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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부 노원지회 이재희 님을 줌으로 만났습니다. 2015년 불교대학을 인연으로 상계지부 모둠장 소임을 맡고 있는 이재희 님이 편안하게 내어놓는 이야기에 단단함과 평온함을 느껴졌습니다. 인터뷰가 진행될수록 지금의 단아하고 편안한 모습이 경이롭고 놀라웠습니다. 엄청나다는 느낌에 어떻게 써야 될지 막막하기만 했던 이재희 님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공부를 잘했던 큰아들이 대학입시에 실패했습니다. 대학 학과 선택에 아들은 전문 상담이나 컨설팅을 받고 싶어 했습니다. 저는 학교 선생님과의 상담을 통해 소신 지원할 것을 조언했습니다. 스스로 알아서 잘하고 성적도 우수했기에 무난히 합격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습니다.
아들은 수능 성적이 모두 1등급이었습니다. 하지만 지원했던 모든 학과에서 떨어졌습니다. 가족 모두에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3차 지원마저 떨어진 아들이 받은 충격은 더 컸습니다. 1등급 학생들만으로 편성된 유명 재수 학원에 등록하고 치른 2월과 3월 모의평가에서 성적이 바닥을 쳤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아들은 아예 공부를 포기하겠다며 학원을 나와 버렸습니다. 남편은 모든 실패의 원인을 제 탓이라며 원망했고, 급기야 아들을 데리고 집을 나갔습니다. 이후 아들과 관련된 일에 저를 배제했고, 아들도 아빠와만 의논하고 제 말은 듣지 않았습니다.
힘든 시기에 방황하는 아들을 위해 어떤 도움도, 역할도 할 수 없는 스스로에게 회의가 들고 위축되었습니다. ‘나는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잘못했다면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무엇을 놓쳤는지…'수없이 제게 질문하고 답을 찾으려 애썼고, 찾은 답이 정답이 아닌 듯해서 또 묻고 답하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하는 시간을 살았습니다.
가출한 지 6개월, 남편과 아들은 귀가했습니다.

아들의 성향과 관심을 생각해 학과 선택에 대해 말했지만 아들은 제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아빠와 의논해서 대학을 진학한 아들은 1학기를 마친 후 다른 자격시험 공부를 하겠다며 자퇴를 결정했습니다. 남편은 전폭적인 지지와 지원을 해주었습니다. 아들을 그냥 바라볼 수밖에 없는 제 고민과 무력감은 깊어져 갔습니다.
집안 문제가 힘들수록 직장 내 사람들과의 관계도 소홀해지고 불편했습니다. 동료들의 끼리끼리 문화에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이전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습니다. 집에서 가까운 도선사라는 절 법당에서 불교대학과 경전 수업에 대한 정보를 얻었습니다. 희망 편지와 혜민스님 이야기가 카톡에 많이 올라오던 때였습니다. 불교에 대해 잘 몰랐지만 법륜스님이 있는 불교대학이 와닿았습니다. 2015년 가을, 불교대학에 입학했습니다. 아들 문제로 방황하는 마음을 바로잡고 혼란스러운 저의 정체성에 대한 해답을 찾고 싶었습니다.
스스로 시작하는 용기를 냈다는 것, 그 당시는 깨닫지 못했지만 지나고 보니 ‘참 내가 절박했구나’를 느낍니다.

나는 누구인가? 어찌 살아야 할까? 절박한 심정으로 불교대학에 들어왔지만 정작 답을 찾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실천적 불교 사상이나 부처님의 일생 등은 갈급한 제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습니다. 사실 수업도 재미없었습니다. 법륜스님의 불교대학은 다른 절의 불교대학과는 다를 거라는 기대도 실망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어느 날 명심문 구절을 읽는데 가슴이 크게 요동쳤습니다. 눈물도 나지 않고, ‘어, 뭐지? 이 구절을 들으려고 여기와 앉아 있나?’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습니다. 명심문을 외웠습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되어 행복하게 살겠습니다.’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말이었습니다. 되뇔수록 이 말에서 힘을 느꼈습니다. 제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 힘이 무엇인지 곱씹어 보았습니다. 그간은 손님처럼 슬렁슬렁 불교대학에 발만 살짝 담근 불량 학생이었는데 명심문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불교대학 담당 도반의 도움도 더해져 졸업을 했습니다. 이후 <깨달음의 장>에서 저의 다른 모습도 깊이 들여다보았습니다. 남편에게서 늘 듣던 말이었지만 귓등으로 흘려보냈던, ‘나’라는 견고한 틀을 가진 아주 고집 센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소신 있게 딱 필요한 말만 하는 ’ 멋있는 나‘를 내려놓았습니다.

경전대학 다니면서 수행과 봉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JTS 거리모금 활동과 캠페인에도 참석했습니다. 경전 담당 도반이 목탁 교육을 권해서 받았습니다. 이른 시간 법당에서 새벽 예불 집전을 시작으로 꾸준한 봉사와 수행의 길에 첫걸음을 내디뎠습니다.
경전반 담당 소임을 하던 2019년 9월, 아들이 교통사고로 크게 다쳤다는 119 대원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현실 같지 않았습니다. 병원에 도착하자 의사는 아들의 위태로운 상태를 설명했습니다. 차가 굴러서 머리를 심하게 다쳐 뇌가 부풀어 올라 수술이 시급하다고 했습니다. 수술해도 부풀어 오른 뇌가 정상으로 될지 의문이라는 말도 들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수술실로 들어가자 갑자기 남편이 제게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를 만나 하나도 되는 일이 없다고, 아이도 결국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심장을 할퀴고 찌르던 남편의 독설이 그 순간은 한 마디도 제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다만 아무것도 깔지 않은 수술실 앞 복도에서 수술이 끝날 때까지 그동안 제대로 하지 않았던 ‘절’을 했습니다. 7시간이면 끝난다던 수술이 9시간 30분이나 걸렸습니다. 병원 복도를 지나던 청소부 아주머니가 그럽니다. “아이 엄마 보니 아이 살겠어. 이렇게 엄마가 정성을 들이는데…." 어디서 그런 힘이 나왔는지 지금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제가 불교대학과 경전대학을 다니며 배운 것이었고,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절뿐임을 깨달았습니다. 새벽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습니다.

‘이것만이 나와 아들이 살 수 있는 길’이라는 절박함으로 기도했습니다. 기도밖에는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던 그 순간, 나를 내려놓음이 ‘수행’이라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깨달았습니다.
긴 수술에서 깨어난 아들은 초등학생 수준의 지능에 감정 기복이 심했습니다. 아들 옆에서 3년의 병원 생활 동안 절을 통한 수행을 확실히 배웠습니다.
저는 아무리 힘들어도 힘듦이나 고민을 잘 표현하지 못합니다. 엄마를 돕기 위해 저를 희생한 것이 습관처럼 굳었습니다. 남편의 병으로 인해 집안 경제를 책임지며 종부로서의 버거운 삶을 살아내야 했던 엄마, 장녀인 저는 엄마의 삶을 나누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파서겠지만 괴팍한 성질로 유독 제게 인색하고 화풀이가 심했던 아버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생계와 학업을 병행하며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던 대학 시절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는 질곡의 삶에서 저는 도망치듯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보수적인 남편은 아버지와 닮아 있었습니다.

아들이 병원에서 생사기로에 있는 동안, 제 업식과 저와 아들의 인연과보에 대해 깊이 생각했습니다.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나 죽을 만큼 고통스러웠습니다. 제가 먼저 살아야 했습니다.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아들을 두고 4박 5일 명상 수련을 다녀왔습니다. 아들을 떠올릴 때마다 너무 힘들어 오로지 호흡에만 집중했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정리되면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습니다.
낮에는 직장에서 밤에는 병원에서 아들을 돌보며 수행과 봉사를 놓지 않았습니다. 잠이 부족하고 아무리 피곤해도 어려움을 헤쳐갈 힘을 얻기에 어느 것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아들이 병원에 있는 동안 우리 가족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꾸준한 치료와 재활로 아들은 2022년에 퇴원했습니다.
요즘 아들은 가끔 밖으로 외출을 합니다. 카페에 가서 자기가 원하는 음료를 주문하고 혼자 시간을 보냅니다. 조금씩 ‘우리’는 잘해 나가고 있습니다.
2019년 아들이 사고로 입원한 때, 저는 경전반 담당이었습니다. 학생들이 졸업을 앞두고 있었기에 마무리 업무로 바빴습니다. 남편은 제가 직장을 그만두고 오로지 아들에게만 집중해 주길 원했습니다. 그때 코로나가 유행했고, 모든 수업과 정토회 업무가 온라인으로 전환되기 시작했습니다. 제 사정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아이 옆에서 법회를 듣고 소임을 계속했습니다. 끊어질 뻔한 정토회와의 인연이 아이러니하게도 병상에 누워있는 아들과 코로나로 인해 더 깊은 인연으로 나아가게 되었습니다.

세상일이 모두 나쁘란 법은 없나 봅니다. 새벽마다 병원 휴게실에 방석을 펴고 정진할 때 눈물이 났습니다. 토요일마다 새벽기도 집전을 하러 택시를 타고 법당에 가서 불을 밝혔습니다. 아무도 없는 법당에서 목탁을 치면 눈물이 절로 흘렀습니다.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 순간의 눈물은 단순한 눈물이 아닌 저를 찾는 긴 과정이었습니다.
2019년 9차 만일 결사 회향 일자가 다가오던 무렵입니다. 아이가 다친 사실을 말하지 않아 도반들은 제 사정을 몰랐습니다. 회향 공연의 꼭지 소임이 주어졌습니다. 준비하다 보니 단순한 소임이 아니었습니다. 공연이 목적이었기에 지회 여러 법당에서 공연할 사람을 모집하고, 큐시트를 만들어 검수받고, 동작을 짜고 가르치며, 연습과 리허설에, 음악과 복장 준비 등의 복잡한 과정은, 도반들이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청년부에 플래시몹을 양보하라기에 제 아이디어를 고집하면서 저의 민낯을 마주했습니다. 소임을 받고 불만스러운 일도 있는 그대로 지켜보면서 저를 다스리는 지혜를 체득했습니다. 체득된다는 게 이런 것인 줄 예전에는 몰랐습니다. 저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고 ‘모자이크 붓다’의 의미를 되새기는 소중한 소임이었습니다.

아이는 중환자실에 누워있는데 음악을 듣고 춤추며 즐기는 공연을 한다는 것이 한편 미안하고 불편했습니다. 소임과 엄마로서의 일 사이에서 갈등을 겪으며 병실을 지켜준 남편에 대해 이전에 가졌던 서운함과 미운 마음이 많이 없어졌습니다.
코로나 중에 모둠장 소임을 받았습니다. 제게는 일과 수행의 통일이었습니다. 사고로 입원한 아들이 깨어나서 걸음마를 배우듯 새 삶을 살아나가는 것을 지켜보려면, 저도 뭔가를 해야 했습니다. 아들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힘, 그것은 수행과 소임을 통한 봉사에서 우러났습니다.
아들이 수술하던 9시간 동안 그간 게을리했던 절을 하며 간절했던 저를 떠올립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위급한 상황에서도 절을 하면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괴로운 마음도 덜 올라왔고 수행만이 저를 평안하게 함을 깨달았습니다. 순간에 깨어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감정에 이젠 휘둘리지 않습니다.

소임에 적극적으로 즐겁게 임하면 아들과 남편을 대할 때 너그럽게 수용하는 힘이 생깁니다. 사사건건 아집 강한 저를 내세워 상대를 괴롭게 할 것임을 알기에 늘 마음 깊이 명심문을 새겼습니다. 제 중심에는 제가 있습니다. 제가 행복하지 않고 힘들면, 선하고 좋은 에너지가 나오지 않습니다.
아들은 이제 조금씩 회복되고 있지만 예전의 건강한 아들이 아님을 받아들입니다. 평생 함께 가야 하는 책임감을 느낄 때면 이기적인 제 심성이 펄떡거립니다. 괴로움을 알아채고, 스님 법문을 듣고 나누기를 합니다. 거리 캠페인에 나가서 좋은 에너지와 힘을 듬뿍 받고 귀가합니다. 제가 받은 에너지를 저를 맞아주는 아들과 나눕니다. 앞으로도 일과 수행의 통일로 얻은 에너지를 아들뿐 아니라 필요한 누구에게든 나누는 삶을 살겠습니다.
모두 법 만난 덕분입니다.
아주 긴 시간 동안 들었음에도 제가 부족해 살아온 삶의 궤적과 우러나는 진심을 다 담아낼 수 없어 안타깝습니다. 이번 이재희 님의 수행담에는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 초점을 맞추어 담았습니다. 미처 담지 못한 감동은 언젠가 다른 리포터의 다른 시선으로 다시 전해지길 기대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재희 님, 쉽지 않았을 묵묵한 수행담 편안하게 내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글_이혜정 희망리포터(부산울산지부 금정지회)
편집_이주현(부산울산지부 동래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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