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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3.11 (오후)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 및 우수리스크 방문
nbsp앞서 오전에 열렸던 ‘연해주 한민족사’와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에 대한 학술회의에 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이 열렸습니다.nbspnbsp신한촌은 해외에 형성된 최초의 코리아타운이었으며, 일제 강점기에 항일 민족지사들의 집결지이자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던 곳입니다. 그러나 1920년 4월 신한촌 참변인 일제의 대습격 학살과 만행, 1937년 9월 스탈린의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로 신한촌은 해체되고 현재는 해외한민족연구소가 1999년에 세워놓은 기념탑 세 개만이 이곳이 신한촌이었다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nbspnbsp▲ 아파트 단지 사이에 세워져 있는 신한촌을 상징하는 기념탑nbsp이에 2015년 8월 15일 광복 70주년을 기하여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가 법륜 스님을 위원장으로, 이창주 국제한민족재단 상임의장을 집행위원장으로 해서 구성되었습니다. 오늘 기공식은 흔적 없이 사라지고 마감된 한민족 독립운동의 역사와 선열들의 숨결을 회복 재건하고 통일 한반도로 내딛는 초석을 마련하자는 취지로 마련되었습니다. nbspnbspnbsp오후 2시가 되자 각계 각층의 사회인사들이 자리한 가운데 애국 선열을 위한 묵념과 함께 기공식이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 애국 선열을 위한 묵념nbsp먼저 법륜 스님이 앞으로 나와 개식사를 하였습니다.nbspnbsp▲ 개식사를 하고 있는 법륜 스님nbsp“오늘 이렇게 많은 종교인, 경제인, 사회인사 분들이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해서 한 자리에 모여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특히 한국의 5개 종단 대표들이 이렇게 다 참여하기가 쉽지 않은데, 김명혁 목사님을 비롯해서 김홍진 신부님, 김대선 교무님, 천도교 교령님을 대신해서 임형진 3.1운동100주년기념사업회 사무처장님이 참여해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nbspnbsp또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해서 지원해 주신 후원자님들도 참여해 주셨고, 또 독립운동가 후손들도 참여해 주셨고, 또 재외 동포들에 대해 많이 연구해 오신 전문가 교수님들도 참여해 주셨습니다. 특히 이창주 교수님을 비롯한 국제한민족재단 관계자 여러분께 이렇게 일을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오늘 각자가 믿는 모든 신들의 가호를 받아서 저희가 하고자 하는 일이 큰 어려움 없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nbsp각자가 믿는 모든 신들의 가호가 있기를 바란다는 스님의 이야기에 5개 종단의 종교인들은 큰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nbspnbsp▲ 기공식에 참여한 5대 종단의 종교인들nbsp이어서 이창주 교수님이 나와 경과보고를 하면서 “시작은 미미하지만 그 끝은 창대하리라” 라는 성경 구절을 인용하며 부족하지만 함께 뜻을 모아준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했습니다. 또 김명혁 목사님은 축사를 하면서 “우리 선배들이 개인의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3.1독립운동을 이뤄냈듯이 우리들도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혼심의 힘을 다하자”며 기운을 불어넣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김홍신 작가님도 축사를 통해 “이런 뜻깊은 일을 통해 후손들에게 우리들은 떳떳한 선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며 기쁜 마음을 전했습니다. 또 재외 동포를 대표해서 이원주 필리핀JTS 대표님이 “이번 뿐만이 아니라 앞으로도 통일을 위해 작은 역할을 해 나가겠습니다” 라고 인사말씀을 해주었습니다. nbspnbsp▲ 축사를 하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nbsp다음은 공사를 책임질 건축사무소 대표이사님이 나와 공사 개요에 대해 설명해 주었습니다. 지금부터 3개월 동안 설계를 진행하고, 1차 공사가 3개월 간 진행된 후 다시 2차 공사가 3개월 동안 진행되어서 올해 안에 공사가 모두 마무리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먼저 담장을 제대로 친 후 담장 안에는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얼굴 부조를 새기고, 한국적 문양으로 대문도 만들고, 전시관도 20평 가량으로 한 동을 짓고, 한국의 유적지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누각도 하나 세운다는 기본계획이 발표되었습니다. 이미 기본 조감도가 나와 있어서 황량한 이곳이 어떻게 바뀔지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 기념관 건축 조감도nbsp이어서 공사를 시작하는 마음을 모아 기념 시삽을 했습니다. 시삽 전에는 테잎 컷팅식도 가졌습니다. 먼저 5대 종단을 대표한 종교인들이 나와 다함께 시삽을 했습니다. “하나, 둘, 셋” 하고 외치자 삽에 흙을 얹어 힘차게 흩뿌렸습니다.nbspnbsp▲ 기공식 시삽nbsp다음은 학계와 경제계, 독립운동가 후손을 대표해서, 다음은 좋은벗들과 국제한민족재단의 실무자들이 연이어 시삽을 했습니다. 모두들 역사적인 순간을 만끽하며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었습니다.nbspnbsp▲ 학계, 경제계를 대표해서 다함께nbspnbsp이어서 경제인을 대표해서 김장만님이 만세 삼창을 선창했습니다. 참석한 내외빈들도 힘차게 두 손을 높이 들면서 만세를 외쳤습니다.nbspnbsp▲ 만세 삼창nbsp마지막으로 김홍진 신부님, 김대선 교무님, 장구갑 천도교 교령사님의 축도가 있었습니다. 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통일을 위해서는 한 마음 한 뜻이 되는 이 모습만으로도 이미 무덤 속의 선조들이 무척이나 기뻐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nbspnbsp▲ 천주교, 원불교, 천도교, 이웃 종교인들의 축도nbsp이렇게 기공식을 모두 마치고 다함께 기념 사진을 찍었습니다. 황량하게 기념탑만 세워진 모습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미안해하고 죄스럽고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 기공식을 계기로 무거운 마음들을 모두 날려 버릴 수 있게 된 것 같습니다.nbspnbspnbsp다시 버스에 올라탄 내외빈들은 고려인들의 숨결과 독립운동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우수리스크로 이동했습니다. 블라디보스톡에서 우수리스크로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법륜 스님이 이곳 연해주와 연해주에 얽힌 독립운동사, 발해 유적에 대해 개략적인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우리는 이 동북아시아 지역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알 필요가 있습니다. 동북아시아에서 자꾸 우리 민족 하나만 생각하니까 중국에 비해 왜소하다고 생각하는데, 고래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환인의 한나라, 환웅의 배달나라, 단군의 조선나라까지는 우리 나라가 중국보다도 앞선 문명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한나라가 우리 고조선 영토의 일부를 빼앗아 한사군을 설치하면서 처음으로 동북방의 우리 영토 일부가 중국 한족한테 지배를 당하게 됩니다. 그에 대해서 ‘조선의 고토를 회복하자’ 하고 일어난 것이 ‘다물군’ 입니다. 다물이란 ‘옛 땅을 되찾자’는 뜻입니다. 그래서 다물군이 우리나라 최초의 구국 의병입니다. 주몽도 다물군에 속했기 때문에 고구려를 세울 때 다물사상을 건국이념으로 삼은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는 대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고, 고구려가 당나라에 망하자 고구려의 후예인 발해가 일어섰고, 발해가 요나라에 망하자 말갈족의 후예인 금나라가 일어섰고, 금나라가 멸망하자 청나라가 일어섰으니까 이 동북 지역은 거의 우리 민족과 우리 형제 민족들이 늘 관할을 했던 곳입니다.nbspnbspnbsp이 동북 지역이 일부라도 중국의 한족에게 지배를 받은 것은 한사군한테 넘어갔던 게 처음이었고, 두 번째는 원나라가 멸망하면서 명나라가 옛 원나라 영토를 관리하게 됐던 때이고, 세 번째는 청나라가 멸망하면서 지금 중국이 관리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이곳 연해주는 청나라 땅이었는데, 강희제가 동진해오는 러시아와 네르친스크조약을 맺어서 아무르강 이남으로는 못 넘어오게 해서 막았어요. 그러다가 청나라가 약해지니까 러시아가 더 밑으로 내려와서 아이훈 조약을 맺어서 하바로스크 지역까지 차지했습니다. 결국 북경조약으로 이곳 연해주까지 러시아가 차지한 건 1860년입니다. 겨우 150년밖에 안 됐어요. 즉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지고 전후 처리 문제로 복잡할 때 러시아가 개입해서 해결해 준 것을 계기로 연해주를 할량 받은 거예요. 그렇게 해서 여기까지 러시아가 진출해서 들어왔습니다.nbspnbsp1860년 이전에도 이미 우리 민족이 여기에 들어와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러시아 땅이 아니었고 주인 없는 땅이었는데, 1860년에 러시아가 여기를 지배하면서 여기 사는 우리 조선인에게도 등록을 하게 했습니다. 그래서 1863년에 처음으로 13가구가 등록을 하다 보니까 공식적으로는 1863년에 처음 이주했다고 하는 것인데, 살기는 이미 그전부터 들어와서 살았던 겁니다. 왜냐하면 두만강만 건너면 여기는 주인 없는 땅이었으니까요. 그래서 두만강을 건너서 지금의 하산에서 조금 더 올라오면 크라스키노가 나오는데 거기가 연추 마을입니다. 안중근 의사가 단지동맹한 곳도 거기였고, 독립운동가들의 군사훈련 연병장도 거기에 있었으니 연추마을은 무장독립운동의 본거지였던 셈입니다.nbspnbsp그리고 많은 분들이 최재형 선생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기록에 보면 최재형 선생은 1860년대에 부모님을 따라 연추 마을로 이주해 왔다가 블라디보스톡까지 오게 되었는데, 너무 가난하니까 길거리에서 구걸을 했다고 해요. 그런데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운행하는 한 선장이 구걸하는 아이를 보고 집으로 데리고 가서 공부를 시켰다고 해요. 그래서 최재형 선생은 한국사람 중에 서양교육을 제일 먼저 받은 사람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그래서 러시아 말도 잘하고, 여러 재주가 있다 보니 여기서 사업으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또 양부모가 러시아 사람이다 보니 후원도 받았고요. 특히 연추에 있는 러시아 부대에 식재료를 공급하는 일을 하면서 큰 돈을 벌었다고 합니다. 또 1904년에 일어난 러일전쟁 때는 러시아 해군으로 참전을 했다고 합니다. 보통 부자가 되면 독립운동에 참여하기가 쉽지가 않은데, 최재형 선생은 그런 경력이 있다 보니 일본에 대한 저항감이 많이 있었나 봅니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최재형 선생이 독립운동을 한 건 아니었고, 이범윤 선생이 간도 관리사를 하다가 나라가 기울어지니까 을사늑약 이후에 여기 와서 의병운동을 할 때 최재형 선생이 부자라는 소문을 듣고 도움을 요청했나 봅니다.nbspnbsp그 다음에 유인석 장군도 넘어와서 13도 의군을 조직했고, 그러면서 여기는 최재형 선생이 거의 다 지원을 했던 것 같습니다. 최재형 선생이 돈도 많았지만 러시아 군대에 식료품을 공급하는 일을 했으니까 군대와 아주 잘 알아서 러시아의 최신무기를 러시아 군인으로부터 사들여 독립군에 공급을 했나 봐요. 마치 최진동 장군의 형제들이 봉오동 지역을 개척한 부자이면서 동시에 봉오동 전투를 비롯한 독립운동의 재정을 모두 지원했듯이 최재형 선생도 그런 역할을 했던 겁니다. 그 이후 권업회 창설, 권업신문 발간, 상해임시정부 재정부장 등의 많은 활동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1920년도에 신한촌 참변이 일어나자 결국 최재형 선생도 우수리스크에서 일본군에 잡혀 총살을 당해 죽게 됩니다.nbsp우수리스크는 옛 발해의 솔빈부의 중심지였기 때문에 시내에서 발해의 평지성이 발견되었고, 외곽에는 산성이 1개 발견되었다고 합니다. 성이 2개 있었다고 해서 우수리스크, 즉 ‘쌍성자’라고 불리웠던 겁니다. 옛날 지명에는 다 쌍성자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이 1㎞ 정도 간격을 두고 2개 있었다고 하던데 시내 개발을 하면서 대부분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도 제대로 답사를 못 했습니다. 산에 있는 성만 지난번에 김홍신 작가님과 같이 올라가서 토성으로 쌓은 것만 확인했거든요.nbspnbsp▲ 버스 창 밖. 꽁꽁 언 바다.nbsp이렇게 봤을 때 우리가 이곳으로 역사기행을 온다면 결국 두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발해의 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고, 둘째, 독립운동유적지를 둘러볼 수 있어요. 독립운동유적지는 초기에 민족주의자들이 주로 운동했던 곳이 있고, 나중에 김일성이 머물렀던 B캠프 자리 등이 있어요.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한 라즈돌리예 역에서 5분 정도만 더 가면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처음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와 건물을 볼 수 있습니다.”nbspnbsp스님이 설명을 계속 하고 있는 사이 버스 창밖으로는 꽁꽁 언 바다가 보였습니다. 조금 더 가니 다리가 하나 보이고 도로가 길게 쭉 뻗어 있었는데, 스님은 이 길이 북한으로 가는 길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nbsp▲ 북한까지 연결된 도로nbsp조금 더 차를 달리자 1937년도에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강제 이주당했다고 하는 라즈돌리예 기차역에 도착했습니다. 황막한 기차역을 보니 지금도 한 맺힌 절규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밭에서 일하다 말고 호미를 던져둔 채, 부엌에서 밥 하다 말고 숟가락을 던져둔 채 강제로 기차를 타야 했다고 하니, 거기다가 먹을 것도 없이 수만리를 짐짝처럼 기차에 실려 가야 했으니, 그 탄식이야 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nbspnbsp▲ 가장 많은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한 라즈돌리예 역.nbsp라즈돌리예 역에서 조금만 더 가니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처음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와 건물이 보였습니다. 번듯한 2층 건물이 아직도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nbspnbsp▲ 김일성 부대가 러시아로 넘어와서 머물렀다고 하는 B캠프 자리nbsp버스는 이제 우수리스크로 접어 들었습니다. 먼저 우수리스크 외곽에 있는 이상설 유허비를 찾았습니다.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 만국 평화회의에 이준, 이위종을 대동하고 한국 독립을 주장했으며, 연해주에서는 성명회와 권업회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순국한 분입니다. 선생의 유언에 따라 화장을 하고 그 재를 이곳 수이푼 강에 뿌렸는데, 러시아 정부의 협조를 얻어 고려학술문화재단이 2001년에 이곳에 유허비를 세웠다고 합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선생의 넋이라도 조국의 품으로 안길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참가자 일동은 묵념을 했습니다.nbspnbsp▲ 이상설 유허비nbsp다음은 최재형 선생이 1920년 4월 5일 새벽 일제에 체포될 당시까지 거주했던 우수리스크 볼로다르스카야 거리 38번지 옛 집을 방문했습니다.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양국의 국기를 새기고 최 선생의 업적을 담은 동판이 부착되어 있어 이곳이 유적지임을 기념하고 있었습니다.nbspnbsp▲ 최재형 선생이 마지막 1년을 지낸 옛 집nbsp마지막으로 우수리스크 시내에 위치한 고려인문화센터를 방문했습니다. 센터 안에는 19세기 이후의 한인 이주사부터 시작해서 연해주에서 있었던 다양한 항일 독립운동 역사,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의 아픔, 다시 희망을 찾아 돌아온 재이주의 역사가 사진과 글로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사진 한 장, 글 한 줄을 읽으며 마음이 숙연해졌습니다.nbspnbsp▲ 고려인문화센터nbsp이렇게 우수리스크 지역 방문을 모두 마친 후 다함께 저녁 식사를 하러 갔습니다. 식사 자리에서는 오늘 선조들의 숨결이 서려 있는 여러 유적지를 둘러본 소감을 서로 나누며 감동의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식사를 마치면서는 마지막으로 스님이 일어나서 이번 신한촌 역사회복재건 사업이 잘 추진될 수 있도록 많은 분들의 관심과 후원을 부탁했습니다.nbspnbspnbsp“오늘 여기 모이신 여러분들은 그래도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을 위해 후원금을 많이 내신 분들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자기만 돈을 내었다고 끝이 아닙니다. 이 사업이 잘 되도록 주위 사람들 중에 다섯 명씩 더 모아 오셔야 합니다. 알았지요?nbspnbsp저는 지금껏 살아오면서 누구한테 돈 달라는 얘기는 해본 적이 거의 없어요. 정토회 법당 만들 때도 돈 내라는 소리는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이번에는 이창주 교수님이 하도 사정을 해서 돈을 좀 내라는 말을 해야 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어요. 이번 한 번만 돈 내라는 얘기를 하고 끝을 내려고 하니까 대신 여러분들이 모금을 좀 많이 해 주세요. 후원금을 많이 낸 33인에게는 신한촌 기념관 준공식을 할 때 돌에 이름을 새겨 드린다고 하네요. 이걸 갖고 신문 광고까지 낼 일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니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nbsp참석한 내외빈들은 큰 박수로 스님의 뜻에 공감을 표하고 그렇게 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후원을 부탁드립니다.nbspnbsp우수리스크를 출발한 일행은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습니다. 밤 9시 무렵에 숙소에 도착해 오늘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내일은 참석한 내외빈들 모두가 아침 비행기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스님과 실무자 몇 명은 올해 8월에 있을 동북아 역사대장정 코스를 개발하기 위해 이곳에 하루 더 남아서 발해 유적과 독립운동 유적이 있는 크리스키노 지역과 우수리스크 지역을 조금 더 답사할 예정입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3.11 (오전) 신한촌역사회복재건 학술회의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의 2일째 날을 맞이해 한민족 독립운동 성지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기념 학술회의에 참석해 개막연설을 한 후 각계 각층 인사들과 함께 기공식을 갖고, 독립운동의 얼이 서려 있는 우수리스크 지역을 방문했습니다.nbspnbsp먼저 오전 9시부터는 ‘러시아 연해주 극동대륙의 한민족 통사와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회의가 열렸습니다. 학술회의장 창 밖에는 ‘아무르만’이라고 불리우는 바다가 보였는데, 얼음이 꽁꽁 얼어 있어 이곳이 러시아 땅임을 실감나게 했습니다.nbspnbsp▲ 영하 10도의 날씨에 꽁꽁 얼어붙은 바다, 아무르만nbsp학술회의는 제1회의와 제2회의로 나뉘어져 진행되었습니다. 전문가들의 발표가 있기 전에 먼저 스님이 ‘러시아 한민족사의 숨결과 흔적’을 주제로 개막연설을 하였습니다.nbspnbsp▲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한 학술회의nbspnbsp“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서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사에 대해 함께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위원회’를 구성하면서 우리 민족의 근대사와 독립운동사를 되돌아보게 됩니다. 1800년대 이후에 조선왕조는 국가가 사실상 붕괴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백성은 도탄에 빠졌습니다. 특히 1860년대에 있었던 기근과 국가재정의 파탄으로 인해 수많은 국민들이 기아로 굶어 죽는 비참한 일도 일어났습니다. 그것을 계기로 주로 남쪽에 살던 국민들은 견디다 못해서 민중봉기를 일으켰는데, 그것이 우리가 역사에서 배웠던 삼도 민중봉기입니다. 그러나 북쪽에 살던 민중들은 그런 저항도 했지만 그들에게는 압록강을 건너서 서간도로, 두만강을 건너서 북간도나 연해주로 이주할 수 있는 출구가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연해주, 북간도, 서간도로의 이주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nbspnbsp▲개막연설을 하고 있는 법륜 스님nbspnbsp그런 상황을 개선해 보고자 국내적으로는 젊은 관료들을 중심으로 결성된 개화파가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한 갑신정변이 있었지만 실패로 끝났고, 또 아래로부터 민중들의 삶을 개선해 보고자 동학혁명이 일어났지만 이 또한 지배자들이 외세를 끌어들여서 혁명을 진압하는 바람에 실패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끌어들인 외세들끼리 다투게 되면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이 일어나서 결과적으로 우리는 나라를 일본에 빼앗기게 되었습니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3.1독립운동이 일어났지만 그것 또한 실패로 끝났고, 결국 2차 세계대전의 종말로 1945년에 해방을 맞긴 했지만 우리 힘으로 해방을 이루어낸 게 아니다 보니까 결국 강대국의 이해관계로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그것은 또한 6.25전쟁이라는 비참한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우리 민족은 통일은커녕 평화도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니 이게 지난 우리 민족의 근현대 150년 역사입니다.nbspnbsp그런 가운데 국외적으로는 국내 상황이 힘드니까 1860년대부터 가난한 백성들이 스스로 생존을 위해서 해외이주를 시작했고, 나라가 아예 기울어진 이후부터는 애국지사들이 이민자들의 삶을 기초로 해서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독립투쟁을 전개했는데 그것이 해외독립운동사입니다. 해외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살펴보면 이주민의 수가 가장 많았던 북간도가 첫 번째 중심지였고, 연해주가 두 번째 중심지였고, 또 압록강 건너 서간도가 세 번째 중심지였습니다. 또 일부는 중국 관내로도 들어가 상해가 네 번째 중심지가 되었고, 다섯 번째로는 미국의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습니다. 그렇게 봤을 때 연해주는 우리 해외독립운동사의 제1 또는 제2의 성지임에도 지금 우리 역사에 제대로 반영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인데, 이번 신한촌역사회복재건 사업이 우리 역사에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나 민족의 이민사를 제대로 반영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봅니다.nbspnbsp러시아는 우리 민족에게 때로는 희망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좌절을 주기도 하였습니다. 1863년에 우리 민족이 두만강을 건너 최초로 지신허 마을에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이곳 블라디보스톡이나 우수리스크 등에도 이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이곳이 이민자들에게 희망의 땅이었습니다. 이어서 1904년도에 있었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하고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많은 분들이 이곳 연해주로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때 간도 관리사를 하던 이범윤 선생과 의병장을 하던 유인석 선생도 이리로 넘어와서는, 이미 이곳에서 먼저 자리를 잡고 있던 최재형 선생의 후원을 받아서 국내진공작전을 펴는 의병운동을 전개하게 되었습니다. 또 안중근 의사도 최재형 선생의 도움으로 이토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한 단지동맹을 이곳 연추 마을에서 하게 됩니다. 이때만 해도 블라디보스톡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돕는 중요한 후원세력의 근거지였습니다.nbspnbsp그러나 1910년을 지나서 제1차 세계대전이 임박하게 되자 러시아는 일본과 연합국으로 협력하게 되면서 이곳에 있던 우리 독립군 부대의 해산을 종용하게 됩니다. 1910년경 유인석, 이범윤 선생을 중심으로 13도 의군을 창설할 때만 하더라도 13도 의군은 우리 민족 최대의 의병부대였는데, 러시아의 압력으로 제대로 활동하지도 못한 채 해산하게 됩니다. 그 일을 계기로 최재형 선생은 권업회를 만들어서 산업 신장을 꾀하는 듯 위장하는 식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해 나가게 됩니다. 이렇게 1910년 이후에 러시아와 일본이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된 일은 이곳에 사는 우리 민족이 독립운동을 좀 더 본격화하는데 큰 장애가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에게 첫 번째로 배신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nbspnbspnbsp그러다가 1917년에 러시아혁명이 일어났고, 러시아혁명정부가 제3세계 민족해방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선언하면서 다시 러시아는 우리 민족해방운동의 희망이 됩니다. 그래서 연해주가 다시 각광을 받게 되고, 독립운동도 활기를 띠게 됩니다. 한편 국내에서는 1919년에 3.1독립운동이 일어났고, 이곳 연해주에서도 3.17독립선언이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최초로 임시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의회’가 형성되고, 그것이 나중에 상해임시정부와 통합을 해서 실질적인 임시정부가 형성되게 됩니다. 우리는 상해임시정부만 생각하는데, 그것의 주축이 된 이동녕, 이동휘, 문창범, 최재형, 이상설, 이런 분들은 모두 연해주 출신의 독립운동세력이었습니다. 그래서 1920년도에 우리 고려인 독립운동세력과 러시아 혁명세력이 연합해서 3월에 일본군을 무찌르는 성과도 냈는데, 4월에는 일본군의 침략으로 이 지역에 있던 독립운동세력이 학살되는 4월 참변을 겪게 됩니다.nbspnbsp그러나 그들 중 일부가 북간도로 들어가서 북간도에 있던 독립운동세력과 협력해서 6월에는 봉오동전투, 10월에는 청산리전투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런 승리가 우리 민족에게는 큰 희망이 되었지만 결국 일제의 보복, 즉 무자비한 탄압으로 수많은 이주민이 학살되고, 재산이 불태워지는 경신참변의 고통을 겪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의 압력으로 독립운동세력이 더 이상 중국 안에서 백두산을 근거지로 삼아 있을 수가 없게 되자 결국 1920년 말에는 모두 러시아로 넘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1921년도에 연해주에 있던 독립군 세력과 북간도에 있던 독립군이 전부 러시아의 자유시로 모여들게 되었는데, 그때 군 주도권을 둘러싸고 연해주의 독립운동세력 중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르크추크파가 러시아로부터 군권을 허락받고 러시아혁명군과 함께 무장해제를 불응하는 독립군을 엄청나게 학살하는 흑하사변, 즉 자유시참변이 있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19세기 말엽부터 시작되어 20세기 초엽까지 형성되었던 3,500명 규모의 독립군 최대 세력이 결과적으로는 완전히 와해되는 비극을 겪게 됩니다. 우리에게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1921년에 우리 독립운동의 최대 세력이 러시아혁명군에 의해서 해산되어 버리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가 러시아에게 두 번째로 배신당한 일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nbspnbsp그리고 1937년에 스탈린은 여기 사는 우리 한인들에게 일본군의 간첩으로 활동한다는 혐의로 2500여 명의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였을 뿐만 아니라 17만 명이나 되는 우리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습니다. 그래서 이 연해주에 뿌리내렸던 한인들의 삶이 송두리채 뿌리 뽑혀서 사라지는 비극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1940년에 다시 러시아가 일본과 갈등을 겪으면서 동북연군에 참여했던 많은 민족지사 중 일부가 러시아로 넘어왔고, 그들이 1945년에 소련군과 같이 북한에 들어와 북한정부의 구성원이 되면서 어찌 보면 민족분단의 하나의 축을 형성했다고도 볼 수 있겠습니다.nbspnbsp이렇게 역사를 되돌아보면, 러시아는 고통받던 우리 민족에게, 또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애국지사들에게 때로는 희망이 되어주었고, 때로는 좌절을 안겨주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의 이런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우리에게 아무리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도 지나치게 외국에 의지하게 되면 우리는 언제나 그런 보이지 않는 위험을 안게 된다는 교훈을 이런 역사를 통해 배울 수 있습니다.nbspnbsp좋은벗들에서는 매년 여름 중국의 북간도, 서간도로 역사기행을 떠나는 프로그램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만 아직 연해주는 일정에 포함시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국제한민족재단에서 매년 시베리아횡단여행을 하다가 이곳 연해주의 독립운동사를 재건하는 게 필요하다는 제안을 적극적으로 해주어서 이와 같이 신한촌 복원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습니다. 저도 늘 염두에 두고 있던 일이라서 형편은 어렵지만 함께 해 보자는 마음을 내어 오늘 이렇게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바쁘고 어려운 가운데 참여해 주신 여러분께 다시 한 번 감사말씀을 드립니다.”nbsp스님의 감사 인사에 참석자들도 뜨거운 박수 갈채로 화답했습니다.nbspnbspnbsp한민족의 통사가 가장 많이 서려 있는 러시아 연해주 독립운동의 희망과 좌절의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먹먹해져 왔습니다. 게다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연구조차 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독립운동 하면 안중근 의사만 떠올리게 되는데, 스님의 설명을 들으니 얼마나 많은 민족지사들이 이국 땅에서 이름 없이 묻혀 갔을지 가슴이 저미어 왔습니다. 또 러시아가 우리에게 준 희망과 좌절의 양면성을 얘기하며 지나치게 외세에 의지하면 안 된다는 역사적 통찰에는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이곳 연해주에서 조선의 지식인들은 국제관을 넓혔고, 시대에 저항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독립의 깃발을 올렸고, 임시정부의 시초인 국민의회도 여기서 조직되었고, 최재형 선생을 비롯한 많은 애국지사들이 이곳에서 활동했다고 생각하니 이곳이 헤아릴 수 없이 소중하게 여겨졌습니다. 다행히 ‘신한촌역사회복재건위원회’를 통해 오늘 다시 그 빛을 발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기쁜 날인 것 같습니다. nbspnbsp이어서 제1회의에서는 임채완 전남대 교수님이 ‘러시아 연해주 한인의 이주 역사’에 대해 발표를 하였고, 김게르만 카자흐스탄국립대학 교수님이 ‘한민족의 허브 신한촌’에 대해 발표했습니다. 특히 제1회의를 마치면서 패널로 참가한 김홍신 작가님은 신한촌의 재건이 평화통일의 지름길로 이어지길 당부했습니다.nbspnbsp▲패널 토론을 하고 있는 김홍신 작가님nbspnbsp“독립운동의 현장은 민족 정신을 지켜주는 백신입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 위대한 영웅이 나타난다고 하죠. 100년 전 처럼 지금도 대한민국은 화약 냄새가 진동하고 있는데, 신한촌 재건은 어쩌면 우리가 이런 전쟁의 상황을 극복하는 하나의 계기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바둑의 세계 최강자를 인공지능이 이겼는데, 따뜻한 평화통일도 우리가 빨리 해내지 못하면 앞으로 국경수비도 로봇이 하게 될지 모릅니다.nbspnbsp그렇게 되면 남북분단은 영원히 갈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기 전에 우리는 오늘 신한촌 재건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비단 신한촌 재건의 문제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민족 정신사의 재건으로 이어지게 해서 평화로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을 우리가 만들면 좋겠습니다.” nbspnbsp이어서 제2회의에서는 김성민 건국대 교수님이 ‘고려인의 민족 정체성’에 대해, 송지나 블라디보스톡 극동대학 교수님이 ‘최초의 코리아타운 신한촌의 조선독립운동사’에 대해 발표해 주었습니다. 특히 송지나 교수님은 고려인으로서 개인의 가족사를 중심으로 생생하게 신한촌의 역사를 알려주어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nbspnbsp제2회의를 마치면서는 스님이 몇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주었습니다. 발해 이야기와 송지나 교수님의 개인 가족사를 관심있게 들었다고 하면서 연구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뜻으로 네 가지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nbspnbsp“첫 번째로, 이 연해주는 발해 시대의 동경용원부의 일부와 솔빈부에 속했습니다. 땅 면적을 기준으로 보면 연해주가 당시 발해의 전체 영토 중 3분의 1을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곳 연해주에 묻혀있는 발해의 역사에 대해서 생각해 봐야 됩니다.nbspnbspnbsp두 번째로, 조금 전 송지나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역사는 가족사로 접근했을 때 훨씬 더 깊이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금 제 옆에 최성주 선생님이 계시는데, 이분은 봉오동전투를 이끈 최진동 장군님의 동생 최운산 장군님의 손녀이십니다. 송지나 선생님도 그 3세손이 되시고요. 그래서 어머니와 할머니로부터 전해들은 신한촌의 역사와 봉오동 전투의 사실들을 잘 알고 계시잖아요. 우리는 ‘봉오동 전투’ 하면 ‘홍범도 장군’만 떠올리는데, 실제 봉오동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병사들 밥 해 먹이고, 훈련시키고, 무기를 구입하는 등 재정적인 뒷받침을 해 준 노력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잖습니까. 그런 역사는 아마 가족사를 중심으로 한 구술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특히 독립운동사의 경우에는 그 당시에 ‘내가 독립운동 한다’ 하는 걸 알리면 죽임을 당하기 때문에 실제 독립운동을 해도 증거를 다 소멸하면서 했잖습니까. 그런 사정이 있었는데, 오늘 날 학자들이 독립운동사를 정리할 때 너무 증거주의만 고집하니 안타깝습니다.nbspnbsp저도 저희 스승님으로부터 3.1독립운동에 대해 들을 때 스승님의 가족사를 배경으로 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게 학문적으로는 채택이 안 됩니다. 그 이유는 ‘증거가 없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독립운동지사의 손자 되시는 두 분이 이 자리에 참석해 주셔서 참으로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세 번째로, 이번 자료집에 애국지사 여덟 분의 사진이 실렸는데, 이분들은 이미 한국에서 잘 알려진 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안 알려져 있지 않으면서도 정말 훌륭한 분들이 많습니다. 가장 유명한 분이 최재형 선생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 최재형 선생의 도움을 받아서 처음으로 국외에서 의병을 일으켰던 분들이 13도 의군의 대장을 했던 유인석 선생과 간도관리사를 했던 이범윤 선생입니다. 저는 이 두 분에 대한 자료가 좀 더 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에 연해주에서 제일 유명했던 분은 문창범 선생이잖아요. 얼마나 유명했으면 별명이 ‘대통령’이었겠습니까. 그리고 65세의 연세로 안중근 의사처럼 폭탄을 투척한 연해주의 노인동맹소속 강우규 지사도 계시잖습니까. 이 분들에 대한 것도 이번에 복원이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네 번째로, 역사학자들이 러시아와 우리 민족사의 관계를 어떻게 풀어내느냐의 과제가 남아 있습니다. 첫째, 1800년대 말, 1900년대 초에 러시아는 우리에게 희망이었지만 가장 결정적인 순간인 1910년에 우리가 13도 의군을 만들었을 때 그걸 못하게 한 게 제정러시아 정부였습니다. 제정러시아와 일본과의 협력관계 때문에 그랬던 건데, 그래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모양만 바꿔 만든 권업회를 통해서 독립운동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둘째, 러시아 혁명이 우리 독립운동의 새로운 희망이 되어주었고, 또 우리는 1920년에 봉오동전투, 청산리전투에서 승리도 했는데, 일본군의 공격에 못 이긴 만주 군벌 장작림이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보호하지 못하겠다고 하니까 독립운동가들이 러시아를 믿고 러시아로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북간도 독립군과 연해주 독립군이 다 합쳐져서 3500명 이상의 대부대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군권투쟁이라고 하는 내부의 문제도 있었지만 어쨌든 볼셰비키에 의해서 궤멸됐다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셋째, 우리 민족이 일제로부터 그렇게 탄압을 받고 있는데도 러시아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첩자노릇을 한다면서 연해주에서 2500명 이상을 학살하고 17만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시켰습니다. 넷째, 러시아는 결정적으로 1945년에 우리 민족이 분단되도록 하는데 한 축을 형성했습니다. 분단은 결국 6.25전쟁으로 이어졌고, 현재도 우리 민족은 그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우리의 희망이기도 했고, 우리에게 좌절도 준 러시아와 우리 민족과의 문제, 즉 연해주의 문제를 어떻게 조화롭게 융합해 낼 거냐가 우리 역사학자들의 중요한 과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연구하시는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스님의 네 가지 제안에 학자들도 모두 공감을 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이렇게 ‘연해주 한민족의 역사’에 대한 학술회의를 모두 마쳤습니다. 학술회의를 마치고 나니 왜 신한촌의 역사를 회복하고 재건해야 하는지 그 필요성이 더욱더 가슴 깊이 와 닿았습니다.nbsp점심식사를 한 후 참가자 전원이 꽁꽁 얼어 붙은 아무르만 바다를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곧 봄이 오면 얼음도 서서히 녹아나듯이 전쟁의 위험에까지 치달은 남북관계도 해빙 무드가 빨리 찾아오길 간절히 기원해 보았습니다.nbspnbsp▲ 학술회의에 참가한 내외빈 모두 함께nbspnbsp기념사진 촬영을 마치고 나서는 기공식을 하기 위해 곧바로 신한촌으로 이동했습니다. 신한촌으로 이동하는 길에는 고려인 송지나 교수님이 블라디보스톡 시내 곳곳을 안내해 주었습니다.nbspnbsp창밖으로 보이는 많은 건물들이 제정러시아 때 지어진 건물들인데 14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nbspnbspnbsp또 이곳 블라디보스톡에는 레닌 동상이 2개 있었는데 페레스트로이카 때 동상 1개는 철거되었다고 합니다. 송지나 선생님은 혁명정부가 교회를 폭파하는 소리를 어머니가 듣고 너무나 무서워했던 기억을 이야기해 주기도 했습니다. 교회가 폭파된 자리에는 레닌 동상이 세워졌는데 페레스트로이카 때 다시 레닌 동상이 철거되고 현재는 그리스정교회 교회가 새로 지어졌다고 합니다.nbsp▲ 레닌 동상이 철거된 자리에 새로 세워진 교회nbsp과거 신한촌이 자리했던 곳에는 지금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었습니다. 도로가 새로 나고 아파트가 줄지어 건설되면서 신한촌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현재로서는 분간을 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단지 사이에 삼각지 모양의 좁은 공터 위에 기둥 세 개가 떡하니 놓여 있어 그나마 이곳이 신한촌이었음을 표시해 주고 있었습니다.nbspnbsp이어서 오후 2시부터는 이곳 신한촌 기념비 앞에서 각계 각층 인사가 자리한 가운데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이 열렸습니다. 다음 이야기에 계속 됩니다...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3.10 발우공양 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도착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정토회 서울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해 ‘일과 수행의 통일’에 대해 법문한 후 신한촌 역사회복재건 기공식 및 학술회의를 위해 각계 각층 인사를 모시고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에 도착했습니다.nbspnbsp새벽 예불을 마친 후 스님은 정토회 서울공동체 발우공양에 참석해 공양을 드셨습니다.nbspnbsp▲ 발우공양nbsp공양을 드신 후에는 지난 일주일 동안 필리핀JTS 사업장을 방문하고 온 소회를 이야기하면서 그 중 대중 생활과 관련해서 애로사항이 제기되었던 것을 공유해주었습니다.nbspnbspnbsp특히 삶 속에서 ‘일과 수행의 통일’을 실천해 나가려면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하는지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지난번에 인도에 방문했을 때 대중 생활을 하면서 느끼는 애로사항에 대해서 들었는데, 이번에 필리핀에 방문했을 때도 역시 그런 얘기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일을 생각하면 사람이 한 명이라도 더 필요한데, 대중 생활을 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데요. 대중 생활이 어려워 문제제기를 자꾸 해서 내부 화합이 잘 안 되는 사람도 있습니다.nbspnbsp과거에는 자기네 마음대로 자유롭게 산다고 밥도 같이 안 먹고 따로 먹었던 적도 있었다고 하니 지금까지 그렇게 생활하던 습관 때문에 수행과 대중 생활을 제대로 못해서 문제가 되고 있나 봐요. 지금 문제가 되는 이유는 작년 봄부터 필리핀과 인도 사업장을 수행공간으로 하고, 수행자들이 봉사하는 것으로 하되 그걸 못 하겠다는 사람은 다 회향하도록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아, 인도네시아에서는 사업장을 다 철수했고요. 정토회 설립취지 대로 앞으로는 해외 구호사업장도 수행자들이 수행하고 봉사하는 수행도량으로 정했는데, 아직도 그렇게 살지 않던 과거의 습관이 남아서 어려움이 있다는 얘기지요.nbsp개인의 삶을 보더라도 밥은 먹고 싶고, 살찌는 건 겁이 나고, 살찌는 거 생각하면 안 먹어야 되고, 먹고 싶은 거 생각하면 먹어야 되고 그렇지요. 해외 구호활동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을 생각하면 봉사자가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되고, 그럴려면 봉사자들의 취향을 허용해야 된다는 문제가 남습니다. 또 주어진 사명이 ‘수행자들이 살면서 봉사하는 수행도량화 해야 한다’ 하는 것이니까 수행도량의 원칙을 잡아야 되는데, 또 원칙을 잡으니까 사람이 떨어져 나가고, 사람을 잡으려니까 원칙이 어그러지고, 이런 것 때문에 고민이 생깁니다.nbspnbsp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원칙을 중심으로 해서 갈 사람은 가게 하고, 그래서 일이 안 된다면 안 되는 대로 해야겠지요. 아니면 일을 우선해야 된다면 원칙은 젖혀두고 그 사람이 요구하는 대로 받아들여서 일을 할 수 있게 하든지요. 그러니까 이거든 저거든 하나로 결정하면 문제해결이 제일 쉽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여기 있는 여러분은 모두 행자대학원생이니까 수행이 절대적 중심이지 다른 게 중심일 수 없잖아요. 그래서 수행원칙에서 어긋나면 그대로 회향할 수밖에 없는 입장인데, 인도나 필리핀은 수행원칙과 일이 충돌한다는 거죠. 통상 이것도 포기할 수 없고, 저것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번뇌가 생기는 건데 둘 다 필요하다면 둘 다 하는 게 수행입니다.nbspnbsp그럴 때는 ‘원칙을 지키되 일도 해야 되고, 일을 하되 원칙도 지켜야 된다’ 하는 게 과제가 되겠죠. 그 과제가 바로 우리가 말하는 ‘중도’입니다. 그 사람들의 취향을 받아들여서 일이 되도록 함과 동시에 수행도량의 원칙도 지켜가면서 그 사람들과 갈등도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 이게 수행 과제가 되는 겁니다.nbspnbspnbsp‘도대체 어떻게 하란 얘기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을 거예요. 일에 책임을 안 지는 사람이나 수행도량을 지킬 책임이 없는 사람은 그 둘 중에 하나의 입장만 취하면 됩니다. 그러나 수행도량의 원칙도 지켜야 되고 일도 반드시 해내야 될 책임을 진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 둘을 어떻게 조화롭게 해 나가느냐가 수행이 됩니다.nbspnbsp다시 말해서 모순을 승화시키는 게 수행입니다. 우리의 일상은 이렇게 모순된 그 두 가지가 늘 갈등을 일으킵니다. 예를 들어 직장을 구할 때는 월급이 많으면 일이 많고, 일을 좀 수월히 하면 월급이 적고, 결혼 상대자를 구할 때는 돈은 많은데 사람 성질이 더럽고, 성질은 좋은데 돈이 없고, 이런 것처럼 이 세상에는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없습니다. 다 자기 입장에서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자기가 볼 때 부족한 것이지 그 사람 자체는 원래 그런 거예요.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그 두 가지를 다 요구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겁니다.nbsp그래서 첫 번째, 욕심 때문에 두 가지 번뇌가 생길 때는 욕심을 내려놔야 됩니다. 두 번째, ‘밥은 먹고 싶다’ 이건 까르마, 업식, 마음이고, ‘먹으면 안 된다. 건강에 나쁘다’ 이건 생각이잖아요. 이런 갈등은 이성과 감성 사이의 갈등, 마음과 생각 사이의 갈등입니다. 이런 건 어떻게 중도적으로 통일할 수 있을까요? 생각에 우선을 두면 의지로 버텨야 되니까 심리가 억압을 받게 되고, 긴장이 되고, 그러면 행복하지가 못 하지요. 욕구를 따라가면 일시적으로는 기쁜데, 결과적으로는 나한테 손해가 됩니다. 그 둘을 어떻게 조정할 거냐 하는 게 중도입니다.nbspnbsp요구를 따라가지 않으면서 긴장도 하지 않는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경직되지 않는다, 사람들을 포용하면서도 원칙은 지켜나간다, 이런 과제들을 여러분의 삶 속에서 극복을 해야 합니다. 그런 모순이 없는 세상에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그런 세상은 없습니다. 일은 해야 되는데 사람은 없거나 또는 사람은 있는데 돈이 없거나 이런 식의 모순이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괴로움 없이 해결해 나가느냐가 바로 우리가 직면한 인생의 현실적 과제입니다.nbspnbspnbsp여러분 개인적으로는 아마 몸이 아파서 쉬니까 일이 안 되고, 그렇다고 좀 나아서 일을 하려니까 또 몸이 안 따라주는 일이 있을 수 있죠. 그래서 그 사이에서 또 갈등을 하게 될 텐데,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아픈 몸으로 일을 할 때는 아프지만 조금이라도 일을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일을 해야 된다’는 부담감과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그런 갈등을 여러분 스스로 조정할 수 있어야 아파도 편안하고, 일을 안 해도 편안하고, 일을 많이 해도 편안하고, 밤잠 안 자고 일을 해도 편안하고, 아프면서 일을 해도 편안할 수 있는 거예요.nbspnbsp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처작주’입니다. 즉 ‘어느 곳에 처하든 주인이 돼라’는 주인의식이 중요합니다. 물러나는 마음을 낼 때는 주인의식이 없을 때입니다. 물러나는 마음이 나면 마치 남의 일처럼 ‘에라, 모르겠다’ 이렇게 되잖아요. 그래서 첫 번째는, 자기가 해결해야 될 과제로 딱 삼는 자세, 즉 주인의식과 책임감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는, 긴장하지도 않으면서 깨어있는 균형감각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로, 그게 잘 안 될 때는 꾸준히 연습해 나가는 게 필요합니다. 그런 자세로 조금씩 완성시켜 나가는 게 수행입니다. 명상하고 절하는 것만 수행이 아니라 자기 마음의 갈등이나 자기 몸 상태를 가지고도 수행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수행하면서 늘 중도를 체험해 가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 모두 편안한 가운데 밝게 일을 해 나가는 수행자가 됐으면 좋겠습니다.nbspnbsp몇몇 행자님이 인도나 필리핀을 다녀온 뒤로 건강이 안 좋다고 하던데, 그럴 이유가 뭐예요? 마음이 해이해져서 행자라는 걸 잊었던 거 아니에요?nbspnbspnbsp어쨌든 몸을 잘 추스르세요. 그러면서 당면한 현실에서 주어지는 과제들을 대할 때 ‘왜 내가 이런 일을 해야 되느냐? 이게 수행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라고 하지 말고, 수행삼아 잘 풀어보세요. 우리가 살다보면 때로는 똥 치우는 일, 밭가는 일, 밥하는 일이 주어질 수도 있는데, 어떤 일이 주어지든 수행삼아 하다 보면 똥 치우는 방법, 밭 갈거나 밥하는 기술을 익힐 수가 있습니다. 인생을 오래 살다보면 모든 게 인생에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nbspnbsp제가 어릴 때 풀이나 나무 벤 거, 낫질하거나 괭이질 한 거, 말뚝 박은 거 등이 그 일로써 끝난 게 아니라 의외로 생활할 때도 도움이 되고, 수행할 때도 도움이 되고, 해외활동 할 때도 도움이 됐거든요. 밥할 때나 연탄불 갈 때 불을 안 꺼뜨리려고 애쓰던 일, 그런 게 수행입니다. 감옥 가고, 두드려 맞고, 고문당한 것도 그때는 고통이었지만 지나놓고 보면, 돌이킬 수만 있으면 그게 다 수행이 됩니다. 그래서 결국 어떤 경험이든 다 자기 삶의 일부가 되고, 성장의 밑거름이 됩니다.”nbspnbsp어떤 일이 주어지든 수행삼아 하다 보면 모든 것이 인생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는 말씀에 공동체 대중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곧 선거가 다가오게 되는데 공동체 대중들도 부재자 투표 신청을 해서 주권행사를 꼭 할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4월 중순에는 선거가 있으니까 미리 부재자 투표를 신청해서 주권행사를 하세요. 우리 사회가 지금 여러가지 어려움에 처해 있잖습니까. 1, 2월 수출은 지난 해에 비해 거의 20 가까이 감소했다고 하잖아요. 그런 가운데 빈부격차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어요. 현 정부가 들어설 때 경제성장을 강조했지만 성장도 안 되고 있고, 경제민주화를 얘기했지만 빈부격차는 더 심해지고 있고, 청년실업을 줄이겠다고 했지만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고, 노인복지를 해결한다지만 OECD 가입국 중에 노인빈곤율이 제일 높고, 남북관계는 전쟁 위기에 처할 정도로 나빠졌고, 두만강 프로젝트도 멈췄습니다.nbspnbspnbsp또 요즘처럼 국내정치가 시끄럽고 유별난 건 처음 봅니다. 여당은 여당 내부적으로 싸우고, 여당과 청와대가 싸우고, 여야가 싸우고, 야당도 갈라져서 싸우고, 갈라져 나간 데서는 또 그 안에서도 싸우고, 남아있는 쪽도 싸우고, 남북 간에도 싸우고, 한일 간에도 싸우고, 한중 간에도 갈등하고, 지금 이러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경제, 정치, 안보, 통일, 국민 통합, 평화 유지가 다 위기에 처했습니다. 국민 통합은 커녕 국민 분열의 시대입니다. 한마디로 말해서 총체적인 국가 불신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개선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있었는데, 개선되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나빠지고 있는 것 같아요.nbsp특히 국가권력이 중앙에, 그 중에도 대통령에게 너무 독점되어 있기 때문에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번 선거가 끝난 뒤 보수도 보수와 중도 보수로 나뉘고, 진보도 중도 진보와 진보로 나뉘어서 국민의 다양한 요구를 받을 수 있는 다당제 구조로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사안에 따라 서로 연정하는 식이 되어서 국가도 안정되고, 지금과 같은 극한적 갈등도 없어질 겁니다. 양당 구조는 선의의 경쟁을 할 때는 좋은 모델인데, 이렇게 극한적 투쟁을 할 때는 국가가 마비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단점이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러니 이번 총선에서 가능하다면 통일의 시대로 나아가는 것, 양당 구조의 폐해를 극복하는 것, 한 당의 독주를 막는 것, 지역주의를 극복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그런 문제들을 푸는데 도움이 될 만한 사람을 선출하는 게 필요할 것 같아요. 이런 관점을 갖고 주권행사를 잘 하시기 바랍니다.”nbspnbsp공동체 대중들은 스님의 말씀에 모두 공감을 표하며 한 말씀 한 말씀을 가슴에 새겼습니다. 이번에는 어느 때보다도 국민들이 각성해서 투표에 제대로 참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발우공양을 모두 마친 후 스님은 짐을 챙겨 오전 10시 20분에 인천공항으로 출발했습니다. 인천공항에는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염원하는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속속 도착해 출국 수속을 밟았습니다.nbspnbsp▲ 인천 국제공항nbsp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톡의 ‘신한촌’은 극동 시베리아 대륙의 한민족의 아픈 역사가 서려있는 민족독립운동의 성지이자 최초의 코리아타운입니다. 항일민족지사들의 집결지이자 국외 독립운동의 중추기지였으며, 임시정부의 모체인 국민의회를 결성한 곳이기도 합니다. 그런 유서깊은 곳의 흔적과 숨결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 이번에 좋은벗들과 국제한민족재단의 주도로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을 블라디보스톡 신한촌 현장에서 갖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스님은 모든 참석자들이 인천공항에 도착하자 간단하게 한 명씩 소개를 해주며 서로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해주었습니다.nbspnbsp▲ 참가자 소개 시간nbsp간단히 자기 소개를 마치고 드디어 설레는 마음을 안고 오후 1시 35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한반도의 북동쪽 끝부분에 접한 블라디보스톡nbsp블라디보스톡 공항에 도착하자 국제한민족재단에서 실무자 두 분이 대형 버스로 마중을 나와 참석자 일행 모두를 숙소로 데려다 주었습니다.nbspnbspnbsp공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는 아직 흰 눈이 쌓인 너른 벌판이 펼쳐지기도 하고, 블라디보스톡을 출발해 모스크바까지 이어진 시베리아 횡단 철도가 잠시 보이기도 했습니다.nbspnbsp▲ 블라디보스톡에서 모스크바까지 가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nbsp또 도심을 지나 바닷가에 다다르니 석양에 비친 얼음 바다가 절경을 보여주었습니다. 바다 위로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모습을 보며 참가자들은 감탄사를 연발하며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바다nbsp오후 6시에 숙소에 도착해 짐을 푼 후 7시부터 다함께 저녁식사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녁식사는 처음으로 한인촌이 형성되었다고 하는 구한촌 지역에 있는 작은 식당에서 했습니다. 구한촌 지역에는 작은 항구가 하나 있었는데, 부산이나 속초, 청진에서 출발하면 이곳에 배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초창기에는 항구 주위에 한인촌이 형성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석자들은 이곳이 개척리라고 불리는 구한촌이라는 설명에 모두들 카메라를 들고 사진에 담아가느라 여념이 없었습니다.nbspnbsp▲ 구한촌 지역에 위치한 식당nbsp저녁식사를 하기 전 스님이 김명혁 목사님에게 식사기도를 청했습니다. 특히 스님은 김명혁 목사님을 비롯한 이웃종교인들과 10여 년 전부터 남북의 화해와 평화를 위해서 마음을 모아오고 있습니다. 목사님은 “목사들끼리 모일 때는 서로 싸우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데, 우리 이웃종교인들이 모였을 때는 한번도 다툰 적이 없습니다.”라고 자랑스러워 하면서 식사기도를 정성껏 해주었습니다.nbspnbsp▲ 식사기도를 해주고 있는 김명혁 목사님nbsp“죄인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사랑하시고 축북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이 배경이 모두 다르지만 3.1운동을 일으켰던 선배들을 기리며 종교와 모든 차이를 초월해서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서 서로 돕고 서로 사랑하고 어떻게 하면 굶어죽는 동포들을 도울 수 있는지 방법을 찾고자 모였습니다.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자기 생명을 초개와 같이 던지고 오히려 기뻐했던 우리 선조들을 기리며 어떻게 해야 우리들이 아시아의 평화와 화해를 이룰 수 있을지 함께 노력하겠습니다. 음식에 부끄럽지 않은 우리들이 될 수 있게 축북해 주시옵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nbsp서로 종교는 다르지만 다같이 큰 목소리로 ‘아멘’ 하고 맛있게 식사를 시작했습니다. 참석자들이 식사를 하는 동안 스님이 간단하게 이번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이번 행사의 취지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스님nbsp“우리가 해외의 독립운동 유적지라고 해서 북간도와 서간도에는 많이들 가고, 또 상해에도 많이들 갑니다. 하지만 이곳 연해주는 매우 중요한 곳임에도 발걸음이 뜸했는데, 최근에 들어와서 연해주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연 30만명으로 늘었다고 해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 선조들이 독립운동을 하며 살았던 이 지역에 현재는 고려인도 별로 없고, 그 터는 이미 다 폐허가 되었고, 다만 비석을 3개 세워 두었는데, 그 모습이 너무 초라해요. 그래서 이곳의 얼을 살리고 알리자는 제안이 있어서 이런 자리가 마련되었습니다. 좋은 취지의 일이라서 저도 함께 하게 되었고요.nbspnbsp뜻은 있지만 재정을 마련할 여력이 안 되어서 여러분들 모시고 우선 작게나마 시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오셔서 그 뜻을 기려주시고, 내일 기공식을 하는 것을 계기로 여러분들의 의견을 잘 수렴해서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을 위한 일들을 함께 해나가면 좋겠습니다.”nbsp스님의 행사 취지에 대한 말씀에 모두를 큰 박수를 보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이번 신한촌 역사회복과 재건 사업을 책임지고 해나갈 국제한민족재단의 이창주 교수님이 이번 행사의 대략적인 소개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 국제한민족재단 이창주 교수님nbsp“우리 현대사에서 독립운동의 시원이 바로 이곳입니다. 애국지사들이 대부분 여기서 집결을 했었고, 여기서 독립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이런 민족의 성지에 아무런 표시가 없는 무명의 돌기둥 세 개 밖에 없어요. 이렇게 흔적 없이 사라지고 있는 선열들의 열망과 함성, 흔적과 숨결을 회복 재건하자는 취지로 이번에 기공식을 하게 되었습니다.”nbspnbsp이창주 교수님은 열변을 토하며 이번 일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이 일을 염원해 왔는지 그 정성이 고스란히 전해졌습니다. 교수님은 자세한 이야기는 내일 학술대회 시간에 이야기하겠다고 하면서 인사말씀을 마쳤습니다.nbspnbsp이어서 28명의 참가자 전원이 각자 어떤 마음으로 이번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에 참가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목사님, 신부님, 교무님 등 종교인들을 포함해, 시민단체와 대학에서도 여럿이 참여를 했습니다. 모두가 각계 각층을 대표하는 사회 인사 분들이신데, 그 중 몇 분의 이야기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먼저 김홍신 작가님은 “잃어버린 발해의 역사를 찾아다니며 이곳을 여러 번 다녀갔는데, 그 때 우리 민족의 혼을 발견했던 그 경험 때문에 이곳에 올 때마다 행복합니다. 이번에도 그런 시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라며 기쁜 마음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nbspnbsp또 평화재단 평화교육원의 원장으로 계신 조민 박사님은 이렇게 소감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을사늑약 이후로 유인석 의병장 이런 분들은 경성에서 기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서 부산에서 배를 타고 이곳 블라디보스톡으로 왔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이곳에 왔는데, 이제는 비행기나 배 말고 서울에서 기차를 타고 출발해 오면 어떻겠습니까. 두만강 철교를 건너 이곳 블라디보스톡으로 올 수 있는 날을 고대하면서 오늘을 회상해 보고 싶습니다.”nbsp특히 생명미디어센터에서 온 최성주님은 특별한 사연을 이야기해 주어 많은 박수를 받았습니다. “저의 할아버지가 최운산 장군이라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를 지휘했고, 또 봉오동을 직접 개간해서 만드셨던 분이예요. 저는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전해들었는데, 저희 세대가 지나가면 이제 할아버지가 하셨던 일들이 모두 묻혀져 버리게 될 것이란 사실을 최근에 알게 되었어요. 지금이라도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아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가 이번 행사를 알게 되었고요. 저도 작은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오늘 참석하게 되었습니다.”nbsp▲ 특별한 사연을 갖고 참가한 생명미디어센터 최성주님nbspnbsp각자 참석하게 된 사연은 다양했지만 조국이 기울어 가던 시절에 피 흘리며 목놓아 울부짖던 애국지사들의 아리랑이 서린 현장을 다시 회복하고 재건하자는 그 염원만큼은 한마음 한 뜻이었습니다. 마지막에 김홍신 작가님은 더욱이 이 마음이 한반도 통일을 향한 염원으로까지 나아가기를 기원하면서 “통일을 위하여” 라고 건배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블라디보스톡에서의 첫째날 일정을 모두 마쳤습니다. 내일은 아침 9시부터 ‘러시아 한민족사의 숨결과 흔적’을 주제로 법륜 스님의 개막 연설이 있은 후 ‘연해주 극동대륙의 한민족사’, ‘신한촌 역사의 재조명’을 주제로 학술 회의를 가집니다. 또 오후에는 신한촌으로 이동해 신한촌역사회복재건 기공식을 가진 후 우수리스크로 이동해 독립운동유적지를 방문하고 돌아올 예정입니다.nbsp※ 신한촌 역사 회복과 재건을 위한 대중 여러분들의 후원금을 받습니다. 소정의 기금 출연으로 신한촌 역사 회복에 동행하는 마음과 정성을 함께 담아 주시기 바랍니다.nbspnbsp 계좌번호 국민은행 57860101272869 예금주 좋은벗들nbsp
2016.3.8~9 한국 귀국 및 각종 미팅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3월2일부터 8일까지 6박7일 동안의 필리핀, 호주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했습니다.nbspnbsp어제밤 11시 10분에 호주 멜번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0시간을 비행해서 오늘 새벽 6시에 대만 타이베이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밤새 이동을 하는 비행기여서 스님도 비행기 안에서 잠을 청했습니다.nbspnbsp▲ 밤새 10시간 동안 이동하는 비행기 안nbsp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타이베이공항에 내려 2시간을 머물렀습니다. 공항에 머무는 동안 스님은 한국에서 온 보고서를 체크하고, 원고 교정 업무도 보았습니다.nbspnbsp▲ 타이베이 공항nbsp다시 아침 8시에 타이베이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2시간 조금 더 걸려 11시 20분에 대한민국 인천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창 밖으로 바라본 인천공항은 안개가 많고 무척 흐려 보였습니다.nbspnbsp▲ 인천 국제공항nbsp인천공항에서 짐을 찾고 도착장으로 나오니 수행팀에서 실무자 두 분이 나와 마중을 해주었습니다. 짐을 차에 싣고 곧바로 서울 정토회관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공항 마중을 나온 수행팀nbspnbsp인천공항에서 서울 정토회관으로 가는 길에는 그동안 한국에서 진행된 일에 대해 보고를 받은 후 모레부터 3박 4일 동안 있을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방문과 신한촌 역사관 기공식 행사와 관련해 점검을 했습니다.nbspnbsp오후 1시 무렵에 서울 정토회관에 도착하자 1층 법당에서는 오늘 입학한 정토불교대학생 서초반 학생들이 입학식을 마치고 점심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식사 중인 학생들에게 다가가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했습니다.nbspnbsp“오늘 입학하셨어요? 결석하지 말고 1년 동안 꾸준히 다니셔야 해요.”nbspnbsp▲ 정토불교대학 서초법당 주간반 입학식nbsp스님의 해맑은 모습에 불교대학 신입생들도 너무나 반가워하며 “네” 하고 크게 대답했습니다.nbspnbsp비행기에서 밤을 꼬박 샌 스님은 간단히 세면을 한 후 곧바로 오후 2시부터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 재단 실무자들과 연이어 미팅을 가졌습니다.nbspnbsp많은 분들이 스님을 뵙고 싶어했지만 스님이 해외에 있었기 때문에 미팅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8일과 9일 양일 간은 스님을 찾아온 손님들, 그리고 정토회 대중 대표들과 연이어 미팅을 계속 가졌습니다.nbspnbsp내일은 오후 1시 30분 비행기로 인천공항을 출발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을 방문합니다. 3월 10일부터 13일까지 3박4일의 방문 기간 동안 스님은 한국과 러시아 교민 사회의 주요 관계자들과 신한촌 역사회복재건을 위한 학술회의를 열고, 신한촌 유적 조형 및 역사관 공사 기공식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
2016.3.7 (호주 2일째) 멜번(Melbourne) 즉문즉설 강연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호주 멜번에 살고 있는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점심이 되자 멜번 정토법당에는 몇몇 봉사자들이 단체로 와서 김밥 만드는 일을 함께 했습니다. 오늘 강연 준비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들의 저녁 식사를 위해 김밥 150줄을 만들었다고 합니다.nbsp▲ 멜번 정토법당nbsp스님은 수고하는 봉사자들을 격려한 후 다함께 마당에서 기념사진을 함께 찍었습니다. 봉사자들은 일손을 도우려고 법당에 왔다가 뜻밖에 스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무척 기뻐했습니다.nbspnbsp▲ 김밥을 만들고 있는 봉사자들과 함께nbsp특히 이곳 멜번 정토법당은 김밥으로 유명한 유영진 보살님이 부총무로 있는 곳입니다. 보살님은 연세가 많으시지만 이곳 호주에서 오직 김밥을 맛있게 만드는 것으로 초창기 법당 운영 경비도 마련하고, 봉사자들도 모았기 때문에 ‘김밥 보살님’으로 이곳 봉사자들 사이에서 많은 존경을 받고 있었습니다.nbspnbsp오후 5시에 멜번 정토법당을 나온 스님은 강연이 열리는 박스힐 타운홀에 일찍 도착해 먼저 봉사자들과 기념사진부터 찍었습니다.nbsp강연이 끝나면 비행기 출발 시간이 촉박해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해야 해서 미리 사진을 찍어두기로 한 것입니다.nbspnbsp▲ 박스힐 타운홀 nbsp이어서 책 사인회도 강연 전에 먼저 가졌습니다. 많은 분들이 스님의 환한 얼굴을 보고 반가움을 표했습니다. 어떤 분은 반가운 마음에 “스님, 가까이서 보니 더 잘 생기셨어요” 라고 했는데, 스님은 nbsp“중이 잘 생겨서 뭐하노?” 라고 대답해 큰 웃음을 주기도 했습니다. 또 많은 분들이 “사인하실 때 제 이름도 같이 적어주세요” 라고 요청하면 “내 이름은 내가 적고, 당신 이름은 당신이 적어야지” 라고 응수해서 위트있게 넘어가기도 했습니다.nbspnbsp▲ 책 사인회nbsp이렇게 사인회까지 미리 마치고, 저녁 6시가 되자 소개 영상과 함께 즉문즉설 강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멜번에 살고 있는 300여 명의 교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이 무대 위에 오르자 큰 함성과 박수가 쏟아졌습니다.nbspnbspnbsp먼저 스님은 왜 우리는 행복하지 못할까 라는 질문을 던지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은 학교에도 가고, 공부도 하고, 연애도 하고, 결혼도 하고, 취직도 하고, 이민도 가고, 가게도 마련하고, 사업도 하고, 아이도 낳아서 키우고, 이렇게 자기 좋을 대로 하면서 살잖아요. 자기가 좋을 대로 살았으니까 행복해야 되잖아요. 그런데 자기가 좋을 대로 살아놓고 괴롭다고 그래요. 자기가 좋아서 결혼해 놓고 괜히 결혼했다고 하고, 자기가 좋아서 사업을 벌여놓고 괜히 일을 벌였다고 하고, 자기가 취직해 놓고는 못 다니겠다고 하고, 자기가 아이를 낳아서 키워 놓고는 왜 저런 아이를 낳았는지 모르겠다고 하잖아요. 이것이 인생의 괴로움입니다. 이럴 때 ‘왜 그럴까?’ 하고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좋을 대로 살았는데 왜 괴로울까요?nbspnbsp만약 결혼해서 부부 간에 갈등이 심해서 괴롭다면 그 원인은 뭘까요? 교회를 안 다녀서 하나님한테 벌 받아서 그런 거예요,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그런 거예요, 사주팔자가 그렇게 되어 있는 거예요, 어리석어서 그런 거예요?”nbsp“어리석어서 그런 거예요.”nbsp“그런데 여러분들은 내가 어리석어서 이런 괴로움을 자초했다는 생각을 별로 안 합니다. 대부분 내가 전생에 저 사람과 원수여서 그런가, 궁합이 안 맞아서 그런가, 이렇게 생각을 하잖아요. 그러나 괴로움은 우리들의 어리석음에서 빚어집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즉 무지라는 뜻입니다.nbspnbsp반면 우리가 바르게 알게 되면 두 가지 삶의 자세가 나타납니다. 첫째, 이미 일어나버린 일에 대해서는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내가 모르고 쥐약을 먹었지만 내가 한 일이니까 배가 아픈 것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이미 지나가버린 일이니까요. 둘째, 대신에 다음에 이런 일이 닥친다면 다시는 이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합니다. 즉 이미 지은 인연에 대해서는 그 과보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시는 이런 인연을 짓지 않도록 하는 겁니다.nbspnbsp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먹고 나서 배가 아플 때는 다시는 안 먹겠다고 하지만, 막상 배가 고프면 또 먹게 되고, 그러면 또 배가 아프고, 한번만 살려주면 다시는 안 먹겠다고 해놓고, 배가 고프면 또 먹게 됩니다. 아이한테 화를 내지 않아야겠다고 해놓고 아이가 하는 행동을 보면 또 성질이 확 나고 이렇게 되풀이 됩니다. 이렇게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는 것이라면 우리는 이 괴로움을 능히 해결할 수가 있습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음부터는 아무리 좋아보여도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은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렇게 하면 삶이 조금 더 행복해지는 쪽으로 개선이 되어갈 수가 있습니다.”nbspnbsp이미 지나간 과거는 기꺼이 받아들이고,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은 하지 않으면 된다는 아주 간명한 메시지에 머리가 시원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비행기 출발 시간 때문에 8시가 되면 딱 강연을 마쳐야 해서 스님은 이렇게 화두를 던진 후 거두절미하고 곧바로 질문을 받았습니다. 총 6명이 손을 들고 질문을 했는데, 그 중에 한 분의 고민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nbspnbsp무대 위에서 여는 이야기를 하던 스님은 “무대가 너무 높아서 여러분과 거리가 너무 떨어진 것 같다” 하면서 무대 아래로 내려와 청중과 가까이에서 호흡을 하며 즉문즉설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nbsp한 남자분이 호주에서 살면서 일을 계속 하고 싶지만 본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며 막막한 마음을 호소했습니다. 스님의 답변에 청중석은 웃음 바다가 되고, 유쾌한 문답에 질문자의 마음도 아주 가볍게 되었습니다.nbspnbsp“저는 호주에 와서 일을 한 지 7년 정도 되었는데요. 호주에서의 삶에 만족하고 행복했습니다. 저는 호주에 계속 살고 싶지만 타의에 의해서 지금은 어쨌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한국에 가면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할지 너무 막막해서 스님께 질문을 드립니다.”nbsp“서울역에 가면 노숙자들이 많잖아요? 그분들은 왜 노숙자가 되었을까요? 대부분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니까 노숙자가 되었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노숙자들의 과거 직업을 조사해 보면 농사 짓다가 노숙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매일 막노동을 하는 사람이 노숙자가 된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겁니다. 그 대부분이 첫째, 작은 기업이라 할지라도 사장을 했던 사람들입니다. IMF 때나 어떤 이유로 사업이 망해서 다시 재기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둘째, 직장을 다닐 때 간부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과거를 먹고 살아요. 자신의 과거 때문에 지금 아파트 수위를 하든지 농사를 짓든지 막노동을 하든지 하는 것을 못해요. ‘나도 한 때는 사장을 했는데...’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를 당한 것도 맞지만 이 정신적인 문제도 함께 있습니다.nbspnbspnbsp그래서 이 사람들을 노숙자의 쉼터라고 해서 수용시설을 마련해 준다고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노숙자의 쉼터라고 하는 곳에는 규칙이 있어서 술먹고 와서 주정도 하면 안 되고, 밤늦게 와도 안 될 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렇게 하라고 하면 답답해서 못 사는 사람들이예요. 차라리 1000원이라도 구걸해서 소주 한 병 마시고 역 앞에 누워 있는 게 숫제 더 편한 겁니다. 도움을 주는 수용시설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것만 갖고는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됩니다.nbspnbsp이렇게 과거에 좋았던 기억에 사로잡히면 현재의 삶이 불행해지기가 쉽습니다. 반대로 현재는 결혼도 하고 먹고 살기 괜찮지만 어릴 때 너무 가난해서 공부를 제대로 못했다든지 하는 상처가 있어서 현재는 남이 봐도 괜찮은 데도 늘 과거의 상처로 인해서 현재의 삶을 행복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nbspnbsp만약 질문자도 지금 그런 경험을 갖고 있다면, 한국에 가면 거의 십중팔구는 불행하게 살 수 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한국 사회가 지금 빡빡하기 때문입니다. 호주도 지금 빡빡해지고 있지만 한국 사회와는 비교가 안 됩니다. 그러면 취직이 안 되든지 직장 생활이 어렵거나 하면 늘 호주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지금 타의에 의해서 한국에 가게 되었다고 하니까 그 인간에 대한 미움을 저버릴 수가 없어요. 그래서 질문자는 지금 불행이 이미 예약되어 있는 사람입니다.nbspnbspnbsp교회에 좀 다니세요. 성경 말씀에 ‘5리를 가자고 하면 10리를 가주라’ 하는 말이 있잖아요. 어쩔 수 없이 한국에 쫓겨서 가게 되었다는 것이 ‘5리를 가자’는 것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10리를 가줄게’ 한다는 것은 아무리 옆에서 붙잡아도 모든 걸 팽개치고 내가 선택해서 한국에 간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미 가게 되었으니까 한국에 가는 것을 누구 때문에 억지로 간다는 이 생각을 하고 있는 한은 필연적으로 과거에 사로잡혀서 미워하고 원망하고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한국으로 가야되는 상황이 되었으면 내가 그 상황에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수처작주라고 합니다.nbspnbsp이렇게 한 번 생각해 보세요. 동남아에 있는 노동자들이 한국에 오고 싶어서 밀입국 하는 경우가 많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은 한국 시민권이 없어서 잡히면 추방됩니다. 그런데도 한국에 숨어 들어와서 공장에 취직도 하고 잘 살잖아요. 거기에 비하면 질문자는 한국 시민권도 있잖아요. 그러니 사실은 질문자가 한국에 가는 것을 힘들어 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요. 좀 빡빡하긴 하지만 그래도 살만한 나라예요. 요즘 전쟁이 날까 싶어서 겁내는 사람들도 좀 있기는 있지만요.nbspnbsp그러니 생각을 적극적으로 바꾸는 것 밖에는 길이 없어요. 과거에 ‘호주에서는 어땠다’ 이런 생각을 하면 한국에서 못 살아요. 좋은 경험이 자산이 안 되고 추억으로 남으면 미래가 불행해져요. 그 때는 그 때이고 나는 다시 또 새로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이 중요하지 과거를 늘 생각하면 불행을 자초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가게 되었다면 한국에 가고 싶지만 못 가는 사람들을 생각해서 쉽게 갈 수 없는 한국에 가게 되었다고 생각을 바꾸어야 해요. 그런데 가기 싫은데 쫓겨 간다고 생각을 하고 있으니 질문자는 불행을 예약해 놓은 사람입니다. 불행하지 않으려면 과거를 잊어야 합니다. 저도 오늘밤에 한국에 가는데 아무렇지도 않거든요. 똑같이 한국으로 가는데 자기는 왜 죽을 것처럼 힘들어해요?”nbspnbspnbsp“아직 직장을 잡은 것은 아니여서 한국에 가면 먼저 백일출가를 해볼까 생각하고 있습니다.”nbsp“아주 잘 생각하셨어요. 백일출가를 하면 취직이 금방 됩니다. 백일 동안이나 출가 승려 생활을 했으니까 부처님의 가피로 취직이 된다고 보통 말을 하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한국에는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에게 좋은 일자리가 부족한 것은 맞아요. 그런데 중소기업이라든지 생산직이라든지 저임금에 좀 일하기 힘든 직장은 한국에도 많습니다. 그런 곳은 사람을 못 구해서 전부 동남아에서 외국인들이 와서 그 일들을 합니다. 지금 한국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100만 명 이상 들어와 있습니다. 그럼에도 계속 인력이 부족합니다. 중소기업 사장들을 만나보면 직원 50명이 필요한데 30명 밖에 못 구한 곳이 대부분이예요.nbspnbsp백일출가를 하게 되면 먼저 3일 동안 만배를 해야 돼요. 1분이라도 초과하면 무효가 되어서 새로 만배를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가야 해요. 절 하는 것이 쉬운 것 같지만 이 무거운 몸을 들어다가 놓았다가 하는 동안에 번뇌가 치성합니다. ‘이러다가 다리 병신 되는 거 아닌가’, ‘이게 무슨 불교냐’, ‘부처님은 고행을 버리라고 했는데 이건 고행이다’ 이런 생각부터 시작해서 옛날에 누구한테 맞았던 기억, 질문자 같으면 나를 한국으로 오게 한 사람 등 온갖 생각이 일어나서 절을 하다가 집어치우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요. 그렇게 중간에 가버리는 사람이 꼭 생깁니다. 그러나 충동이 일어나지만 그래도 계속 절을 하다보면 이런 충동이 일어났다가 가라앉고, 저런 충동이 일어났다가 가라앉고, 이렇게 수십 수백 가지 충동이 일어났다가 가라 앉습니다. 그렇게 만배를 하고 나면 최소한 백일은 절에서 살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nbspnbsp처음에는 자기가 좋아서 들어왔지만 살아보면 힘드니까 중간에 도망을 가고 싶어지는데 그런 것에 대한 예방이 이미 만배를 하는 동안에 이뤄지는 겁니다. 못 견딜 사람들은 만배 할 때 이미 다 가버리거든요. 이런 심리적인 이유 때문에 만배 프로그램을 둔 겁니다. 중간에 그만두고 가버리면 본인도 손해고 저도 손해잖아요.nbspnbsp그리고 백일 동안 새벽 4시에 일어나서 300배를 한 후 바로 부엌에 가서 밥을 지어야 해요. 또 하루 종일 막노동을 합니다. 막노동을 하는 중간중간에는 일을 하면서 일어났던 분별심을 다 드러내야 합니다. ‘성질이 나서 죽여버리고 싶었다’, ‘집에 가버리고 싶었다’ 하는 마음나누기를 계속 합니다. 저녁에는 10시가 되면 무조건 자야 하는데, 한 방에 20명, 30명이 다같이 자니까 코를 고는 사람도 있고 온갖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런데 잠을 못 잔다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요. 왜냐하면 눈을 붙이자 마자 벌써 눈을 떠야 하는 새벽이거든요.nbspnbspnbsp세상 일과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세상에서는 고생만 하지 고생하면서 일어나는 마음을 자기가 자각하도록 해주는 것이 없는데, 백일출가는 딱 하나 그것이 더 추가되어 있어요. 거기다가 어떤 일도 방긋 웃으며 ‘예’ 하고 해야 한다는 것이 과제로 주어집니다. 명심문이 그렇게 정해져 있어요. 그렇게 잘 될까요? 당연히 잘 안 되지요. 안 되는 과정 속에서 그것이 될 때까지 계속 연습합니다. 그렇게 백일을 생활하고 나오면 지천에 깔린 게 직장이예요. 여기서는 월급도 안 받고 오히려 자기 돈을 내고 와서 막노동을 했는데, 밖에 나가면 아무리 아르바이트라고 해도 돈을 주잖아요. 직장을 구하는 기준이 ‘300만원을 주느냐, 400만원을 주느냐’ 하는 것에서 ‘절에서는 한 푼도 안 주는데 여기서는 주네’ 하는 것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리 일이 많아도 밖에서는 새벽 4시에 깨우지는 않아요. 밤 10시까지 일을 시키지는 않아요.nbspnbspnbsp그래서 밖에 나가서 사는 것이 아주 쉬워집니다. 무슨 일을 하든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돼요. 백일출가를 해서 행자로 산다는 것은 가장 낮은 자세로 하심을 해서 마치 하인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무슨 일을 해도 행자로 살 때 보다는 존중 해줘요. 그래서 취직이 잘 되는 겁니다. 이것을 ‘법의 가피’라고 합니다. 원하는 것을 이뤄지게 해준다는 신의 가피와는 차원이 다른 얘기입니다.nbspnbsp그리고 이런 생활이 체질에 맞다고 생각이 되면 정토회에 들어와서 평생 무보수로 살면 돼요. 그러면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습니다. 내가 개인적으로 돈을 갖겠다고 하니까 살기가 힘들지 내가 갖겠다는 생각만 놓아버리면, 인도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고, 필리핀에 가서 원주민들도 도울 수 있고, 무슬림 지역에 가서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고, 얼마든지 좋은 일을 많이 할 수 있어요. 그렇게 살아도 하루 세 끼 밥은 다 먹어요. 벌거벗고 다니지 않고 옷은 다 입고 다녀요. 침대에서 자느냐 바닥에서 자느냐의 차이 밖에 없지 잠은 다 자요. 되게 졸리면 굿을 해도 잔다 하잖아요.nbspnbsp저도 지금 3일 연달아서 밤 비행기를 타고 다니면서 하루종일 생활하거든요. 피곤해서 어떡하냐고 그러시는데 그렇다고 일을 안 할 순 없잖아요. 비행기에서 내리면 일을 해야 하는데. 그러면 몸이라는 게 자기도 살아야 하니까 비행기만 타면 잠을 자게 돼요. 여러분들은 비행기를 타면 잠이 안 온다고 하는데 그것은 집에 와서 잠을 잘 수 있으니까 잠을 안 자는 거예요. 저는 비행기에서 내리면 바로 가서 일을 해야 하기 때문에 몸이 이 때 안 자면 자기는 죽는 거예요. 그러니 몸이 알아서 다 자게 되어 있어요. 자는 것은 앉아서 자나 누워서 자나 별 차이가 없어요. 자는 게 중요하지요. 누워서 잠이 안 오고 뒤척거리는 것보다 앉아서 자는 게 더 잘 잘 수도 있어요.nbspnbspnbsp인생이라는 것이 궁하면 통하게 되어 있듯이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어요. 이런 공부를 하면 삶이 자유로워집니다. 저는 여러분보다 더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얘기할 수 있어요. 그렇다고 제가 하는 일이 여러분들이 하는 일보다 쉬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어요. 그렇지만 저는 어떤 일이든지 재미있게 합니다. 이것도 나쁘게 생각하면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가령 즉문즉설을 매일 하다 보면 매일 똑같은 질문들을 하잖아요. 그래서 365일 매일 똑같은 얘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질문을 하고 나서는 제가 얘기한 대로 아무도 안 해요. 묻기만 하지 제가 얘기한 대로 안 한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어요. 묻기만 하고, 물어놓고는 얘기한 대로 하지는 않고, 그러니 얼마나 재미없겠어요. 하지만 저는 그런 걸 안 따져요. 묻는다는 것은 그 개인에게는 다 애절한 사정이 있는 거잖아요. 그 한 사람의 고민은 항상 처음 듣듯이 듣고, 또 제가 얘기한 대로 하고 안 하고는 그 사람의 인생이니 내가 관여할 일은 아니라고 여깁니다. 제가 관여하는 것은 그 사람이 생각하지 못한 걸 조금 터치한 정도 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임하니까 재미있게 할 수 있지요.nbspnbsp이렇게 즉문즉설을 하루에 두 번씩 할 때마다 10명의 고민을 들으면 얼마나 많이 듣게 됩니까. 제작년에 세계 100회 강연 할 때는 1000명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인생이 괴로운 1000명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저한테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자신이 평생 살아온 엑기스를 저한테 얘기해 주니까 그것들을 연구하면서 저의 능력도 점점 더 커져가는 겁니다. 이것을 좋게 생각하면 정말 좋은 일이고, 이것도 지겹게 생각하면 하루도 못할 일이 되는 겁니다. 생각하기 나름이예요.nbspnbspnbsp그러니 참 좋은 생각을 하셨어요.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백일출가를 하고 사회로 나가면 호주만 좋은 나라가 아니고 대한민국도 좋은 나라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천당만 좋은 세상이 아니라 이생도 좋은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렇지 않고 호주만 자꾸 생각하게 되면 평생 불행이 예약된다는 점을 꼭 명심하세요.”nbsp“네, 감사합니다. 많이 가벼워졌습니다.”nbsp백일출가를 하게 되면 어떤 심리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지 적나라한 비유에 모두들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뒤바뀌는 것이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nbspnbsp이렇게 모든 질문에 대해 답변을 마치고 나니 약속한 2시간이 다 지나가고 8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몇몇 분들이 손을 들고 더 질문을 하고 싶어 했지만, 공항으로 출발해야 하는 시간이어서 마지막으로 한 분의 질문만 더 받고 8시 30분이 되어 강연을 모두 마쳤습니다.nbspnbsp강연을 마치면서 스님은 오늘 얘기나눈 모든 이야기의 요점이 무엇인지 정리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오늘 이 사람 저 사람의 많은 고민들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는데 제 얘기의 요점은 뭐라고 생각하세요?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겁니다. 남자든 여자든 늙었든 젊었든 장애가 있든 없는 성적 취향이 동성애든 양성애든 피부가 검든 희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미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거잖아요.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였든 살아 있는 사람은 다 행복할 수가 있습니다.nbspnbspnbsp그런데 우리는 자꾸 불행할 수밖에 없는 핑계를 자꾸 댑니다. 왜냐하면 ‘엄마 때문에, 남편 때문에, 누구 때문에...’ 하면서 불행이 밖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하기 때문니다. 그러나 불행은 밖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불행의 원인은 자기에게 있는데 그 이유를 밖에서 찾는 겁니다. 자기가 불행하고 싶어서 불행하다면 자기가 좋아서 그러는 거니까 그렇게 살라는 겁니다. 그러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핑계를 대는 조건을 떼야 합니다. 남편이 일찍 들어오면 일찍 들어와서 힘들다고 하고, 늦게 들어오면 늦게 들어와서 힘들다고 하고, 부모가 없으면 없어서 효도할 수가 없다고 힘들어하고, 부모가 있으면 있어서 못살겠다고 합니다. 이렇게 여러분들은 불행하다고 이미 결정해 놓고 ‘있으면 있어서 불행하다’, ‘없으면 없어서 불행하다’ 자꾸 이럽니다.nbspnbsp항상 좋게 생각해야 해요. 시부모님이 안 계시면 시집살이 안 해서 좋다고 생각하고, 부모님이 계시면 효도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있으면 아이 키우는 재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아이가 없으면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생각해 보세요. 저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겨요. 이렇게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밤에 늦게 들어가도 잔소리하는 마누라가 없잖아요. 이것만 생각해도 얼마나 좋아요. 제가 만약 결혼을 했으면 이런 상황을 용납 안하겠지요. 맨날 싸우고 있을 거예요.nbspnbspnbsp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장점을 늘 좋게 생각하는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긍정적 사고’라고 합니다. 긍정적 사고는 ‘무조건 잘 될 것이다’ 라고 하는 낙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일어나버린 것을 긍정적으로 보는 것’을 말합니다. 호주에 이민을 와서 사기를 당했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것을 붙들고 괴로워 하고만 있지 말고 ‘남의 나라에 왔으니 학습비를 좀 내었다’ 하고 여기는 겁니다. 이렇게 이미 일어나버린 일은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실수마저도 경험으로 자꾸 축적이 되어서 결국은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이 됩니다. 그렇게 행복하게 사시기 바랍니다.”nbsp스님의 열정적인 말씀에 힘이 절로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2시간 30분 동안 중간에 자리를 뜨는 사람 없이 오롯이 집중하는 모습을 보여준 멜번 교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강연이 30분 늦게 끝났지만, 교통 안내를 하느라 강연 전에 미처 사진을 같이 찍지 못한 봉사자들이 있다고 해서 스님은 조금 더 시간을 내어서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멜번 정토법당 회원들과 함께사진을 찍고 나서는 한국에서 가져온 단주를 스님이 직접 봉사자들의 손목에 걸어주었습니다. 해외에서는 단주를 구하기 어려운 데다 스님이 직접 걸어주신다고 하니 너무나 기뻐하는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 봉사자들에게 단주를 선물하는 스님차량에 올라타고 박스힐 타운홀을 출발하여 9시 30분 무렵에 멜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출국 수속을 마치고 나서는 이번 시드니 강연과 멜번 강연을 총괄한 정은지 시드니정토회 총무님, 운전을 해주신 김삼구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특히 운전을 해주신 분에게는 감사의 마음을 담아 사인한 책을 선물했습니다.nbspnbsp▲ 공항 마중을 해준 운전봉사자 김삼구님과 정은지 시드니정토회 총무님nbsp밤 11시 10분에 멜번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8시간 30분을 비행하여 타이베이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내일은 타이베이공항에서 2시간을 머문 후 아침 8시에 다시 출발하여 인천공항에는 낮 11시 무렵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한국에 귀국한 후에는 평화재단에서 연이어 손님들과 미팅을 가질 예정입니다.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3.6 (호주 1일째_오후) 시드니(Sydney) 즉문즉설 강연
nbsp오전 11시부터 오후에 3시까지 진행되었던 시드니와 멜번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에 이어서 오후 4시부터는 시드니에 살고 있는nbsp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nbspnbsp강연이 열린 시드니대학교 이스턴 에비뉴 오디토리엄에는 시드니정토회 회원들이 일찍부터 와서 곳곳을 장식하고 안내 표지를 붙이며 분주한 모습이었습니다. 특히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해 장소를 찾아오기가 어려워 여러명의 봉사자들이 곳곳에서 안내를 도맡아 주었습니다.nbspnbsp▲ 시드니대학교 이스턴 에비뉴 오디토리엄nbsp특히 어제 저녁에는 오페라하우스 앞에도 찾아가 전단지를 돌리는 등 많은 사람들이 오늘 강연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노력 덕분에 강연장은 좌우에 빈자리를 조금 남기고 거의 만석이 되어 350여 명이 자리했습니다. 특히 젊은 청년들이 많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습니다.nbspnbspnbsp소개 영상에 이어서 스님이 무대에 오르자 교민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와 함성으로 스님을 반겼습니다. 스님은 개신교를 믿는 사람들이 많은 교민 사회의 여건을 헤아리며 오전에 교회는 잘 다녀왔는지 물어보며 강연을 시작했습니다. nbspnbspnbsp“오전에 교회는 다 잘 다녀오셨어요? 왜 강연시간을 오후 4시로 잡았을까요? 여러분들이 오전에는 교회에 다녀오라고 그런 거예요. 강연을 오전에 하면 ‘교회 가야 되나? 강연 가야 되나?’ 고민할까 싶어서요.nbspnbsp저는 한국에서 4일 전에 출발해서 필리핀에 들렀다가 왔습니다. 저희 JTS가 필리핀 민다나오에 있는 산악지대의 원주민 마을과 무슬림 분쟁지역에서 구호활동을 하고 있거든요. 산악지역에는 공산반군인 신인민군이 있고요, 무슬림지역에는 MILF라는 모로이슬람민족해방전선이 있습니다. 두 곳 모두 분쟁지역이다 보니까 학교가 제대로 운영이 안 됩니다. 학교 건물도 없지만 선생들도 안 가려고 하고요. 그래서 저희 JTS에서는 2003년부터 1년에 3개 내지 5개의 학교를 계속 지어왔습니다. 그렇게 저희가 학교를 지어주면 교육청에서는 선생님을 파견해 주겠다고 약속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필리핀에 47번째와 48번째 학교의 준공식을 하고 이곳으로 온 겁니다...” nbspnbspnbsp필리핀 민다나오에 48번째 학교를 준공했다는 소식에 모두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렇게 안부를 전한 후 곧이어 질문을 받았습니다.nbspnbsp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손을 들고 스님께 자신의 고민을 말했습니다. 6명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대부분 청년들이었는데, 아주 솔직한 질문에 대중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재미있게 법문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그 중에서 엄마가 동생을 너무 편애해서 힘들다고 하소연했던 한 여성분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질문한 분은 대구에서 온 여성이었는데, 경상도 사투리로 아주 솔직한 표현들을 거침없이 해서 대중들 모두가 배꼽을 잡고 웃었습니다.nbspnbspnbsp“엄마는 제 동생을 너무 편애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편애라고 생각을 안 하세요. 제 동생이 어릴 때부터 엄청 왕따를 당했는데, 저는 동생이 맞고 들어오면 때린 애를 찾아가서 두들겨 패줬습니다. 어릴 때부터 대학 때까지 그랬어요. 그런데 어릴 때부터 엄마가 남동생을 너무 편애하시니까 저는 독립적으로 제 일은 제가 다 알아서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동생이 20살이 넘은 다음에도 계속 편애하시더라고요. 동생이 오토바이를 사달라고 하면 사주고, 차도 사달라면 사주고, 졸업할 때 60만 원짜리 신발도 사주고, 120만 원짜리 옷도 사주고요. 그러니까 제가 ‘왜 동생한테만 해 주고 나는 안 해 주느냐?’고 했더니 엄마는 ‘너는 돈 벌잖아’라고 하셨습니다. 동생과 저는 2살 밖에 차이가 안 나는데요.nbspnbsp동생은 군대에 갔을 때도 불쌍한 척하면서 ‘아, 다른 애들은 다 사먹는데, 나만 못 먹고 있다’며 전화를 해서 저는 미칠 지경이었지만 1, 2만 원씩 보태줬습니다. 그렇게 받기만 했으면 엄마한테도 그만큼 해 드려야 되는데, 동생은 전혀 신경을 안 씁니다. 그러니까 동생은 고마운 마음이 없는 겁니다. 동생이 머리는 좋아서 대기업에 취직을 했는데, 입사하자마자 차를 샀습니다. 그런데 차 보험료가 비싸니까 엄마한테 달라고 했나 봐요. 그 얘기를 들으니까 제가 돌겠더라고요. 동생은 완전 ‘또라이’에요.”nbspnbsp“동생이 좀 얄미운 짓을 한다는 건 알겠어요. 그런데 질문의 요점이 뭐예요?”nbsp“얼마 전에 남편 때문에 안 좋은 일이 있었어요. 남편 친구 때문에 제가 법원에 가야 될 상황이 된 거예요. 그런데 벌써 그런 일이 두 번째입니다. 제가 속상해서 엄마한테 말씀드렸더니 항상 하던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참아야 된다고. 제가 결혼한 지 거의 2년째인데, 무조건 참으라는 건 옳지 않은 것 같아요.” nbspnbspnbsp“그러니까 질문자는 지금 남편이 문제예요? 엄마가 문제예요?”nbsp“엄마요. 엄마는 전혀 공감을 못 하세요. 제 얘기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동생한테만 관심이 있어요.”nbspnbsp“질문자의 아이가 몇 살이에요?”nbsp“아직 아이는 없어요.”nbspnbsp“그러면 질문자가 아직 아이를 못 낳아봐서 그래요. 아이를 낳아서 키워보면 엄마가 왜 그렇게 하는지 알게 됩니다. 부모가 관심을 갖고 예뻐하는 아이는 스스로 알아서 잘 하는 아이가 아닙니다. 부모는 뭘 잘 못해서 ‘아이고, 저게 나 없으면 어떻게 살까’ 하고 걱정되는 자식한테 더 정을 갖는 법이에요. 그러니까 엄마는 동생이 남자아이라서 그럴 수도 있겠지만 동생이 어릴 때부터 왕따 당하고 자기 일을 잘 못 챙기기 때문에 더 신경을 쓰게 되어 있습니다. 그게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부모가 제 자식을 아끼는데, 그걸 왜 질문자가 질투해요?”nbsp“제가 한국에 살았을 때는 100만 원씩 꼬박꼬박 저금을 해서 엄마한테 한꺼번에 천만 원씩 드렸어요. 저는 필요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그 돈이 다 동생한테 들어가는 거예요. 그래서 너무 짜증이 났습니다. 그런데 동생은 저보다 더 많이 벌어요. 월급이 400만 원인데, 왜 엄마가 걔한테 돈을 주는지 저는 도대체 이해가 안 갑니다.”nbspnbspnbsp“그건 질문자가 엄마가 안 되어 봐서 그래요. 큰아들은 돈을 잘 벌고 작은아들은 돈벌이가 시원찮으면, 큰아들한테 받은 돈을 작은 아들한테 주는 거예요. 큰아들이 노름을 해서 빚을 지면 엄마가 큰아들에게 욕은 해도, 작은 아들한테 돈을 얻어서 큰아들 빚을 갚아주고 그러는 거예요. 그게 부모의 심정이에요. 그건 옳다 그르다고 따질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게 엄마의 인생이니까 질문자는 엄마에게 간섭을 안 하는 게 제일 좋습니다. 질문자가 엄마한테 돈을 줬으면 그 돈으로 엄마가 엿을 사먹든 빵을 사먹든 동생을 주든 그건 엄마의 자유입니다.”nbsp“그게 문제가 아니라 동생은 ‘나는 결혼을 하면 엄마를 안 모시고 살 거다. 내가 왜 모시고 사냐?’ 라고 말합니다.”nbsp“그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건 동생의 자유입니다.”nbsp“그건 자식의 도리가 아니잖아요.”nbsp“20살이 넘으면 부모의 짐을 안 져도 됩니다.”nbsp“엄마는 20살이 넘은 동생한테 계속 지원을 하고 있는데요.”nbsp“그건 엄마가 좋아서 하는 거니까 질문자가 상관할 일이 아니에요.”nbsp“그래서 제가 동생과 근 5년간 연락을 안 했습니다.”nbsp“제가 보기에는 질문자가 또라이네요. 질문자가 힘들어하는 핵심 원인은 엄마의 사랑에 대한 질투심이에요. 그건 안 좋은 거예요. 질투할 사람이 없어서 동생한테 질투를 해요?”nbspnbsp“제 고민이 질투심 때문이라는 건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어요.”nbsp“그걸 질문자가 모르니까 저한테 질문하는 것이지요. 첫 번째, 20살이 안됐을 때 부모가 나를 도와주는 건 부모의 책임과 의무이고, 내가 그런 부모의 말을 들어야 되는 것도 하나의 책임과 의무에 속합니다. 그런데 20살이 넘으면 자식이 어떻게 하든, 부모가 어떻게 하든, 서로 간섭하면 안 됩니다. 그런데 질문자가 엄마한테 천만 원을 줬다는 건 자기가 좋아서 준 거잖아요. 질문자도 스스로 얘기했듯이 ‘필요 없어서 줬다’고 했잖아요. 자기가 돈이 필요 없으니까 엄마한테 갖다 버린 거란 말이에요. 엄마는 큰딸이 갖다버린 걸 주워서 작은 아들을 줬는데, 그게 뭐가 문제예요?”nbsp“제가 경상도 사람이다 보니 부끄러우니까 ‘아, 필요 없다. 가져라’고 말했던 거지요.”nbspnbsp“그래도 그렇게 말한 책임을 져야지요. 질문자가 엄마한테 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그렇게 하는 게 스스로에게 더 낫고 기분이 더 좋으니까 그렇게 한 거잖아요. 그리고 엄마는 그걸 받아서 자기가 주고 싶은 사람이나 자기가 봤을 때 ‘안됐다’ 싶은 사람한테 주는 거지요.nbspnbsp많은 분들이 저한테 ‘이건 꼭 스님 쓰세요’라고 말하면서 돈이나 옷, 음식을 줍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이해가 됩니다만 실제로 사람들이 주는 걸 제가 다 먹었으면 저는 벌써 배가 터져서 죽었을 거고, 제가 다 입었으면 매일 10겹은 껴입고 다녀야 할 겁니다. 그래서 제가 주시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라고 말은 하지만 실제로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 중에 필요한 사람들과 나눠서 씁니다.nbspnbsp그러니까 질문자가 ‘내가 준 돈은 엄마가 썼으면 좋겠다’ 하는 건 질문자의 마음이고, 그 돈을 자기가 쓰는 게 좋을지, 아들한테 주는 게 좋을지는 엄마가 결정할 일입니다. 그런데 질문자는 자꾸 엄마를 간섭하잖아요. 그건 잘못된 것입니다. 질문자는 엄마한테 돈을 준 걸 여기서 막 자랑하는 것 같아요.”nbsp“제가 엄마한테 돈을 드리는 이유는 엄마 집이 전셋집입니다. 한국에서는 2년마다 전셋집 계약을 갱신하잖아요. 그러니까 제가 일부러 목돈을 만들어서 드리는 거예요. 한국의 전세가가 얼마나 오르는지 제가 모르니까요. 그런데 엄마는 반찬도 허름하게 드시면서, 돈은 외제차 끌고 다니는 아들한테 다 주니까 제 마음이 안 좋아요.”nbspnbsp“질문자는 엄마가 선택한 인생에 자꾸 간섭하고 있어요. 부모가 자식을 간섭해도 자식이 싫어하는데, 자식이 왜 엄마를 간섭해요? 엄마에게 돈을 안 주는 건 불효가 아닌데, 엄마 인생에 간섭하는 건 불효에 속합니다.”nbsp“그럼 얼마 정도 드려야 돼요?” nbspnbsp“천만 원을 주든 1억 원을 주든 10원 한 장 안 주든 그건 질문자의 자유예요. 제 말은 준 것을 어떻게 쓰는지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말라는 거예요.nbsp질문자의 동생이 굉장히 현명한 거예요. 약간의 보호 본능을 일으켜서 엄마로부터도 도움을 받고, 또 취직을 해서 돈도 벌고, 또 결혼해서는 엄마도 안 모시고요. 그런데 질문자는 돈 벌어서 엄마한테 주고, 나중에 또 엄마 모셔야 되고... 제가 볼 때는 질문자가 엄마를 모실 것 같아요.”nbspnbsp“예, 맞아요. 이리로 모시고 오려고요.”nbsp“좋은 거예요. 동생이 안 모시겠다는 게 문제가 아니에요. 내 엄마 내가 모시는데, 누가 모시든 무슨 상관이에요. 스님이 보기엔 동생이 또라이가 아니라 질문자가 또라이에요.nbspnbspnbsp자기 모습을 자기가 못 보고 있어요. 영리한 척 잔머리는 굴리지만요. 질문자의 고민은 동생 문제도 아니고, 엄마 문제도 아니고, 자기 문제입니다. 자유로운 인간사를 자기 생각대로 규정짓고 있거든요. 늙은 부모를 자꾸 자기의 가치기준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하는 게 잘못된 생각입니다. 지금 질문자도 생각을 잘못하고 있어요. 그런 마음으로 엄마를 모시면 같이 살면서 서로 원수가 됩니다.nbspnbsp어린 자식한테는 모범을 보여야 되고, 늙은 부모한테는 맞춰야 됩니다. 그저 부모가 하자는 대로 따르고, 마음대로 하시도록 배려해야 됩니다. 엄마가 주고 싶은 대로 주고, 살고 싶은 대로 살겠다는데, 왜 질문자가 그걸 보고 미쳐서 날뛰고 그래요? 질문자의 생각이 잘못된 거예요. 정말 고쳐야 해요. 계속 그러면 부모형제 사이에 서로 감정이 상해서 질문자만 외로워집니다. 엄마하고도 연락 안 하고, 동생하고도 연락 안 하고 살면 자기만 외롭지요.”nbsp“그런데 저는 이렇게 연락 안 하고 사는 게 오히려 편하기도 합니다. 진짜 편해요.”nbsp“편하면 그렇게 사세요. 그런데 자기가 진짜 편하면 저한테 왜 질문을 할까요? 안 편하니까 묻겠지요. 아이고, 진짜로 질문자가 또라이 맞네요.”nbspnbspnbsp“예, 엄마하고 연락 안 하는 건 불편하더라고요. 엄마랑 연락 안 한지 8개월쯤 되니까 남편이 ‘이건 아닌 것 같다’면서 스님께 한번 여쭤보라고 하더라고요.”nbsp“남편이 답을 몰라서 스님한테 물어보라고 한 게 아니에요. 남편이 말해 봐야 질문자가 말귀를 못 알아들으니까 그나마 질문자가 좋아하는 법륜 스님이 말하면 좀 알아들을까 싶어서 물어보라고 한 거예요. 제가 한 얘기를 남편한테 전해 보세요. 그럼 남편이 ‘내가 똑같은 얘기를 벌써 몇 번이나 했잖아’ 라고 할 거예요.”nbspnbsp“속이 시원합니다. 이제 해결됐어요. 감사합니다.”nbspnbsp스님의 물음에 경상도 특유의 사투리로 꼬박꼬박 대답을 잘 하던 질문자는 마침내 활짝 웃었습니다. 스님도 경상도 출신이어서 경상도 사투리로 대답을 해주었는데 사투리가 죽이 척척 맞아들어가는 모습에 대중들은 박장대소를 했습니다.nbsp질문자가 웃으며 자리에 앉자 청중석에 앉아 있던 다른 한 분이 질문자에게 응원의 한 마디를 해주고 싶다며 손을 들고 말했습니다.nbspnbsp“스님, 제가 질문자에게 응원의 한 마디를 해 드리고 싶어서요. 조금 창피할 수도 있을 텐데 저렇게 용기 내어서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질문하신 분은 참 순수한 분이세요.”nbsp아마도 질문자에게 스님이 또라이라고 농담한 것이 마음에 걸려서 응원의 마음을 보내고 싶었나 봅니다. 그러자 스님은 경상도 사투리를 잘 이해해야 한다고 하면서 몇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더 들려주었습니다.nbspnbspnbsp“예, 맞아요. 제가 질문자한테 농담으로 또라이라고 그랬는데 그게 순수하다는 뜻입니다. 결혼생활 20년이 됐는데도 남편이 아내한테 항상 ‘아이고, 못 생긴 게. 나나 너를 데리고 살지 누가 너를 데리고 살겠어’ 라고 하는 건 ‘예쁘다’는 뜻입니다. 경상도 남자들은 ‘예쁘다’는 말을 하려면 머리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 같아서 제대로 못합니다.nbspnbsp그러니까 질문자도 ‘엄마, 이거 엄마 용돈으로 쓰세요’라고 예쁘게 말을 못 하고 ‘나 필요 없으니까 엄마 가져라’라고 했다잖아요. 그러니까 그런 걸 잘 알아들어야 해요. 질문한 당사자는 제가 ‘또라이’라고 해도 아무렇지도 않아 하잖아요. nbspnbsp경상도 사람들은 말을 삐딱하게 하는 습관이 있어요. 그래서 울산, 경주 쪽은 이럽니다. ‘내일 우리 집에 놀러와라’ 그러면 ‘응, 갈게’ 하고 대답하면 될 텐데, ‘가면 뭐 주는데?’라고 말합니다. 약속시간에 좀 늦으면 ‘좀 늦었구나’ 하면 될 텐데, ‘난 니 오다가 뒈진 줄 알았다’ 그래요.nbspnbspnbsp말투가 그래요. 저도 그럴 때가 있어요. 공양간 봉사자들이 설거지를 끝내고 뒤늦게 밥 먹는 걸 보면 ‘아이고, 수고했다. 다른 사람 공양할 수 있도록 다 준비해 주느라 이제야 먹는구나’ 하면 좋을 텐데, 저도 어렸을 때부터 자라온 내력이 그래서 ‘아직도 먹나? 몇 그릇 째고?’ 라고 말이 나가요. 경상도 사람들은 제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 다 알아듣는데 서울 사람들은 못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어떻게 그런 말을 하느냐? 공양간 뒷정리까지 다 하고 이제 겨우 숟가락 들었는데 몇 그릇 째냐고요?’ 라고 항의를 합니다. 그래서 저도 참회한 적이 있습니다.”nbspnbsp경상도 사투리가 쏟아지면서 강연장은 웃음 바다가 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보다 더 웃기는 코메디가 없다며 박수를 쳤습니다.nbspnbspnbsp이렇게 질문에 대한 답변을 모두 마치니 벌써 약속한 2시간 30분이 다 되었습니다. 정말 유익하고 재미있고, 너도 행복하고 나도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nbspnbsp마지막으로 스님은 젊은 청년들이 오늘 강연에 많이 참석한 것을 헤아리며 너무 눈치보면서 살지 말고 조금 더 유연하게,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으면 좋겠다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nbspnbsp“젊을 때는 욕도 좀 얻어먹고, 실수도 하면서 살아야지, 실수를 안 하려고 하면 아무 일도 못 해요. 실수도 하고, 반성도 하고, 사과도 하면서 살 생각을 해야 자유롭게 살 수 있어요. 살얼음판 걷듯이 세상을 살다 보면 평생 내 인생을 못 삽니다. 이렇게 자유로운 세상에 태어나 무엇 때문에 그렇게 눈치 보며 살아요?nbspnbspnbsp오히려 살아가면서 조정을 하세요. 그냥 덜렁덜렁 살면서 ‘저 사람은 서울 사람이라 이런 얘기를 못 알아듣는구나. 그러니까 말조심을 해야 되겠다’, ‘저 사람 하는 말에 내가 상처를 입었는데, 저 사람이 경상도 남자라 저러지 속마음은 안 그렇구나’ 하는 걸 알아 가면 됩니다. 정토회에서 오래 수행한 보살님이 말하길, 자기 남편이 ‘내가 못 생긴 너하고 살아준 것만 해도 고마운 줄 알아라’고 하는 말이 ‘예쁘다’는 뜻인 줄 알아듣기까지 20년이 걸렸답니다. 그 보살님이 절에 간다고 할 때마다 남편이 ‘가지 마라’ 라고 하니까 보살님이 ‘그래도 가야 된다’ 고 했대요. 그러니 남편이 ‘가려거든 다시는 들어오지 마라’ 라고 했답니다. 그랬더니 보살님이 ‘예, 알겠어요. 빨리 들어올게요’ 라고 웃으며 대답했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남편이 거칠게 말은 하지만 그 말이 ‘빨리 들어오라’는 뜻임을 헤아린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알아들을 수 있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립니다.nbspnbsp그냥 살아가면서 맞춰가면 되는 거예요. 요즘은 너무 존중하고 또 존중받으려니까 결혼생활이 피곤해서 오래 같이 못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겁니다. 그러니 그냥 대충 사세요. 대충 살면서 맞춰 가면 됩니다. 시댁에 가보면 대강 시댁 분위기가 파악되잖아요. nbsp‘남편만 봐서는 이해가 잘 안 됐는데, 시댁에 가보니까 집안의 분위기가 이래서 남편이 저렇다는 걸 알겠다’ 이렇게 헤아리면서 이해하고 맞춰 살면 됩니다. 사람이 한 번에 탁 바뀔 수는 없어요.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이기적이에요? 안 이기적이에요?”nbsp nbsp“이기적이에요.”nbspnbsp“그런데 왜 자꾸 남을 이기적이라고 비난해요? 모든 인간이 이기적인데요. 그 이기적인 인간들끼리 서로 적절하게 이익을 공유하는 게 세상입니다. 사람들은 다 성격도, 생각도, 믿음도 다르니까 그 다름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조절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거예요. 극단주의는 우리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지 않고, 오직 자기만 옳다고 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삶을 조금 유연하게 사세요.nbspnbsp내일 당장 천국에서 기차가 와서 ‘데려가겠다. 가자’고 하면 당장 따라갈 거예요? 아마 안 가겠다고 하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죽겠다, 못 살겠다’고 하지만 여기서 더 살고 싶지요? 그러니 조금만 양보하면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어요. 이왕 사는 거 조금 더 행복하게 삽시다.”nbspnbsp스님의 마무리 말씀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갈채와 함성이 오랫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만큼 오늘 강연이 참 감동적이었고 좋았다는 대중들의 마음이 그대로 전달이 되었습니다.nbspnbsp강연을 마친 후 책 사인회가 무대 앞에서 열렸습니다. 먼 길을 달려온 스님을 가까이에서 뵙고자 많은 교민들이 길게 줄을 서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습니다.nbspnbsp▲ 책 사인회nbsp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교민들 한 명 한 명과 눈도 맞추어 주고 “힘내세요” 라고 격려 말씀도 해주었습니다. nbspnbspnbsp교민들이 모두 강연장을 빠져나가자 행사장 뒷정리를 하고 있던 시드니정토회 회원들 모두가 함께 모여서 스님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오늘 강연장 곳곳에서 보여준 모습처럼 회원들 모두가 열정적으로 활동을 해서 그런지 1년 사이에 봉사자들이 부쩍 늘어난 모습이었습니다.nbspnbsp▲ 오늘 강연을 준비한 시드니정토회 회원들nbsp스님은 봉사자들 모두에게 한국에서 가져온 단주를 하나씩 손목에 걸어주었습니다. 단주가 동그란 알맹이로 되어 있어서 공항 검색대에 걸려서 갖고 나오는데 어려움이 있긴 했지만, 너무나 기뻐하는 봉사자들의 모습을 보니 이보다 더 좋은 선물이 없다는 생각과 함께 가져오기를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nbspnbsp▲ 단주를 선물하고 있는 스님nbsp수고한 봉사자들에게 합장으로 감사 인사를 한 후 스님은 다시 시드니공항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nbsp공항으로 가는 길에는 운전 봉사를 해주는 거사님이 가는 길에 오페라하우스가 보인다며 데려다 주었습니다. 스님은 해외에 어디를 가도 늘 공항에서 강연장만 왔다가기 바쁜데, 오늘은 조금 여유가 생겨서 오페라하우스를 잠시 거닐어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nbspnbsp▲ 하버 브릿지의 야경nbsp바닷가에 다다르니 저 멀리 하버 브릿지가 보이고, 그 옆에 웅장한 규모의 오페라하우스가 그 모습을 드러내었습니다. 바닷 바람이 강해서 아주 시원했습니다. 사진 한 장만 간단히 찍고 다시 공항으로 향했습니다.nbspnbsp▲ 시드니의 랜드마크인 오페라하우스nbsp밤 10시에 시드니공항을 출발한 비행기는 11시 40분에 멜번공항에 도착했습니다. 어제도 밤 비행기, 오늘도 밤 비행기를 탔는데, 내일도 밤 비행기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이제 밤 비행기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습니다.nbspnbsp▲ 밤 11시 40분. 멜번공항 도착nbsp멜번공항을 나오니 멜번정토회에서 김승주님이 마중을 나와 스님 일행을 안전하게 멜번 정토법당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새벽 1시에 멜번 정토법당에 도착하니 늦게까지 집에 가지 않고 기다리던 멜번정토회 회원들이 스님에게 삼배를 올렸습니다.nbspnbsp▲ 멜번 정토법당nbsp스님은 “수고 많으셨다”고 감사 인사를 한 후 휴식을 취하러 방으로 들어갔습니다.nbspnbsp내일은 멜번 정토법당에 머물다가 오후 5시에 강연이 열리는 박스힐 타운홀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저녁 6시부터 8시까지 멜번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한 후 밤 11시 비행기로 한국으로 출발합니다.nbsp ※ 카카오톡으로 법륜 스님의 하루를 매일 받아보세요. 아래 배너를 누르고 친구 추가
2016.3.6 (호주 1일째_오전) 시드니 멜번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오전에 시드니와 멜버른에서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을 위해 수계식 법문을 해준 후 오후에는 시드니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을 했습니다.nbspnbsp어젯밤 10시 비행기로 필리핀 마닐라 공항을 출발한 스님은 밤새 8시간을 비행하여 아침 9시에 시드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비행기 의자에 앉아 잠을 잔 셈입니다.nbspnbsp▲ 8시간 동안 비행기에서 앉아 잠을 자는 스님nbsp다만 에어콘 바람이 너무 강해서 몸에 한기가 들었는지 갑자기 콧물과 기침이 나와 조금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스님은 의자에 앉아 휴식을 취하는 와중에도 원고 교정을 계속 하였습니다.nbspnbspnbsp입국 수속을 밟고 아침 10시가 넘어 공항 밖으로 나오니 시드니정토회 정은지 총무님과 운전봉사자 정귀수님이 반갑게 환영을 해주었습니다. 악수를 하고 인사를 나눈 후 곧바로 강연장인 시드니대학교로 향했습니다.nbspnbsp▲ 공항 마중을 나온 정은지 총무님과 운전봉사자 정귀수님nbsp11시부터 곧바로 정토불교대학 수계식이 예정되어 있어서 아침 식사는 이동하는 차 안에서 도시락으로 먹었습니다. 시드니정토회에서 정성껏 도시락을 싸주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었습니다. nbspnbsp▲ 이동하는 차 안에서 아침 식사nbsp수계식이 열리는 시드니대학교 이스턴 에비뉴 오디토리엄에 도착하자마자 스님은 곧바로 화장실에서 세수만 하고 행사장으로 들어갔습니다. 먼저 오전에는 수계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시드니정토회 총무 소임을 맡고 있는 정은지님의 경과 보고와 함께 수계식이 시작되었습니다.nbspnbsp▲ 경과보고를 하고 있는 시드니정토회 정은지 총무님nbsp시드니 정토불교대학은 2010년 2월에 처음 시작되어 지금까지 74명이 졸업을 하였으며, 오늘은 시드니에서 15명, 멜번에서 7명, 총 22명이 졸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졸업생 중에서 오늘 수계를 받는 사람은 시드니 정토법당 12명, 멜번 정토법당 4명을 포함해 총 16명입니다.nbspnbsp▲ 시드니, 멜번 정토불교대학 수계식nbsp이렇게 16명이 가사를 여법하게 수하고 자리한 가운데 수계식이 시작되었습니다. 스님은 대중들에게 삼귀의 오계 수계를 하기에 앞서 부처님의 가르침이 어떤 역사를 거쳐 오늘의 나에게 이르렀는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그런 후 오계를 지키는 것이 왜 소중한 것인지 그 의미를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한국에서 학교 선생님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하면 불교신자인 선생님들은 확실히 아이들을 때리는 비율이 낮다는 통계가 나올까요? 술주정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해 보니까 불교신자들은 확실히 적다는 통계가 나올까요? 폭행하는 사람을 경찰이 잡아서 조사해 보니까 불교신자는 거의 없다는 통계가 나올까요? 도둑을 잡아서 조사해 보니까 불교신자는 특별히 적다는 통계가 나올까요? 성추행범을 잡아서 전부 조사해 보니까 불교신자는 거의 없다는 통계가 나올까요?nbspnbspnbsp만약 현실이 그렇지 않다면 불교신자라는 게 무슨 대수겠어요? 불교신자면 뭐하고 기독교신자면 뭐하고 무교면 어떻겠어요? 그런 불교신자는 아무런 불교적 가치가 없는 그냥 부처님한테 복 빌기 위해서 신자가 된 사람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런 불교신자의 수가 늘든 줄든 이 세상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습니다.nbspnbsp그렇게 이름만 불교신자인 사람들에게 수계하려고 제가 밤새도록 비행기 타고 와서 아침부터 이렇게 강단에 앉아 있겠어요? 한 명이라도 불교 수행자가 늘어나는 만큼 세상이 좋아져야 된다는 믿음 때문에 이러는 겁니다.nbspnbspnbsp불자들이 다섯 가지 기본계율, 즉 오계만 지켜도 이 세상은 정말 좋아질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친구들이 ‘야, 너는 좋겠다. 엄마가 불자여서 공부하라는 잔소리 들을 일은 없겠네’, 학생들이 ‘야, 올해는 선생님이 불자여서 매 맞을 일은 없겠다’, 사업가들이 ‘거래처 사장이 불자라고 하니까 사기당할 일은 없겠다’, 환자들은 ‘의사가 불자라니 과잉진료 받을 일은 없겠다’ 이렇게 말하게 될 겁니다. 그러니 오계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아야 됩니다. 오계를 잘 지키면 세상에 살면서도 부처의 길을 갈 수가 있는 거예요.”nbspnbsp다섯 가지 계만 잘 지켜도 우리 사회가 참 좋아질 것이라는 말씀이 오랫동안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우리 사회의 모든 문제들이 이 다섯 가지 계율을 지키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것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왜 오계를 지켜야 하는지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습니다.nbspnbsp이어서 스님은 오계를 하나 하나 읊어 주면서 수계 대중들이 잘 지킬 것인지 물어보았습니다.nbspnbspnbsp“이것이 우바새, 우바이들의 계이니 그대들은 몸과 목숨을 다하여 능히 잘 지키겠습니까?”nbsp“잘 지키겠습니다.”nbspnbsp대중들이 큰 목소리로 잘 지킬 것을 약속하자 스님은 모두에게 불명과 수계증을 수여했습니다. 한 명 한 명 앞으로 나오게 해서 수여한 불명의 의미를 모두 해석해 주었습니다.nbspnbsp▲ 불명과 수계증 수여식nbsp“앞에 서 계신 분의 불명은 ‘능인화’ 입니다. 만불 가운데 세 번째 부처님의 명호가 ‘능인’ 여래불입니다. 능인이란 ‘어질고 전능하다’는 뜻인데 이것은 모든 중생을 어질게 두루 보살피시는 부처님이란 뜻이 됩니다. 부처님의 이름인 ‘능인’을 따서 ‘능인화’라는 불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별로 어질게는 안 생겼네요? 앞으로는 어질게 살아야 해요. 알았지요?”nbsp“예.”nbspnbsp“두루뭉술하게 모든 사람을 좋게 봐줘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처지에서 보면 다 불쌍한 사람이에요. 우리 눈으로 보면 술 먹고 행패부리는 사람이 나쁜 인간이지만 그 사람의 까르마, 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어릴 때 그런 부모 밑에서 태어나 자랐기 때문에 자기도 자기를 어쩌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 까르마를 봤을 때는 불쌍하지 않은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니 능인화 보살님은 앞으로 상대의 입장에서 보고 능히 다 구제할 수 있어야 합니다.”nbspnbsp스님의 짧고 명쾌한 해설에 모두들 웃음을 터뜨리며 기뻐했습니다. 이번에는 남자 분이 불명을 받았습니다.nbspnbspnbsp“거사님의 불명은 ‘덕주’입니다. 만불 가운데 1543번째 부처님의 명호가 덕주여래불입니다. ‘베푸는 자 가운데에 주인이다’ 하는 뜻입니다. 집에 쌓아둔 게 많이 있어요? 재물이 없으면 마음으로도 베풀고, 몸뚱이로도 베풀어야 돼요. 그래서 거사님은 항상 사람들에게 뭘 얻을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거사님이 바로 베푸는 자의 주인이기 때문에. 알았죠?”nbsp“예.”nbsp“물이 고이면 썩지만 물을 자꾸 퍼내면 새물이 나오듯이, 자꾸 베풀면 영원히 베푸는 사람이 될 수 있는 분이 바로 덕주 거사님입니다.”nbspnbspnbsp이렇게 스님은 수계를 받은 16명에게 불명의 의미를 자상하게 일러주었습니다. 수계식을 마치고 나서 대중들 모두 하나같이 “스님은 속마음을 꿰뚫어보시는지 딱 저 사람에게 맞도록 불명을 해설해 주셨다”며 아주 좋아했습니다.nbspnbsp10분 간 휴식 시간을 가진 후 오후 1시부터는 정토불교대학 졸업식이 열렸습니다. 졸업식에는 경전반 졸업자까지 포함해 총 26명이 참석했습니다. 졸업생들이 스님께 법문을 청하자 스님은 졸업생들을 격려해주면서 조금 더 포용적이고 마음이 열려있는 사람이 되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불자는 사회의식 수준이 보통 사람보다는 높아야 됩니다. 그런데 현재 대한민국의 불교신자는 일반 국민들보다 의식수준이 높을까요? 그건 학벌하고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nbspnbsp▲ 정토불교대학 졸업식nbsp예를 들어 성소수자의 인권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은 반대해도 종교인은 용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본인과 그 부모는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또 얼굴이 검다고, 여자라고, 장애가 있다고 차별받으면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다 자기가 선택한 게 아니잖아요. 태어났는데 그렇게 돼있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러니 차별하는 것은 도리에 맞지가 않습니다.nbspnbsp기독교 신앙에 비추어서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첫 번째로 기독교에서는 천하 만물을 다 하나님이 창조했다고 하잖아요. 그럼 그 사람들도 하나님이 창조한 거잖아요. 그런데 얘기를 들어보니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만 창조했지 그런 사람들은 창조를 안 했대요. 그럼 ‘하나님이 천하 만물을 창조했다’는 말은 맞는 말이 아니잖아요. 두 번째로 그들도 하나님이 창조한 게 맞다면 하나님이 소위 불량품을 창조했다는 거잖아요. 하나님은 전지전능하다면서 왜 불량품을 만드나요? 그러니까 일부 기독교인들이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차별하는 건 곧 자기 신앙을 부정하는 게 됩니다.nbspnbsp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의식 수준이 되어야 합니다. 부처님은 2,600년 전에 태어나셨는데도 계급차별과 남녀차별을 부정하셨습니다. 요즘도 아니고 2,600년 전에 말이에요. 그러니까 당시에 사회적 저항을 많이 받으셨지요.nbspnbspnbsp우리는 그런 부처님이 가셨던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우리들의 마음이 닫혀있으면 안 됩니다. 열려있어야 합니다. 자기의 정체성은 확고히 갖되 타인에 대해서는 열린 마음으로 포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길을 가는 게 수행자입니다. 여러분, 수행자로서 자랑스럽게 이 길을 가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졸업을 축하합니다.”nbsp스님의 따뜻한 격려말씀에 모두들 크게 박수를 치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 스님의 감로 법문이야말로 졸업생들에게는 가장 큰 졸업 선물인 것 같았습니다.nbspnbsp졸업장 수여를 마친 후 졸업생들은 머나먼 이국땅에 살고 있는 26명을 위해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와서 4시간에 걸쳐 수계식과 졸업식을 해준 스님에게 감사한 마음을 담아 꽃다발을 건네고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손수건을 꺼내nbsp눈물을 닦는 분들이 많았습니다.nbspnbsp▲ ‘스승의 은혜’를 부르는 졸업생들nbsp스님의 법문에 모두들 들뜬 마음이 되어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진정한 수행자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뒤에 자리한 선배 도반들과 가족들이 큰 박수로 격려의 마음을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 시드니, 멜번 정토불교대학, 경전반 졸업생 모두 함께nbsp수계식과 졸업식은 오후 3시가 넘어서 끝났습니다. 30여 분 동안 여유가 생겨 늦은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하는 동안에도 스님은 한국과 계속 전화 연락을 하며 필요한 업무를 챙기셨습니다.nbspnbsp이어서 오후 4시부터는 시드니 교민들을 위한 즉문즉설 강연이 열렸습니다. 350여 명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감동적이고 재미가 넘쳐나는 대화가 계속 이어졌습니다. 다음 이야에 계속 됩니다.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3.5 (필리핀 4일째) 아시아 지역 정토불교대학 졸업식 및 수계식
nbsp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마닐라 정토법당에서 마닐라, 세부, 홍콩, 방콕 등 아시아 지역에서 각각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졸업한 11명을 위해 수계식 및 졸업식 기념 법문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오전에 원고 교정 작업을 한 후 이원주 회장님 댁을 출발한 스님은 12시에 마닐라 정토법당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이 법당에 들어서자 일찍 도착한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이 반갑게 스님을 환영해 주었습니다.nbspnbsp▲ 마닐라 정토법당nbsp그리고 대중들이 메밀국수를 정성껏 차려놓아서 스님도 함께 맛있게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nbspnbspnbsp대중들 중에는 외국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부인이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고 너무나 행복해져서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자 방콕에서 비행기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외국인들에게는 이렇게 배우자의 변화를 통해 스님의 가르침이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무척 반가웠습니다.nbspnbspnbsp가사를 수하고 여법하게 자리에 앉은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은 청법가와 삼배로 스님에게 수계 법문을 청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부처님의 법이 어떻게 지금의 나에게까지 이르렀는지, 끊겼던 재가수행자의 길이 어떻게 복원이 되었는지 설명하면서 수계 대중들도 이제는 법을 전하는 일을 해나가야 함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우리나라는 불교가 A.D 48년에 처음 인도로부터 가야로 전래되었습니다. 그러니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의 일이었고, 그때 전래된 불교는 소승불교였습니다. 그로부터 약 300년 후에 중국을 거쳐서 우리나라에 온 인도의 전법자들에 의해서 372년에는 고구려에 순도화상이, 384년에는 백제에 마라난타 대사가 불법을 전래했습니다.nbspnbspnbsp신라에는 아도화상이 불법을 전래하러 갔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오히려 불교 신앙을 금지했습니다. 그래서 불법을 공식적으로는 전하지 못하고 국경 근처 모례 장자의 집에 숨어서 비밀리에 전했을 뿐입니다. 결국 신라는 신라와 가야의 합병을 둘러싸고 가야의 신앙인 불교를 용인할지 말지에 대해서 국론이 분열되자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로써 528년에 불교를 공인하였고, 결국 532년에는 하나의 나라로 통합되면서 불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불교는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국교로서 공인되다가 조선조 500년 간은 유교가 국교가 되면서 유교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삼귀의와 오계를 받는, 즉 재가수행자가 되는 길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결국 조선시대에는 복을 비는 신자만 있게 되고, 재가수행자의 길은 없어진 것입니다.nbspnbsp또 부처님의 정법도 역대 조사로 계승되어 오다가 조선조에 극심한 탄압을 받게 되자 그 법맥이 끊어져서 결국 소멸되었습니다. 그러다가 150여 년 전에 태어난 용성진종조사에 의해서 그 끊긴 법맥이 회복되어서 용성진종조사가 석가여래부촉법 제68세, 석가여래계대법 제75세로 등단을 하신 뒤 다시 재가수행자의 길인 삼귀의 오계를 복원하셨습니다. 용성진종조사의 법을 동헌 완규조사가 잇고, 동원 완규조사의 법을 불심도문 대사가 잇고, 불심도문 대사의 법을 계승한 석가여래부촉 계대법 제78세 지광 법륜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nbspnbsp그런 과정을 거쳐서 재가수행자의 길이 복원이 되었기 때문에 오늘 여러분들은 부처님 당시의 구리가장자 부부처럼 재가수행자가 될 수 있는 삼귀의 오계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오늘 계를 받는 여러분들은 더 이상 복을 비는 신자의 길이 아닌 스스로 어리석음을 깨우쳐서 괴로움이 없는 열반과 속박이 없는 해탈을 증득하기 위한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nbspnbspnbsp여러분은 재가수행자의 길을 가겠다고 발원해서 이렇게 수계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 가르침을 잘 받아 지녀서 해탈과 열반을 증득할 때까지 수행 정진을 하는 건 물론이고, 이 좋은 법을 널리 세상에 전파해서 괴로운 사람들이 기쁨을 만끽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셔야 합니다. 또 이 법을 전 세계로 그리고 미래로 전하셔야 합니다. 마치 역대전등 제대조사들이 부처님으로부터 이 지광 법사에 이르도록 이어왔듯이 여러분들도 이 법을 전 세계로 미래로 이어가야 합니다. 이런 연유로 오늘 삼귀의 오계 수계식을 하게 되었습니다.” nbspnbsp이어서 스님은 지난 1년 동안 정토불교대학에서 무엇을 배웠는지 상기시켜 주었습니다.nbspnbsp“여러분들은 지난 1년 동안 정토불교대학에서 공부를 하신 끝에 오늘 졸업하게 되었습니다. 정토불교대학의 교과과정을 살펴보면, 첫 번째 과정은 ‘불교란 무엇인가’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복을 비는 신자의 길이 아니고, 수행 정진을 통해 해탈과 열반을 성취하는 수행자의 길입니다. 두 번째 과정은 ‘부처님은 누구인가’ 였습니다. 부처님은 우리가 복을 빌면 복을 주는 신적 존재가 아니고, 우리를 해탈과 열반으로 인도하는 위대한 스승, 즉 사람과 신들의 스승인 천인사이십니다. 세 번째 과정은 부처님의 가르침이 팔만대장경이라고 불릴만큼 많은데 그 가르침의 요지인 근본불교에 대한 공부였습니다. 그리고 네 번째 과정은, 이러한 불교가 2,600년 동안 내려오면서 어떻게 변화했는지, 어떤 연유로 세속에 물들어 종교화됐는지, 그걸 새롭게 일어난 대승불교가 어떻게 다시 바로 세웠는지, 또 선불교가 일어나면서 어떻게 불교가 수행자의 길로 되돌아 왔는지에 대한 불교의 역사를 공부했습니다.nbspnbsp그동안 여러분들은 붓다의 근본 가르침, 즉 테라밧다를 계승하면서 또한 마하야나와 선불교를 계승해서 오늘에 이르게 됐다는 걸 공부해 온 것입니다. 공부를 마치고 나서 여러분들 스스로 ‘아, 나도 부처의 길을 가겠다’ 하고 마음을 내셨기 때문에 오늘 수계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수계를 받게 되면 여러분은 이제 부처의 길을 가는 사람들의 모임인 상가, 즉 부처 클럽의 회원이 되는 겁니다.”nbspnbsp이제 부처 클럽의 회원이 되었다는 말에 수계 대중들 모두 크게 웃었습니다.nbspnbsp다음은 연비 시간이 되었습니다. 대중들이 지난 세월 오계를 어기고 살면서 지은 죄업을 지극한 마음으로 참회하는 시간입니다. 호궤합장을 하고 참회 진언을 외우자 스님이 향으로 불을 피워 따끔하게 연비를 해주었습니다.nbspnbsp▲ 연비를 하고 있는 스님nbsp이어서 스님은 다섯 가지 계율을 하나씩 설하고 그 의미에 대해서도 자세히 알려준 후 대중들에게 오계를 잘 지킬 것인지 물었습니다.nbspnbspnbsp“첫째, 산 목숨을 죽이지 말라.nbspnbsp둘째, 도둑질을 하지 말라.nbspnbsp셋째, 삿된 음행을 하지 말라.nbspnbsp넷째, 거짓말을 하지 말라.nbspnbsp다섯째, 술을 먹지 말라.nbspnbsp이것이 우바새, 우바이들의 계이니 그대들은 몸과 목숨을 다하여 능히 잘 지키겠습니까?”nbsp“잘 지키겠습니다.”nbspnbsp대중들은 스님의 질문에 크게 대답했습니다.nbspnbsp이어서 불명 및 수계증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스님은 수계를 받는 9명 모두에게 각기 수여한 불명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매 학기마다 2천여 명이 수계를 받기 때문에 대표로 한 명만 불명의 의미를 설명해주는데, 오늘은 9명이 수계를 받다 보니 모두에게 불명의 의미를 설명해 주었습니다.nbspnbsp▲ 불명과 수계증 수여nbsp한 명씩 앞으로 나와 불명과 수계증을 받자 대중들은 큰 박수로 함께 축하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수계식을 모두 마친 후 화장실도 다녀올 겸 잠시 휴식 시간을 가졌습니다.nbspnbsp휴식 시간을 마친 후에는 졸업식이 거행되었습니다. 대중들은 청법가와 삼배를 하며 스님께 졸업 기념 법문을 청했습니다.nbspnbspnbsp그러자 스님은 졸업은 부처로 나아가는 첫 출발이라고 하면서 수행, 보시, 봉사하는 삶을 부지런히 살아갈 것을 당부했습니다.nbspnbsp“오늘 정토불교대학과 경전반을 졸업하신 분들께 먼저 축하말씀을 드립니다. 또 불교대학을 졸업하도록 도와주신 담당자 분들께도 감사말씀을 드립니다.nbspnbspnbsp정토불교대학은 원래 2년제였어요. 1년은 예비과정이었는데, 첫 번째는 nbsp‘불교란 무엇인가?’ 하는 실천적 불교사상, 두 번째는 ‘부처님은 누구인가?’, 세 번째는 ‘부처님의 근본가르침은 무엇인가?’, 네 번째는 ‘불교의 역사는 어떻게 되는가?’였습니다. 나머지 1년이 본과정이었는데, 거기서는 아함경, 금강경, 반야심경, 선불교의 육조단경을 공부했습니다. 이렇게 2년제로 하니까 입학생에 비해서 졸업생 비율이 너무 낮았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불교대학과 경전반으로 나누었습니다. 마치 대학과 대학원처럼 된 것이지요. 결과적으로 정토회에서 학벌 인플레가 심해졌습니다.nbspnbsp제가 이 말을 하는 이유는 원래대로라면 ‘불교대학 졸업’이란 ‘경전반 졸업’을 의미한다는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불교대학을 졸업한 사람은 반드시 경전반에 진학해야 합니다. 알았지요?”nbspnbsp“예.”nbspnbspnbsp“그래야 불교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거든요. 졸업이 끝이 아닙니다. 오히려 졸업은 우리가 해탈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즉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첫 출발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계를 받는 것입니다. 또 여러분들은 아직 헤매고 있지만 미래세에 부처가 되리라는 것을 오늘 예약하고 불명도 미리 받았습니다. 이렇게 한 발을 디디셨으니 꾸준히 수행 정진해서 모두들 열반의 언덕에 도달하시기 바랍니다.nbspnbspnbsp스스로 부자라고 자부하며 계속 쓰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창고가 다 비게 되겠지요? 그래서 ‘아무리 부자라도 3대를 못 간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면 쓸 줄만 알지 모을 줄은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말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가난해서 베풀기 어렵다’는 말도 들어봤나요? 가난하면 제 살기가 바빠서 남에게 베풀 여유가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현재 여유가 있는 데도 베풀지 않으면 나중에 가난해지고, 현재 가난하다고 베풀지 않으면 나중에도 가난해진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러니 여유가 있을 때 미리 공덕을 쌓아두어야 그 여유가 지속될 수 있습니다.nbspnbsp까르마라는 건 ‘이렇게 가면 어떻게 될 거다’ 하는 걸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걸 또 바꾸려면 바꿀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심을 하기가 쉽지 않다는 겁니다. 또한 복을 지어야 될 일을 조급한 마음으로 받으려고만 하면 결국 안 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자기가 복 좀 있다고 까불다가 그 복을 까먹지도 말고, 어렵다고 너무 쪼들리지도 말고, 그럴수록 더 기도하고 봉사를 해보세요. 여러분들은 절에 와서 자기가 보시, 봉사 좀 했다고 생색내고 까불잖아요.nbspnbspnbsp엉뚱한 곳에 돈을 쓰느니 이런 좋은 일에 돈을 쓰는 게 더 재미있지 않을까요? 이 세상을 위해서 쓴 건 몇 배가 되어서 다 자신에게 공덕으로 되돌아옵니다. 불자라면 그 공덕마저도 바라지 말라는 뜻에서 ‘무주상 보시’라는 말이 있지만요. 여태까지 정토회 봉사자들 중에서 ‘수행, 보시, 봉사 많이 했다고 집구석 망했다’는 얘기는 못 들어봤습니다.nbspnbsp요즘은 집안 형편이 조금 어려우면 아내들도 주로 나가서 벌잖아요. 우리 정토회 봉사자들 중에 그러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제가 ‘그렇게 하지 마라. 그러면 평생 거기에 매어 살게 된다. 남편이 적게 주면 적게 먹고, 많이 주면 많이 먹으면서 그냥 봉사해라’고 합니다. 그래서 꾸준히 봉사를 하면 처음에는 남편들이 ‘집안 살림도 부족한데 그렇게 일하고 네가 10원이라도 받나? 집안 살림 퍼가기만 하지’ 라면서 난리를 칩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면 그게 공덕이 된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수행, 보시, 봉사를 꼭 손해인 것처럼 이해하는 건 잘못된 것입니다.nbspnbsp스님이 이렇게 베푸는 게 스님한테도 손해가 아닙니다. 저는 다음 생까지 보고 있거든요. 제가 다음 생에는 인도에 태어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래서 저는 미리 인도 아이들한테 사탕 주는 걸로 최소한의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항상 사탕을 주면서 ‘이거 먹고 다음 한 생은 스님이 되어 부처님께 바쳐라’ 하고 있거든요.nbspnbspnbsp제가 일부러 인도 아이들에게 사탕을 준 것이 아니고 아이들이 먼저 사탕을 달라고 하니까 저는 ‘좋다. 너는 다음 한 생은 출가해서 수행해라. 알았지?’ 하면서 줍니다. 그렇게 하면 그 아이들한테도 좋은 거예요.nbspnbsp여러분들도 인생을 조금 더 길게 보고 사세요. 너무 눈앞에 보이는 즐거움과 이익만 보지 말고요. 인생을 조금 길게 보고 살면 마음의 기복이 적어집니다. ‘인생지사 새옹지마’라는 말을 들어봤지요? 사람들은 인생을 짧게 보고 ‘그건 불행이다’, ‘그건 행이다’ 하며 말이 많은데, 길게 보면 다 괜찮은 일입니다. 스님도 짧게 보면 매일 실패의 연속이지만 길게 보면 그 실패한 것이 다 저를 성공하는 안내하는 길이었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정진하시기 바랍니다. 법문으로 오늘 졸업선물을 대신합니다. 감사합니다.”nbsp스님의 격려 말씀에 대중들은 큰 박수를 보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졸업장 수여식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기쁜 마음으로 졸업장을 받아들자 대중들은 서로 축하의 박수를 크게 보내주었습니다.nbspnbspnbsp마지막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바른 가르침을 대중들을 안내해 준 스님께 스승의 은혜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 노래가 장엄하게 울려퍼지는 가운데 정토불교대학을 최고령으로 졸업하신 노보살님이 꽃다발을 스님에게 건넸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으로 감사히 꽃다발을 받았습니다.nbspnbspnbsp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르는 대중들의 눈시울은 점점 붉게 변하고, 몇몇 분들은 눈물을 참지 못하고 손수건을 적셨습니다. 스님과의 소중한 인연에 대해 감사해하는 마음의 표현이겠지요.nbspnbsp▲ 스승의 은혜 노래를 부록 있는 대중들nbsp졸업식을 모두 마친 후에는 스님을 가운데로 모시고 다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먼저 전체가 다함께 찍고, 수계자들만 따로 찍고, 경전반 수료생들만 따로 찍고, 마지막으로 개별적으로 스님과 일 대 일로 사진을 찍었습니다.nbspnbsp▲ 다함께 기념 촬영nbsp또 한국에서는 지부 별로 수십명이 한꺼번에 사진을 찍는 것이 전부인데, 여기는 인원이 작다보니 스님과 일 대 일로 사진을 찍는 호강을 누리기도 했습니다. nbspnbsp사홍서원을 끝으로 졸업식까지 모두 마치자 필리핀정토회 총무님이 집에서 케익을 직접 만들어 왔다며 촛불을 켰습니다. 대중들은 케익을 가운데에 놓고 다함께 졸업식 노래를 함께 불렀습니다.nbspnbsp“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물합니다 ♬nbspnbsp물려받은 책으로 공부 잘하며 우리도 언니 뒤를 따르렵니다 ♬”nbsp▲ 졸업을 축하하는 케익 컷팅 이벤트nbsp스님은 “이 노래는 진짜 오랜만에 불러본다”고 하면서 웃음을 보였습니다. 이렇게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졸업식을 무사히 마치고, 다함께 둘러 앉아 담소를 나누었습니다. nbspnbsp그런데 졸업생 중에는 한 번도 수업에 빠지지 않고 출석한 분이 두 분에게는 개근상이 수여되었습니다. 그런데 준비된 선물이 달랑 손수건 한 장 뿐이어서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그래서 졸업식을 마치고 나서 스님이 개인 돈으로 스님의 책을 1400페소를 주고 두 권 구입해서 개근상 수상자 두 분에게 선물했습니다. nbspnbsp▲ 스님이 직접 구입해서 선물한 개근상nbsp책 첫 페이지에 스님이 직접 ‘개근상’ 이라고 써주자 두 분은 “아주 특별한 선물이예요” 라고 하면서 너무나 기뻐했습니다. 저자가 자신의 책을 직접 구입해서 선물로 주었으니 참 특별한 선물이지요.nbspnbsp마닐라 정토법당을 나온 스님은 필리핀정토회 이원주 대표님 댁으로 가서 저녁 식사를 한 후 밤 8시가 되자 호주로 출발하기 위해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공항에서는 이번 민다나오 방문 일정과 즉문즉설 강연, 불교대학 졸업식까지 많은 분들이 여러 모로 고생이 많았던 것에 대해 이원주 대표님 이하 필리핀정토회 회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 후 서둘러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nbspnbsp밤 10시 비행기로 필리핀 마닐라 공항을 출발한 스님은 8시간을 비행하여 내일 아침 9시에 호주 시드니 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시드니에 도착해서는 곧바로 정토불교대학 수계식과 졸업식에 참석하고, 오후에는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 강연, 밤에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멜버른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
2016.3.4 (필리핀 3일째_저녁) 마닐라(Manila) 즉문즉설 강연
nbsp민다나오 가가얀데오로 공항에서 갑자기 비행기 출발이 지연되는 바람에 저녁 7시부터 예정된 마닐라 즉문즉설 강연이 위태롭게 되었습니다. nbspnbsp강연을 취소할 수는 없으니 급히 국적기인 필리핀 에어라인으로 비행기편을 변경하여 새로 티켓팅을 했습니다. 늦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강연 시간 전에 도착하기 위해 우선 스님과 이원주 필리핀JTS 대표님만 먼저 민다나오를 출발했습니다.nbspnbsp▲ 마닐라로 먼저 출발하는 스님과 이원주 대표님nbsp스님을 먼저 보내고 난 후 나머지 일행들은 오후 4시가 되어서야 마닐라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2시에 출발 예정이었으니 2시간이나 연발이 된 것입니다.nbspnbsp마닐라공항도 활주로가 하나 밖에 없는데다 도착하는 비행기들이 많아서 비행기는 관제탑의 명령을 기다리며 주위를 한참동안 돌았습니다. 저녁 6시에 무사히 마닐라 공항에 내리긴 했지만 공항에서 도심으로 들어가는 도로도 정체가 심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스님은 저녁 식사도 하지 못하고 겨우 강연 시간에 맞춰 도착했습니다. nbspnbsp강연은 마닐라nbsp도심에 위치한 마카티 스포츠클럽에서 필리핀정토회 주관으로 열렸습니다. 약 200여 명의 교민들이 자리를 가득 메운 가운데 스님 무대 위에 오르자 뜨거운 박수갈채로 환영을 해주었습니다.nbspnbsp▲ 강연장 뒤편에는 필리핀JTS의 민다나오 활동 모습이 사진으로 전시되어 있었습니다.nbspnbsp스님은 오늘 민다나오에서 마닐라로 오면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강연을 시작했습니다.nbspnbsp“저녁 못 드시고 오신 분들 있으시죠? 저도 그랬어요. 피장파장이예요. 민다나오에 갔다가 오늘 마닐라로 들어오는데 비행기가 연발을 해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왔는데도 공항에서 또 길이 막혀서 겨우 시간 맞춰 오느라고 저도 밥을 못 먹었습니다.nbspnbspnbsp우리는 몸의 건강을 위해서는 매일 밥을 먹어주는데, 마음의 건강을 위해서는 좋은 말씀을 잘 안 들어요. 밥은 오히려 너무 많이 먹어서 건강에 해롭다고 할 정도입니다. 그러니 오늘 저녁 한끼 정도는 안 드셔도 괜찮아요.nbsp외국인들은 종종 저한테 ‘한국은 살만한데 왜 한국 사람들의 행복도가 세계에서 최하위 수준입니까? 한국 사람들이 성격이 급해서 그럴까요? 욕심이 많아서 그럴까요?’ 라고 묻습니다. 왜 그럴까요? 외국인들이 한국을 방문해 보면 한국은 경제적으로도 제법 잘 사는 나라에 속한다고 평가가 되는데, 한국은 청소년 불행도 1위, 어린이 불만족도 1위, 자살률도 1위, 저출산율도 1위입니다. 자살률이 높다는 건 지금의 삶에 희망이 없다는 의미이고, 아이를 안 낳는다는 건 미래에도 희망이 없다는 의미거든요.nbspnbsp이런 한국병을 치유할 수 있는 약이 아직도 경제의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물론 그런 면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이 경제 때문에 불행도 1위라면 필리핀 사람들은 어떻겠어요? 물론 경제 발전도 필요합니다. 빈부격차를 줄이고 인권을 존중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정말 필요한 건 정신적인 건강인 행복입니다. 기독교식으로 말해서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 수 없고, 말씀으로도 산다’, 즉 정신적인 문제가 중요하다는 겁니다. 우리가 너무 물질에서만 행복을 찾기 때문에 불행한 거예요.nbspnbspnbsp그래서 오늘은 우리의 이런 번뇌, 즉 괴로움, 초조, 불안, 미움 등의 정신적인 아픔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해서 여러분과 함께 대화하고자 합니다.”nbspnbsp스님이 환한 웃음으로 말문을 열자 어색했던 분위기도 금새 따뜻하게 달구어졌습니다. 교민들은 스님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오늘을 손꼽아 기다렸다며 연이어 스님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약 2시간 30분 동안 10명이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nbspnbsp오늘은 그 중에서 두 번째로 질문한 대학생의 질문과 스님의 답변을 소개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고민이라며 스님에게 심각한 표정으로 질문을 했습니다.nbspnbspnbsp“저는 음악을 전공하고 싶은데, 아버지와 오빠는 위험성이 높다며 굉장히 반대합니다. 아버지가 지원을 안 해 주신다면 제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라도 포기하고 아버지 말을 따라야 할까요? 아니면 제가 가출을 해서라도 하고 싶은 걸 해야 할까요?”nbsp“가출해서 하고 싶은 걸 하면 돼요.”nbsp“그런가요?”nbsp“질문자는 솔직히 독립해서 혼자 살 자신이 없지요?”nbsp“네.”nbspnbspnbspnbsp“준비가 덜 됐다면 아버지한테 의지하고 살아야 되고, 의지하고 살려면 아버지 의견도 좀 존중하는 수밖에 없지요. 질문자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살려면 자립해야 합니다. 그러니 아버지가 질문자의 의견을 반대한다는 것 때문에 질문자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어요. 아버지는 자식이 음악을 하면 인생이 평탄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러는 거니까요. 그런데 질문자가 아버지 말을 안 들으면 지원을 끊을 수도 있겠지요. 그건 아버지의 권한이니까 그걸 가지고 아버지를 미워할 필요는 없어요.nbspnbsp그러니 질문자가 어떤 인생을 살 것인지는 이제 스스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부모는 자녀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지원해 줄 의무가 있지만 그 이상은 부모의 의무가 아니거든요. 그 이상은 부모와 자식이 성인 대 성인의 관계가 됩니다. 부모는 20살이 넘은 자녀를 지원해 주고 싶으면 지원해 주고, 안 해 주고 싶으면 안 해 줘도 돼요. 질문자도 부모 말을 듣고 싶으면 듣고, 안 듣고 싶으면 안 들어도 됩니다. 질문자가 선택할 문제예요.nbspnbspnbsp만약 질문자가 스님이 되겠다고 하면 부모가 반대하겠지요. 하지만 반대하는 부모를 원망할 이유는 없잖아요. 부모가 봤을 때 그 길은 너무 어려운 길이다 싶어서 반대 의견을 낸 것이니까요. 그러니 부모의 의견은 존중해야겠지만 그렇다고 내가 무조건 부모 말만 따른다면 나는 부모의 노예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nbsp“예, 그렇습니다.”nbsp“그러니까 질문자가 자신의 길을 가려면 부모의 지원을 안 받고 갈 수 있는 길로 가야 된다는 겁니다. 단, 지원 안 해 주는 부모를 원망하는 건 안 된다는 거예요. 부모한테 지원도 받고, 내가 살고 싶은 대로도 살겠다는 건 욕심이에요. 제가 스님도 하고, 결혼도 하고, 부자도 되고, 사람들한테 존경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어요? 그런 걸 욕심이라고 하는 겁니다.nbspnbsp그러니 질문자는 스스로 선택을 해야지요. 질문자가 ‘스님의 길을 가겠다’고 했을 때는 부모가 ‘너 내 죽는 꼴 보고 싶니?’ 라고 해도 질문자가 가고 싶은 길을 가려면 ‘그건 어머니의 인생이니까 알아서 하세요’라고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길을 가지, 안 그러면 어떻게 자기 길을 가겠어요?nbspnbspnbsp질문자가 스스로 선택한 길을 가는 게 불효는 아니라는 거예요. 20살이 넘으면 누구든 자기 인생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단, 반대하는 부모를 원망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부모는 부모의 의견을 말할 권리가 있으니까요. 부모가 질문자를 해치려고 그러는 게 아니고, 당신들 인생 경험에 비춰봤을 때 질문자가 가려는 길이 어렵다는 걸 아니까 걱정하는 거예요. 일반 학문을 전공해서 취직을 하면 삶이 무난하잖아요. 그런데 음악가가 되거나 스님이 되면 어쩌다 성공할 수도 있겠지만 대체로 기복이 심하잖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게 안전입니다. 자녀가 음악을 전공해서 성공하면 당연히 부모도 기쁘겠지만 성공 못할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그것보다는 위험부담이 없는 게 좋은 거예요. 부모는 아무리 자식이 나이 들어 쉰이 되고, 예순이 되어도 ‘길조심해라’, ‘차조심해라’ 하면서 자식의 안전을 걱정하는 겁니다. 그게 부모의 마음이에요.nbspnbsp그러나 우리들 인생에서 안전이 유일한 가치는 아니잖아요? 모험도 하고 실패도 해야 인생이 성장하지요. 이제 질문자는 20살이 됐으니까 부모님과 협상을 해야지요. 질문자가 독립을 하든지, 부모님의 지원을 받으려면 부모가 시키는 대로 일반 학교를 다니면서 질문자 나름대로 시간을 내어 음악 공부를 하든지, 아니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아버지를 설득해서 일정한 기간까지 지원을 받든지, 선택을 하세요. ‘무조건 내가 원하는 대로 해 달라’ 하는 건 어리광입니다. 질문자 스스로 해결해야 되는 겁니다.”nbsp“알겠습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nbsp스님의 명쾌한 답변에 질문한 학생은 큰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하고 자리에 앉았습니다. 청중들도 박수를 보내며 학생을 격려해 주었습니다.nbspnbspnbsp이어서 스님은 강연 말미에 다시 한번 질문한 학생을 언급하며 욕심을 내려놓은 것이 중요하다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nbspnbsp“어떤 학생이 ‘어떻게 하면 스님처럼 지혜를 가질 수 있습니까?’라고 질문하기에 제가 ‘고생을 많이 하면 된다. 한번 해 볼래?’ 그러니까 ‘아니오’ 하더라고요.nbspnbspnbsp고생을 많이 한다고 무조건 득이 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굶어보면 한 술의 밥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게 되고, 아프가니스탄 같은 데 가서 어려움 속에서 위험을 겪어보면 공항에서 쪽잠을 자도 그곳이 얼마나 편안한 곳인지를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질문자가 혼자 살아보면 부모의 따뜻한 손길이 얼마나 귀한 줄을 알게 될 거예요. 사람이 젊어서 고생을 좀 해 보면 세상이 고마운 줄 알게 됩니다. 질문자처럼 떼쓴다고 다 해결되는 그런 인생이란 없어요. 어릴 때는 떼쓰는 게 통할지 몰라도 커보면 세상이 그런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됩니다. 이 세상은 다 서로 주고받게 돼있거든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 공짜로 먹으려고 하니까 사는 게 힘든 거예요.nbspnbsp그렇다고 반드시 고생을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도 고행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셨잖아요. 그러니 고행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욕심을 내려놓는 게 중요합니다. 돈을 만지지 않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집착은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nbspnbsp오늘은 스님의 답변을 들으며 우리가 얼마나 자기 중심적이고 욕심이 많았는지 돌아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nbsp10명의 질문에 모두 답하고 나니 2시간 30분이 훌쩍 지나 있었습니다. 스님은 시계를 잠시 본 후 마지막으로 필리핀 교민들을 위해 어떤 마음으로 살면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격려 말씀을 해주면서 강연을 마쳤습니다.nbspnbspnbsp“첫째, 살아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행복할 수 있습니다. 행복하지 못한 건 누구 책임입니까?”nbsp“내 책임입니다.”nbspnbsp“예, 그러니 행복하게 사셔야 돼요. 자꾸 ‘누구 때문에’라는 조건을 붙이면 끝이 없습니다. 그건 ‘난 불행하고 싶다. 엄마 핑계, 남편 핑계, 세상 핑계 대면서 불행하게 살고 싶다’ 하는 뜻입니다. 불행하고 싶어서 그렇게 사는 분은 계속 그렇게 사세요.nbspnbspnbsp그러나 행복하게 살고 싶다면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밥 먹는 것만으로 행복하다. 스님은 결혼도 못 하고 애도 없는데, 우리는 결혼도 하고 애도 있으니까 행복하다. 스님은 늙었는데도 저렇게 웃으면 사는데, 나처럼 젊은 사람이 불행할 이유가 뭐가 있나?’ 이렇게 돌이키면서 행복하게 사셔야 합니다.nbspnbsp그리고 이왕 살 바에야 남한테 빚지고 사는 것보다는 돕고 사는 게 좋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게 예뻐 보이지 않을까요? 하나님이 예쁘게 볼 만한 일을 하는 게 천국으로 가는 지름길이잖아요. 천국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뭐라고 써놨는지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세요. ‘교회에 열심히 다녀라’ 하는 말은 없습니다. 마태복음 25장 31절을 보면 ‘너희는 내가 나그네 됐을 때 영접했느냐? 내가 목마를 때 마실 물을 줬느냐? 내가 배고플 때 먹을 음식을 줬느냐? 내가 헐벗었을 때 입을 걸 줬느냐? 내가 병들었을 때 약을 줬느냐? 내가 감옥에 갇혔을 때 나를 면회 왔느냐?’ 이렇게 딱 6가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주가 언제 그런 적이 있었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 곧 나에게 하지 않는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셨다잖아요.nbspnbsp무엇보다 첫 번째, 내가 기뻐야 돼요. 남을 위해서 희생하면 원망이 생깁니다. 두 번째, 남에게 조금 도움이 되면 좋습니다. 세 번째, 이 세상에는 구조적, 제도적 문제가 많잖아요. 계급차별이나 인종차별, 전쟁 등의 문제를 우리가 개선하면 개선하는 만큼 우리에게 좋습니다. 예를 들어 시리아가 긴 내전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데, 그 원인 중 하나가 900년 만에 찾아온 가뭄 때문이라고 합니다. 가뭄이 지난 30년 간 지속되면서 농민들이 농사를 다 파하고 도시로 몰려들어 빈민이 되었고, 거기에서 문제가 발생하면서 갈등이 지속되다가 정치 문제와 종교 문제로 비화되었다고 해요. 가뭄이 내전의 원인 중 하나라는 겁니다. 그런 것처럼 기후환경의 변화는 우리들에게 굉장히 새로운 위기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대량생산해서 대량소비하는 삶의 패턴을 바꿔야 합니다. nbspnbspnbsp또 지구에는 아직도 제 때 배우지 못하고, 간단한 질병도 치료받지 못하고, 식량이 없어서 굶어죽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 건 우리가 해결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꼭 내 나라, 내 종교, 내 아이가 아니라도 말이에요. 또 오랜 시간 인류는 사상, 이념, 종교가 다른 사람들끼리 갈등하고 심지어는 전쟁까지 해 왔으니까 이제는 서로를 좀 존중하면 좋지 않을까요?nbspnbsp남한과 북한도 서로 조금씩만 존중하면 좋을 텐데, 오히려 지금은 서로 보복하겠다고 날을 세우고 있습니다. 그건 증오심 때문입니다. 그런데 나와 다른 상대방을 증오하는 건 5,000년 전 사람들이 했던 일입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쓰여 있잖아요. 지금 북한과 남한도 서로에게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며 악을 쓰고 있는 형국입니다. 여기에 종교인까지 개입해서 부추기고 있어요. 우리의 문명 수준이 5,000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습니다. 인간의 감정적인 측면에서 이해는 됩니다. 그러나 그게 바람직한 건 아니에요. 그래 봤자 우리끼리 싸워서 서로 이 뽑고, 눈 파내는 거 아니겠어요? 시간이 흐른 후에 보면 다 바보 같은 짓이에요.nbspnbsp그러니 우리는 이 세상을 좀 더 평화롭게, 친환경적으로 만드는데 에너지를 좀 쏟아야 합니다. 필리핀에 와서 너무 돈만 벌려고 하지 말고요. 어려운 사람을 좀 도우세요.nbspnbspnbsp그리고 여기서 번 돈이 있다면 그 중에 10는 십일조 내듯이 이런 좋은 활동에 좀 써야 돼요. 그런 생각을 안 하니까 하나님이 복을 주려고 해도 줄 수가 없는 거예요. 주고 싶지가 않은 거예요. 그렇게 우리 삶의 모순들을 좀 바꿔가면서 살면 우리가 조금은 더 행복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 마음으로 함께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합니다.”nbsp너무 돈만 벌려고 하지 말고 세상을 평화롭고 친환경적으로 만다는데 에너지를 좀 쓰자는 말씀에 교민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박수로 화답했습니다.nbspnbsp특히 최근 남북의 대립을 보면서 우리의 문명 수준이 5천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말씀하신 부분은 큰 울림으로 남았습니다. 오늘 강연 제목이 ‘살맛나는 세상 만들기’였는데, 정말 그런 기운을 듬뿍 받을 수 있는 강연이었던 것 같습니다.nbspnbsp강연이 끝나자 필리핀정토회 회원들은 일사분란하게 흩어져서 집으로 향하는 교민들을 배웅했습니다. 한 팀은 모금함을 들고 JTS의 민다나오 구호활동 성금을 모았고, 한 팀은 스님의 책을 부지런히 판매했고, 한 팀은 질서정연하게 책 사인회가 열릴 수 있게 안내했습니다.nbspnbspnbsp스님은 줄을 선 교민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치며 사인을 해주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나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지 악수를 하며 반가움을 표하기도 했습니다.nbspnbsp▲ 책 사인회nbsp사인회를 마친 후 오늘 강연을 준비한 모든 봉사자들과 함께 무대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활짝 웃는 모습에 기쁨과 보람이 가득해 보였습니다.nbspnbspnbsp오늘 밤은 필리핀정토회 이원주 대표님 댁에서 잔 후 내일은 오후 1시부터 마닐라 정토법당에서 동남아시아 지역 정토불교대학 졸업생들을 위해 수계식 및 졸업식을 가질 예정입니다. 수계식 후에는 공항으로 이동해 밤 비행기를 타고 호주 시드니로 이동할 예정입니다.nbspnbsp ※ 2016년 법륜 스님의 정토불교대학이 신입생을 모집합니다.nbsp불교에 대해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배워보고 싶은 분들은 지금 신청하세요.nbspnbspnbspnbsp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