉오동 전투 기념비를 참배하고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했습니다.nbspnbsp동북아 역사 대장정 넷째날이 밝았습니다. 어제 백두산 천지를 보고 와서 즐거운 마음에 4시 40분까지 버스 탑승을 하고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였습니다. 오늘은 발해의 유적을 보러 발해진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아침 식사는 버스에서 옥수수로 가볍게 먹었습니다. 발해진으로 이동하던 길에서 오전 6시쯤 요전자 24개석에 들러 다함께 유적지를 둘러보았습니다.nbspnbsp▲ 요전자 24개석nbsp요전자 24개석은 돈화시 대산저자향 요전자촌 동쪽의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발해시대의 유적입니다. 유적은 한적한 시골 마을의 옥수수밭 한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마을의 골목길로 들어서니 코스코스가 예쁘게 피어 있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nbspnbspnbsp아직 이 유물의 사용 용도는 밝혀지지 않고 있어서 스님은 “오늘 여러분들 중에 누군가가 이것을 밝혀내면 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을 것” 이라며 웃었습니다.nbspnbsp다시 버스로 이동해 오전 7시 30분경 발해 시대의 수도였던 상경용천부 왕궁터가 있던 곳을 둘러보았습니다. 상경용천부는 발해의 세 번째 및 다섯 번째 수도로서 약 162년간 발해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었던 곳입니다. 우선 상경용천부 전체 모형이 있는 박물관에 들러 발해의 영토와 외성과 내성 및 궁성의 모습 등을 살펴보며 스님의 설명을 들었습니다.nbspnbsp▲ 상경용천부의 동궁 옆에 위치한 연못인 ‘어화원’이 있었던 자리를 둘러보고 나오는 길nbsp스님은 발해의 내성이 외성의 뒤쪽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그 이유는 “옛날 문명에서는 앞으로만 공격하고 뒤로 공격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것이였습니다. 왜 신분의 차이가 나는 이민족에게 쉽게 망하는 약점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청년들이 “설마” 하며 웃음을 짓자, 스님은 즉문즉설에서 보듯이 관점의 전환은 쉽지 않음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우리의 사고가 그렇게 작용한다는 것을 알고나니 평소 우리가 풀 수 없는 문제도 관점만 바꿀 수 있다면 쉽게 풀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 오봉루의 양쪽으로 난 문nbsp이어서 상경용천부 일대를 거닐며 얼굴 모양의 연못으로 만들어진 어화원과 오봉루, 회랑의 주춧돌, 궁전터, 성터 등을 직접 발로 밟고 손으로 만져보며 1000년 전 발해 당시를 상상해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먼저 양 옆으로 문이 나 있는 오봉루의 성벽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nbspnbsp그리고 수풀이 우거진 옛 발해 궁터를 거닐며 그 옛날의 웅장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스님은 회랑의 주춧돌을 가르키며 규모 면에서 엄청나게 크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지금 우리는 궁성의 서쪽 회랑에 왔습니다. 회랑은 보통 비도 피하고 햇빛도 피하는 역할을 하죠. 여기도 주춧돌이 있고, 저기도 주춧돌이 있고, 저기도 주춧돌이 또 있죠. 여기에 집을 지어서 가운데로 다니는 것이 회랑이죠. 그런데 이곳 회랑은 길이 세 개예요. 그래서 회랑의 폭이 엄청나게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죠.nbspnbsp▲ 서쪽 회랑이 있었던 자리nbsp가운데는 임금이나 왕족들이 다니는 길이고, 오른쪽은 시녀들이 다녔거나, 왼쪽은 대신들이 다녔거나 했을 것 같아요.nbspnbsp여러분들이 실눈을 감고 가만히 걸었을 때 회랑 바깥쪽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전생에 하인이였고, 여기 안쪽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궁중에 살았던 궁녀였고, 가운데 길로 가는 것이 편안하면 왕족입니다. 하하하.” nbspnbsp스님이 이렇게 농담을 하자 청년들은 웃으면서 서로 가운데 길로 걸어가려고 했습니다.nbspnbsp이렇게 오봉루, 제1궁전부터 제2궁전, 제3궁전, 제4궁전, 제5궁전과 북문까지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nbspnbsp▲ 1,2,3호차 차량별로 단체 사진nbsp▲ 제5궁전 터에서 바라본 제4, 제3, 제2, 제1 궁전 터의 모습nbsp다시 성터를 걸어나오는 길에 꽃이 만발한 제1궁전 앞마당 터에 앉아 무변심 법사님의 노래를 들었습니다.nbspnbspnbsp법사님의 노래를 들으며 성터를 바라보니 그 당시 동북아 최대 영토를 가졌던 대국의 느낌과 감동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었습니다. 궁터 안에는 예쁜 꽃들이 많이 피어있어서 청년들의 얼굴에도 꽃이 피었습니다.nbspnbspnbsp궁성을 나와 다시 버스를 타고 북문에서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큰 호수인 현무호를 보았습니다. 현무호는 상경용천부 왕궁터의 성벽을 쌓는데 쓰인 돌을 채석하느라 생긴 얕은 호수라고 합니다. 호수의 크기를 보며 성벽을 쌓는데 얼마나 많은 현무암이 들어갔는지 짐작해 볼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현무호nbsp다음은 상경용천부 외성 안에 위치한 흥륭사를 방문했습니다. 흥륭사는 발해 시기에 건립된 절인데 발해가 멸망한 후에 불이 나서 없어졌다가 청나라 강희제 때 다시 복원된 곳입니다. 석등의 크기로 봐서 대웅전이 얼마나 컸을까 상상할 수 있었습니다.nbspnbsp▲ 흥륭사nbsp스님은 발해 시대의 대불이 모셔져 있는 법당으로 들어가 사시불공을 올린 후 청년 역사기행팀을 위해 발원과 축원 기도를 해주었습니다. nbspnbsp“시방삼세 부처님과 팔만사천 큰 법보와 보살성문 스님들께 지성귀의 하오며 간절히 발원하옵나이다. 발해 시대 상경용천부 내에 소재한 흥륜사 대불 앞에 선 저희들은 한국에서 온 청년정토회 대중 일동과 청년 포럼 대중 일동과 청년리더십아카데미 대중 일동 등 130여명이옵니다. 발해 멸망 이후 1100년이 지난 지금에야 이렇게 부처님을 찾아 뵙고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예불을 드리오니 지난 천년 동안 저희가 찾아뵙지 못함을 굽어 용서하옵소서.nbspnbspnbsp때가 이르러 이제 이렇게 찾아 뵙고 두 손 모아 합장하오며 간절히 발원하옵나니 잃어버린 역사를 복원하고 갈라진 남북을 통일하고 온갖 갈등 속에 전쟁의 위험이 도사리는 한반도의 평화를 발원하옵나니 저희의 이 귀한 발걸음과 간절한 발원을 어여삐 여기시어 증명하여 주옵시고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한나라를 계승한 배달 나라, 배달 나라를 계승한 조선 나라, 조선 나라를 계승한 부여 나라, 부여 나라를 계승한 고구려 나라, 고구려 나라를 계승한 발해 나라, 하늘로부터 면면히 이어져온 천손의 역사가 발해 멸망 이후 천년 동안 후손을 잃고 역사를 잃어버리고 민족 혼이 없는 백성으로 떠돌며 조그만 반도 이남에 갖혀 동북아 대륙의 변방으로 떨어져 스스로를 약소 민족이라 생각하고 용기를 잃고 실의에 빠지고 사대에 치우쳐 남의 손으로 무슨 일이든지 할려고 했었습니다. 오늘 발해의 기상을 받아 모든 부족함을 떨쳐버리고 스스로 자존심을 회복하여 한반도의 평화를 정착하고 남북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 이웃 나라들과 함께 손을 잡고 동아시아 문명의 꽃을 피워 인류 문명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을 발원하옵고, 저희 ?은이들이 이런 기상을 갖고 큰 원을 발하고 그 발원을 성취하기 위하여 살아갈 것을 맹세하오니 제불 보살님들께서는 이 발원을 증명하여 주옵시고, 천룡팔부 신중님들과 조상 모든 신들은 이 발원이 성취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소서.nbspnbspnbsp오늘 이와 같이 발원한 인연 공덕으로 동북아 역사기행에 참여한 청년 대중 일동은 사대가 강건하고 정신이 맑고 뚜렷하여 자기가 이루고자 하는 원을 성취할 수 있도록 옹호하여 주옵시고, 과거 생애 지은 잘못으로 받아야 할 인연의 과보가 있다면 기꺼이 받아 넘기는 용기가 있고 갖가지 재앙이 물러날 것을 발원하옵나니 이 젊은이들을 굽어살펴 주옵소서.nbspnbsp이 역사기행이 아무 탈 없이 무사히 끝날 수 있도록 천신과 조상신들은 옹호하여 주옵소서.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석가모니불, 나무 시아본사 석가모니불.”nbsp발해의 기상을 이어 받아 남북 통일을 이루고 동북아 공동체로 나아가 아시아 문명의 꽃을 피워보자는 스님의 간절한 발원을 나의 발원으로 되새겨보며 마음이 숙연해지기도 했습니다.nbspnbsp대불이 모셔진 법당 밖으로 나오니 큰 석등이 그 위용을 보여 주었습니다. 특히 석등은 교과서에 소개되어 있어서 발해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유물 가운데 하나인데 대중들은 석등 앞에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발해 시대의 대표적인 유물, 석등nbsp흥륭사를 나와 발해진에서 점심 식사를 하였습니다. 11시 30분경 식사를 마치고 도문으로 출발했습니다. 버스에서는 그동안 역사기행을 하며 궁금했던 점에 대해 묻고 답하는 즉문즉설 시간을 가졌습니다. 한 청년이 “스님이 북한돕기를 하시는 열정은 어디서 나오시는지 궁금하다”고 묻자, 스님은 “사람이 굶어죽는 모습을 직접 본 경험이 컸다”고 이야기해 주어서 경험이야 말로 가장 큰 원동력이 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후 3시경에는 1920년대 있었던 대표적인 항일독립운동 전투터인 봉오동 전투 기념비를 참배했습니다. 봉오동은 1920년 6월 7일 독립군의 홍범도 장군이 반일 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핀 곳입니다. 역사기행단은 먼저 기념비에 새겨진 내용을 함께 읽으며 그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nbspnbspnbsp▲ 봉오동 전투 기념비nbsp“1920년 6월 7일 반일명장 홍범도를 nbsp사령으로 최진동을 부사령으로 한 조선민족독립운동 대한북로독군부는 협산벽곡 봉오골에서 두만강을 건너 침입한 야스가와소좌가 거느린 일본군 19사단 소속부대, 아라요시 중위의 남양경비대와 싸워 세계를 진강한 반일무장투쟁의 첫 봉화를 지었다. 반일 독립군은 빈틈 없이 매복전을 쳐놓고 있다가 오후 한시경 일본군이 기여들자 삼면고지에서 일제히 불벼락을 퍼부었다. 이 맹격전에서 일본군 150여명을 사살하고 10명을 부상 입혔으며 보총 60여자루와 기관총 3정 및 권총과 탄약 등 무기를 로획하였다. 연번반일투쟁에서 거둔 이 승첩은 일본 침략자들의 기염을 여지없이 꺽어 놓았으며 인민 대중의 반일 투지를 크게 북돋아주었다.”nbsp그리고 이 전투 이후 일제는 경신참변을 일으켜 민간인 3600여명을 학살하였다는 얘기를 듣고 당시 간도에서 독립군들을 위해 따뜻한 밥과 잠자리를 제공하고 희생된 수많은 조선족 분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nbspnbspnbsp봉오동 전투터는 도문시에서 서북쪽으로 7.5km 떨어져 있는데 지금은 도문시 ‘봉오동 저수지’가 축성되어 전투가 일어났던 현장은 안타깝게도 수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봉오동 전투 기념비 앞에서 스님께 봉오동 전투의 경과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후 다함께 그 뜻을 기리는 묵념과 제사를 함께 지냈습니다.nbspnbspnbsp참배를 마친 뒤 다시 버스를 타고 도문으로 이동했습니다. 도문시에서 두만강을 따라 10여분 올라가니 한반도 최북단 마을인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를 먼 발치서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두만강을 끼고 우리 나라 최북단을 바라보니 마치 지도 속에 있는 기분이 들었습니다.nbspnbspnbspnbsp▲ 한반도 최북단 마을 함경북도 온성군 풍서리nbsp도문시는 두만강과 부르하퉁하가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조선말 가렴주구와 일제 침략을 피해 이 지역으로 사람들이 피난오면서 이곳에 많은 조선족들이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만강을 바라보며 ‘눈물 젖은 두만강’과 ‘라구요’를 함께 부르면서 다시한번 울컥한 마음이 들었고, 다시 한번 통일에 대한 열기가 마음 속에 뜨겁게 올라왔습니다.nbspnbspnbsp▲ 두만강nbsp다음으로 인근의 조중우호다리를 찾았습니다. 조중우호다리는 민족의 삶과 애환이 점철돼 있는 곳입니다. 두만강 유역의 여러 세관 중에서도 북한과 인적 물적 교류가 많은 곳이기도 합니다. 도로와 함께 철도 교통도 편리한 요충지입니다. 이곳에서 좋은벗들 활동을 했던 이승용 선생님은 대중들에게 “북한이 고난의 행군시절 이곳으로 수많은 난민이 건너왔다”고 하면서 당시에 난민들이 중국으로 넘어와 겪어야 했던 고통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nbspnbspnbsp▲ 조중우호다리nbsp다음은 오늘의 마지막 일정인 연길로 출발했습니다. 연길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인민 정부의 소재지이며 자치주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입니다. 조선족이 인구의 59를 차지할 정도로 많은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연길의 한 북한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북한 식당에서 북한 종업원들을 만날 수 있었고, 식사 후에 ‘반갑습니다’ 라는 노래를 시작으로 북한 노래와 한국 동요들을 부르는 공연을 볼 수 있었고, 노래 부르는 북한 공연팀을 보면서는 통일이 되어 자유롭게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해 보았습니다.nbspnbsp식사 후 연길의 숙소에 도착한 스님은 동북아 역사기행 다섯 번째 주제로 ‘독립운동의 역사’에 대해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nbsp먼저 다양한 모습으로 전개된 독립운동을 통합해내는 힘이 부족했음을 언급하면서 지금의 우리는 어떤 점을 배울 수 있는지 말씀해준 부분은 많은 깨우침을 주었습니다.nbspnbsp“독립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자기 나름의 처지에 따라 무장투쟁을 하게 된 사람도 있고, nbsp공산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도 있고, 독립 준비를 해야 된다는 사람도 있고, 외교를 해야 된다는 사람도 있었던 겁니다. 미국에 간 사람은 미국에서 어떻게 무장 투쟁을 할 수 있었겠어요? 미국과 외교를 좀 잘해서 미국의 힘을 빌리려고 생각할 수 밖에 없잖아요. 그리고 만주로 건너가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어쨌든 총 들고 싸우는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겠죠.nbspnbspnbsp그래서 이 사람은 잘 했고, 저 사람은 못했다가 아니라 각각 다 자기 처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입니다. 이것을 종합해 보면, 외교도 해야 하고, 국내에서는 무장 투쟁을 못하니까 평화적인 운동을 해야 하고, 국경 넘어서는 무장 투쟁도 해야 하고, 그런 가운데 아이들은 교육시켜야 하고, 먹고 살아야 하니 산업은 진흥시켜야 하고, 모두 다 필요한 일들이었던 것입니다.nbspnbsp그런데 이렇게 서로 다른 것들을 인정하면서 서로 역할 분담을 하지 않고 ‘너는 틀렸다’ 고 하면서 갈등을 했기 때문에 똑같이 독립을 지향하면서도 통합이 되지 못하고 분열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 방식을 고집했기 때문입니다. 서울로 가기 위해서 춘천에서는 서쪽으로 가고, 수원에서는 북쪽으로 가고, 인천에서는 동쪽으로 가면 되는데, ‘동쪽으로 가야 되는데 왜 너는 북쪽으러 가자고 그러느냐?’ 이렇게 싸운 겁니다. 이건 싸울 일이 아니였어요. ‘너는 너 처지에서 산업을 진흥해라’, ‘너는 너 처지에서 외교를 잘 해라’, ‘너는 너 처지에서 무장 투쟁을 해라’ 이렇게 해서 모아내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수평적으로 같을 수는 없어요. 비중을 둬야 할 수 있습니다. 무장 투쟁을 1순위로 두되 외교도 한다든지, 비폭력 투쟁을 1순위로 하되 일부 소수 무장 투쟁을 한다든지 이렇게 역할 배치를 하는 것이 바로 정치입니다. 그런 정치력이 부족했습니다. 정치는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 관계를 조율하는 등 현실에서 가장 적절한 답을 찾는 것입니다. 절대적 선이란 정치에서 없습니다.nbspnbsp오늘날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친미파는 미국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고, 친중파는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고, 친북파는 북한의 이익을 대변하려고 하죠. 그런데 서로 다른 세력을 통합시켜서 우리의 이익을 최대화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nbspnbsp친미파가 미국을 설득하기 쉬울까요, 반미파가 미국을 설득하기 쉬울까요? 친미파죠. 북한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친북파가 설득하기 쉬울까요, 반북파가 설득하기 쉬울까요? 친북파죠. 그래서 우리는 친미파도 필요하고, 친북파도 필요합니다. 자꾸 저 사람들은 없어야 된다고 생각하면 안 돼요. 역할을 무엇으로 할 것이냐가 중요한 겁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대표적인 항일무장투쟁으로 기록된 청산리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전쟁을 과연 어떤 관점에서 조망해야 하는지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약 일주일 동안 청산리 지역 인근에서 벌어진 78차례의 전투를 통해 일본군 사망자만 1500여명, 부상자까지 포함하면 3300여명에 이르렀습니다. 즉 사단 병력의 4분의 1이 괴멸된 것입니다. 유격대에 불과한 독립군들이 일본의 정규군을 상대로 이뤄낸 성과이기 때문에 이 청산리 전투는 전쟁사에서도 길이 빛나는 일이 되었고, 한국 사람들에게도 큰 감흥을 준 것입니다.nbspnbspnbsp그런데 우리는 이러한 전투의 승리만 이야기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공격해서 승리한 것이 아니고 쫓겨 다니다가 반격을 해서 승리한 것이기 때문에 나중에 추격하는 정규군이 더욱 증강이 되고 그 성격도 더욱 악랄해졌습니다. 그래서 일본군들은 독립군도 쫓았지만 독립군을 협조했다는 명분으로 이곳에서 수십년을 대를 이어 땅을 개간하며 살아온 조선족 마을을 불질러 버리고 총을 쏘았습니다. 3600여명의 민간인이 학살 당하고 엄청난 재산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런 일본군의 만행을 우리는 ‘간도 참사’ 또는 ‘경신년 대참사’라고 부릅니다.nbspnbsp그래서 우리는 이곳에서 ‘청산리 전투에서 이겼다’, ‘봉오동 전투에서 이겼다’ 이것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살던 민간인들은 아무런 나라의 보호도 못 받고 착취만 당하다가 겨우 이곳으로 넘어와 자기 힘으로 살고 있었고, 이 분들 입장에서는 나라가 독립되든 말든 무슨 상관이 있었겠어요? 그런데 또 찾아와서 독립해야 된다고 해서 양식도 주고, 아들도 독립군으로 보내주고 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에 의해 독립군을 도와주었다고 목숨도 잃고 엄청난 재산도 파괴되는 고통을 겪게 된 겁니다.nbspnbsp그런데 이 사람들의 공로와 애환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이 없습니다. 김좌진 장군이 승리했다, 이런 이야기만 하잖아요. 백운평 골짜기에 20여 가구가 살았는데 독립군들이 찾아오니 밥을 해줄 수 밖에 없었겠죠. 그래서 독립군들은 밥 먹고 쉬고 올라갔을 뿐인데, 일본군이 추격해 왔다가 매복전에 당해서 사상자가 생기니까 산에서 내려오다가 화가 나 백운평 동네에 불을 지르고 ‘불이야’ 하고 뛰어나오는 마을 사람 100여명을 다 조준해서 쏴 죽인 겁니다. 이런 참사에 대해서는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이죠.nbspnbspnbsp그래서 전쟁은 이기고 지는 문제가 아니라 항상 비극을 초래한다는 것입니다. 이 전쟁에 참여한 일본 군인들도 나쁘다고 하지만 그 사람들도 사실 무슨 죄가 있어요? 일본 군국주의에 의해 강제 징집을 당해서 그 먼 곳까지 와서 골짜기에서 개죽음을 당한 것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는 이 전쟁을 새롭게 조망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어쨌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기 위해서는 이런 희생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록되어 있는 몇몇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 보다 열배 백배 천배 더 많은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희생 위에 오늘 우리들의 삶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nbspnbsp역사에 기록된 사람들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더 많은 희생이 있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은 큰 울림으로 다가왔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분단으로 인해 독립운동사가 어떻게 왜곡이 되었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었습니다. 독립운동사의 재정립 필요성과 이를 통해 오늘날 우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해 보는 소중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nbspnbsp“전 세계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들은 그 처지에 맞게끔 효과적으로 활동을 한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승만은 무장 투쟁을 안 했나?’ 이렇게만 생각합니다. 이곳 만주는 조국과 가까워서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거리입니다. 또 강을 사이에 두고 있고, 이곳은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는 정글입니다. 은폐하기가 쉬웠죠. 그리고 바로 여기에 우리들의 동포가 살고 있었습니다. 유격전을 하기 위해서는 민중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한일 합방이 될 당시에 북간도와 서간도 합해서 이미 30만 가까이가 살고 있었습니다. 이곳은 무장 투쟁의 좋은 근거지가 될 수 있었던 겁니다.nbspnbspnbsp아무튼 미국에 가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장개석 밑에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모택동 밑에서 하려고 했든, 러시아 밑에서 하려고 했든, 국내에서 독자적으로 하려고 했든, 사회주의를 통해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민족주의로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든, 거기에 관계 없이 조선 민족이라면 누구나 독립을 원하고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힘으로 독립을 하지는 못했습니다.nbspnbsp그러데 남북이 갈라지니까 남북이 서로 ‘내가 더 민족사적 정통성을 갖는다’고 경쟁했죠. 그러니 남한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독립운동 했던 것을 가르치면 이승만 정권의 정당성이 훼손이 되니까 이 부분을 다 빼버린 겁니다. 천안 독립 기념관에 가보세요. 이에 대한 내용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의 무의식 세계에는 독립운동을 한 것이 별로 없어요. 유관순 누나가 만세 불렀다, 윤동주 시인이 시를 썼다, 이런 것 외에는 기억하는 것이 거의 없잖아요. 그 정신은 숭고했지만 그것이 식민지배를 종식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 것은 아니거든요. 그러면 우리는 독립운동을 안 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엄청난 독립 투쟁을 하고 희생을 치뤘지만 분단 속에서 자기 체제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이 부분들 다 제외시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독립운동의 빈곤감을 갖고 있습니다.nbspnbsp반대로 북한은 이런 독립운동을 다 인정하면 김일성의 신화가 존재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다 없애버리고 오직 독립운동은 김일성 혼자 한 것처럼 되어버린 겁니다. 그래서 북한 사람들은 김일성이 독립운동 한 것만 알지 나머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이렇게 남북이 모두 역사 왜곡이 심각한데 이것을 나무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체제 경쟁 속에서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nbspnbspnbsp이로 인해 우리는 근대사에 대한 열등 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일본에게 져서 나라를 빼앗겼다는 것도 열등 의식이지만 힘이 부족해 나라를 빼앗겼지만 어떤 노력을 해서 되찾았느냐 하는 이것도 없다 보니까 더욱 열등 의식을 갖게 된 겁니다. 또 해방이 주어졌는데 우리는 아무 것도 안 했는데 미국이 해방을 해주었다고 생각하니까 다시 미국에 대해 사대가 더 커진 겁니다. 그래서 어려움이 생겨도 우리가 스스로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미국 눈치만 보고 그러잖아요. 미국의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예요.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요. 그러나 이런 근현대사의 왜곡은 분단 때문에 생긴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nbspnbsp이 왜곡을 어떻게 극복할 것이냐? 쉽지 않아요. 상고사 부분은 유물과 유적, 사례 등 많은 것을 연구해야 극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러나 근현대사 부분은 통일되기 전까지는 극복되기가 어렵습니다. 북한이 정당성이 있었다고 얘기하면 금방 종북주의자가 되고, 또 현재 북한 정부는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고 얘기하면 이제는 반북주의자가 되어 버립니다.nbspnbsp역사는 사실에 근거해야 되는데 남한과 북한의 인식이 너무 차이가 납니다. 남한에서는 김일성은 만주의 마적당 출신이고 김일성 장군이라는 독립운동가가 있었는데 그 사람 이름을 차용해서 거짓말을 했다고 하고, 그런데 북한에서는 모든 독립운동은 김일성 장군님이 다 했다고 합니다. 조금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고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는 겁니다. 김일성 주석이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은 인정하고, 또 반대로 보천보 전투가 국경을 넘어가서 초소 하나 습격한 것이지 무슨 큰 전투는 아니였고, 홍기와 전투는 100여명 정도 사상한 규모 있는 전투였고, 또 1940년대에 그 정도의 성과를 낸 것은 굉장한 일이었고,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독립이 된 것은 또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사실에 근거해서 인정할 것은 인정해야 하는데, 독립운동 했다고 인정하면 친북주의자가 되고, 별로 큰 성과가 아니라고 하면 수령님을 모독한 사람이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정치 놀음입니다. 그래서 독립운동사를 재정립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nbspnbspnbsp그리고 이 독립운동이 있기 까지는 그 전의 이민사와 의병운동을 알아야 합니다. 그 배경을 알려면 1800년대 이후의 민중의 고통의 역사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역사들을 함께 살펴보면서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떤 일을 해야 하며 어떤 점에 유의해야 하고 어떤 것을 계승해야 하는지 이렇게 지금의 답을 찾기 위해서 공부하는 것입니다.”nbspnbsp분단으로 인해 너무나 차이가 나버린 독립운동사를 다시 한 번 되짚어 볼 수 있었습니다. 내일은 청산리 전투터와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등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게 되는데 오늘 스님의 강의가 내일 답사에 큰 여운을 남겨줄 것 같습니다.nbspnbsp조별 마음나누기에서는 오늘은 발해 유적지를 돌아볼 수 있어서 좋았다는 것과 발해 궁터가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이 놀랍다는 얘기들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두만강을 보면서 ‘라구요’라는 노래를 부를 때 슬펐다는 얘기도 나왔고, 또 스님의 독립운동사 강의를 들으면서는 친미파, 친북파도 능히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이 기억에 남는다는 얘기, 항일무장독립운동에서는 역사에 기록된 인물 뿐만 아니라 민간인들의 희생과 일본군들의 희생도 컸다는 사실을 크게 느끼게 되었다는 얘기 등이 많이 나왔습니다. nbspnbsp이렇게 스님의 강의와 마음나누기까지 마치니 밤11시가 넘었습니다. 피곤한 몸이였지만 오늘은 발해의 역사로부터 독립운동의 역사까지 방대한 시간 여행을 해서 그런지 마음은 뿌듯한 충만함으로 가득찬 것 같습니다.nbspnbsp내일은 긴 시간 산행을 하며 청산리 전투터를 가보고 이어서 대종교 3인묘, 일송정, 대성중학교를 방문해 보며 독립운동의 현장을 직접 찾아가 더 깊이 선조들의 숨결을 느껴볼 예정입니다. 또 소식 전해드리겠습니다. nbspnbspnbsp 오늘 현장 스케치는 이유미님이, 사진 촬영은 권성준, 변지민님이 해주셨습니다.nbsp

2015.08.15. 35,998 읽음 댓글 22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