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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를 위해 법당에 도착하니 컴퓨터 사용법을 가르치는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온라인 114 소임을 맡아 도반들이 온라인 법회를 원활하게 하도록 돕는 김태희 님의 목소리였습니다. 서산 법당의 재간둥이, 김태희 님의 짧지만 치열한 인생과 수행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아버지는 제가 초등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허리디스크가 심해 집에만 있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대신해 줄곧 가장 역할을 했습니다. 어린 마음에 집에만 계시는 아버지가 창피했지만, 힘든 부모님을 돕고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던 저는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머리도 명석했던 터라 판사나 의사를 희망할 정도로 우등생이었고, 부모님이 걱정하지 않아도 모든 일을 스스로 알아서 하는 착실한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저 자신에 대한 기대가 커지면서 저는 잘 자랐습니다.
그러나,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에 겪은 사건은 제 인생에 대한 기대를 송두리째 앗아갔습니다. 학원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중, 길을 알려달라며 다가온 낯선 아저씨를 따라갔습니다. 그 아저씨는 흉기로 저를 위협하며 제 몸을 요구했습니다. 그때 오직 목숨을 지키는 것 말고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게 저를 범한 낯선 아저씨는 황급히 사라졌고, 처참하게 집으로 돌아온 저를 처음 맞아준 사람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저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저를 꼭 안아줬고, 함께 한참을 울었습니다. 조선 시대 사람만큼 생각이 보수적인 어머니는 ”너같이 똑똑한 애가 왜 따라갔어. 바보같이!”라고 말하면서, 이 사건을 쉬쉬하며 숨기길 원했습니다. 상담이나 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바보같이’라는 말은 두고두고 제 가슴에 남았고, 그때부터 어머니를 미워하기 시작했습니다.
경찰서와 산부인과를 다녀왔고 다음 날이 개학이어서 학교에 갔습니다. 너무 어렸던 저는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평소처럼 도서관에 다니며 열심히 공부했고, 성적도 전혀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아무 문제 없이 학교생활을 잘해나갔기에 가족들뿐만 아니라 저 자신도 어떤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그날의 사건은 아버지, 어머니, 저와 친밀했던 큰어머니 외에 다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저의 몸과 기억 속으로 가라앉았습니다.
하지만, 고등학교에 올라가면서 사춘기가 시작된 동시에 그날의 기억이 저를 괴롭히기 시작했습니다. 무엇을 해도 집중하지 못했고, 무기력하고 우울한 일상과 종일 잠만 자는 날들이 이어졌습니다. 학교생활에 전혀 적응하지 못하고, 급기야 학교에서 쓰러져 응급실에 실려 가는 일도 생겼습니다. 성적도 아주 많이 떨어져 저 자신이 창피하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증상이 그 사건 때문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17살 가을에 심한 두통에 며칠씩 잠을 자지 못해서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그 사건을 꺼내놓지 못해서 단순 학교생활 부적응 학생으로 오인되었고, 고3이 끝날 때까지 약을 먹으며 겨우 고등학교 생활을 버텼습니다. 이번 생은 망했다는 생각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했지만, 사실 죽을 용기도 없었습니다. 또한, 감당하기 힘든 사건의 충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나타나는 해리 현상이 계속됐습니다. 대학에 입학했지만, 증상이 다시 생겨서 휴학하면서 1년을 버티다가 대학 생활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때부터 저의 방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한창 꽃다운 나이, 21살이 되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던 것과 다르게, 저는 잘나가는 친구들을 부러워하며 대인기피증과 조울증에 시달렸습니다. 가족들과 함께 있는 것마저 싫고 그저 조용한 곳에서 혼자 있고 싶었고, 이러다가 서른 전에 죽을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바랑 하나 매고 일주문으로 들어가는 한 스님의 사진이 뇌리에 꽂혀서, 그때부터 제 인생의 스승을 찾고자 이 절 저 절로 헤매고 다녔습니다. 유명하다는 사찰과 스님을 찾아서 6개월은 절에서 머물렀고 나머지 6개월은 집에서 지내는 방랑 생활을 했습니다. 절의 공양간1에서 일하면서 스님들이 돈과 명예를 두고 싸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머리 깎고 절에 들어가면 뭔가 다를 줄 알았는데 결국 사람 사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후, 22살에 우연히 찾아간 지인의 집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 법문을 불교방송으로 보았습니다. 법륜스님이야말로 진짜 스님이라는 지인의 말에 관심이 생겼고, 집으로 돌아와 정토회 홈페이지를 찾아봤습니다. 백일 출가 소개 영상에서 ‘대자유인’이라는 단어가 깊이 와닿았습니다. 전국 어느 절에서도 들어보지 못했던 ‘크게 자유로워진다.’라는 말에 백일 출가를 결심했고, 2010년 〈깨달음의 장2〉에 다녀온 후 2011년, 23살에 백일 출가를 했습니다.
백일 출가 만 배에 성공해서 뿌듯하고 무언가 할 수 있을 듯한 마음이 들었고, 매일 500배씩 하고 쉼 없이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다른 생각은 할 겨를이 없어 좋았습니다. 하지만, 혼자 있기를 좋아하는 저는 백일 출가의 단체생활 속에서 인간관계를 맺기가 어려웠고, 특히 나누기 장이 힘들었습니다.
그때도 저는 정작 중요한 그 사건 이야기를 하지 못했습니다. 저를 어딘가에 꼭꼭 숨기고 차마 꺼내 보일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비슷한 경험을 한 도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에게만 있는 일이 아니구나. 창피할 일이 아니구나.’라고 깨달았고 일상생활을 해나갈 힘을 얻었습니다. 백일 출가 이후 인도 성지순례에 갈 여비를 벌기 위해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일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우울하고 무기력한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급기야 일하다가 갑자기 말을 못 하게 되는 상황이 생겨 하던 일을 그만두고 병원에 다니며 현재까지 5, 6년 동안 약을 먹었습니다. 2015년부터 2019년까지 법륜스님의 희망 세상 만들기 강연과 대전 법당개원 법회 등 스님의 강의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 당시 제가 왜 그렇게 방황하는지 모르던 동생의 원망을 들으니 저 스스로 우뚝 서서 가족들에게 당당하고 싶었습니다. 그만뒀던 대학에 다시 다니고, 일도 두 개씩 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 증상은 여전히 나타났습니다.
2018년 겨울,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 우연히 찾아간 병원에서 저에게 잘 맞고 신뢰할 수 있는 의사를 만났습니다. 벼랑 끝에 선 상태에서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저에 관한 모든 것을 털어놓았습니다. ‘갈 데까지 갔다. 더는 버틸 수 없다.’라는 생각에 ‘내가 괜찮지 않다. 내가 고장 났다.’라는 것을 이해받고 싶었습니다. 병원에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는 진단을 받고 곧바로 치료를 시작했고, 그제야 불을 끄고 똑바로 누워서 잘 수 있었습니다.
아픈 저를 인정하고 나니 감정이 다양해지는 동시에 부모님에 대한 원망이 올라왔습니다. 백일 출가 전 방황하던 시기에, 평소 화가 많고 욕을 많이 하던 아버지가 "너는 틀렸어."라며 함께 한 욕이 제 가슴에 계속 남아있었습니다. 또한, 제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저의 아픔을 외면하고 금기시하는 어머니의 태도에 매우 화가 났습니다. 어느 날 아침에 왜 그 사건을 제대로 해결하지 않았냐고 부모님에게 원망을 쏟아냈고, 그 후 불편한 마음에 한동안 집에 가지 않았습니다.
2019년 3월, 새벽에 기도하고 설거지하는데, 불현듯 어떤 것이 휙 지나가면서 법륜스님 얼굴이 선명하게 뇌리에 떠올랐습니다. ‘아, 내가 10년 전에 정토회에서 인생에 대한 답을 찾았는데 잊고 있었구나. 발심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세상살이에 찌들어 수행을 놓고 있었구나!’라는 생각이 들면서 명치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느낌이었습니다.
바로 경전반에 입학해 금강경3을 공부하고 9-9차 천일 결사에 입재해 수행하면서, 많은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제 아픔을 외면한다고 생각했는데, 제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던 그 당시에 어머니가 저를 억지로 치료받게 했다면 과연 제가 제대로 치료받을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또한, 그렇게 힘든 상황 속에서도 가족을 저버리지 않고 꿋꿋이 버텨준 어머니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도 심각한 마음의 병을 앓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더는 지금처럼 살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매일 300배 정진을 하며 마음을 다잡은 후에, 독립이라는 이유로 한참 동안 가지 않았던 부모님을 찾아가 죄송하다고 말했습니다. 지난여름 아버지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저에게 꼭 필요한 사람임을 알려주고 싶어서 두 달 동안 아버지에게 운전 연수를 받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 선물 같은 시간을 보내며 제 마음도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백일 출가 때도 온 마음으로 하지 못했던 부모님에 대한 참회기도, 감사기도를 지금은 자연스럽게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정 형편은 더 나빠지고 있지만, 그 상황을 편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현실을 피하고 의지하는 마음으로 절로 가출하는 것이 아니라, 정토회에서 뿌리를 내리자는 마음으로 법당 활동을 많이 해보려 합니다. 얼마 전 “부모님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하는데 저 자신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저는 부모님 마음에 들지 않는 딸이라고 자책하며 그저 빨리 괜찮아지기를 바랐습니다. 마치 산을 오를 때 혼자서 케이블카를 타고 빨리 정상에 가고 싶어서, 다른 사람과 함께 경치를 둘러보고 맛있는 음식을 나눌 생각조차 못하는 사람 같았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여기저기 주변을 둘러보며 천천히 산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직도 약을 먹으며 치료를 계속하고 있지만, 머지않아 혼자서도 괜찮겠다는 자신이 생깁니다. 앞으로도 계속 파도를 만나겠지만 제 파도타기 실력도 꽤 괜찮아졌습니다. 한참을 목적지 없이 달렸던 기차가 천천히 종착역에 다가가고 있습니다. 길었던 여행을 끝내고 새로운 세상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내 이야기를 꺼내놓는 것을 많이 고민했지만, 이제는 내가 상처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털어버리고 싶어요.”라고 말하는 김태희 님을 보며, “고생 참 많았어요. 장해요!”하면서 꼭 안아주고 싶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를 나누어 줘서 말할 수 없이 고맙고, 부처님 법을 만나 더욱 행복해질 김태희 님의 앞날을 응원합니다.
글_허지혜_희망리포터(천안정토회_서산법당)
편집_성지연(서초정토회_서초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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