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토행자의 하루

뉴욕
해외 통일의병의 깃발, 최경숙 미주 JTS 상임이사

통일에 대한 염원이 어느 때보다 가득한 지금, 우리 정토행자들은 과연 어떤 활동을 할 수 있을까요? 재외동포로서 북한동포돕기운동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선배 활동가를 만나, 당시의 활동담을 들어보았습니다!


[뉴욕정토회 뉴욕법당]

해외 통일의병의 깃발, 최경숙 미주 JTS 상임이사

‘정토행자의 하루’를 통해 본 각 지역 정토법당들은 지금 어느 때보다 더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있는 듯합니다. 8-5차 천일결사 실천과제를 수행하느라 통일에 대한 열기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해외 법당도 예외일 수는 없습니다. 주말을 보내고 난 해외모둠장 밴드에는 기획법회, 역사법문, ‘새로운 100년’ 밑줄나누기를 한 세계 각 법당의 후기가 앞다투어 올라옵니다. 

그런데 뉴욕법당의 ‘새로운 100년’ 밑줄나누기 후기 중 한 단락이 제 눈길을 끌었습니다. “평화재단에 후원하고 싶은 마음 오래전부터 갖고 있었습니다. 이번 기회에 작은 정성 보태겠습니다.” 알아보니 미주 JTS 상임이사인 최경숙 보살님이 그 주인공. ‘그렇지! 통일을 이야기하며 그녀를 말하지 않을 수 없지…’ 하는 생각이 반짝 스쳤습니다. 전화를 먼저 하니 보살님은 보시하기로 한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는 씽크탱크(Think Tank)로서의 평화재단 활동에 힘이 되고 후원하고 싶은 마음을 늘 가지고 있었다.”며 흔쾌히 인터뷰에 응해주셨습니다.  

 


▲ 2014년 10월 세계100강 롱아일랜드 강연장에서 JTS 홍보 중인 최경숙 보살님

 

정일사 수련, 실천과제 수행, 9월에 있을 명상수련과 행자대회 준비, 도반들의 사건 사고 뒷바라지로 뉴욕정토회가 숨 가쁘게 분주한 시기, 보살님과 뉴욕법당 사무실 한쪽에서 인터뷰하였습니다. 빠르게 진행된 대담이 2시간을 훌쩍 넘겼습니다. 그러나 보살님의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다 풀어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었습니다. 2박 3일을 해도 모자랄 것 같은 인터뷰를 일정에 쫓겨 서둘러 마무리하며, 해외정토행자운동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보살님을 통해 재외동포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이야기만이라도 제대로 전달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제2차 만일결사를 앞두고 해외정토행자들의 역할을 재조명해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스님이 만난 첫 해외정토행자
최경숙 보살님이 법륜스님을 처음 만난 것은 3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0대 청년의 스님께서 뉴욕 원각사에서 3개월 동안 계실 때 진행하신 ‘부처님의 일생’ 강의를 통해서였습니다. 이때가 1981년. 불교에 대한 개혁 의지로 불타던 스님께서 당시 LA에 계시던 서암스님을 만나 “여보게, 어떤 한 사람이 논두렁 아래 조용히 앉아, 그 마음을 스스로 청정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요, 그곳이 절이지.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불교라네.”라는 말씀을 듣고 삶과 불교운동의 큰 전환점을 맞이했던 바로 그 해입니다.

그리고 10년 뒤인 1991년 스님께서는 한 보따리의 책을 들고 다시 뉴욕에 나타나셨습니다. 보스턴대학 주최의 ‘불교와 환경’에 관한 세미나 참석차 방미하셨는데, 이때 뉴욕에서 제1차 깨달음의 장 진행과 플러싱 전등사의 반야심경 강의 후 이듬해부터 미국 순회법회를 시작하셨습니다. 보살님은 스님을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81년 스님을 처음 뵙고 그때 이미 ‘바른불교, 쉬운불교, 생활불교’에 대해 대담을 하며 뜻이 통한다는 생각을 했고, 이 법을 배워서 미 서부와 중부의 로키산맥, 동부의 애팔래치아산맥에 하나씩 미주지역에 최소한 3개의 수행도량을 세우고 싶다는 원을 가지기도 했어요. 그런데 10년 만에 스님이 다시 오시면서 책을 한 보따리 들고 오셨어요. ‘우물에서 나간 개구리’, ‘알기 쉬운 반야심경’, ‘위대한 부처님의 일생’, ‘실천적 불교사상’, 월간정토 합본 등 그때 생각에 1천 불은 족히 되겠다 싶은 분량의 책이었지요. 10년 사이 이렇게 많은 책을 쓰셨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또 ‘방생법회가 생태계를 교란시켜 환경에 해가 된다’는 등 스님의 환경 관련 말씀을 듣고 우리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를 미리 꿰고 계신 스님의 통찰력에 남다른 존경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 평생도반 이연순 보살님(왼쪽)과 함께 

이 시기 최경숙 보살님과 함께 박지나, 이연순 등 깨달음의 장에 참석하고 순회법회를 주도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1994년 4월에는 해외정토행자운동의 출발점이 된 뉴욕정토회가, 7월에는 미주 JTS가 설립되었습니다. 박지나 현 JTS 대표는 1대 총무로, 최경숙 보살님은 2대 총무로 뉴욕정토회의 기틀을 잡았으며, 특히 4대 총무와 대표를 역임한 이연순 보살님은 최경숙 보살님이 7년 동안 해마다 2차례 이상 한 번에 2주간 북한을 방문할 때마다 최 보살님의 개인 사업체를 전적으로 돌보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하며 현재까지도 뉴욕정토회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후배 도반들을 챙기고 있습니다.

자생적 통일의병
보살님이 북한을 처음 방문했던 1997년, 북한은 김일성 주석 사후 4년여 만에 권력승계 과정을 거친 김정일 위원장이 당 총비서로 취임하였습니다. 1991년 말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을 이끌던 고르바초프의 몰락으로 소련연방이 해체되고 사회주의권이 붕괴한 이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어온 북한이 북핵 문제와 미사일 문제로 미국, 남한 등과 심각한 갈등관계에 놓이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전대미문의 식량난을 겪는 등 총체적인 위기에 처해 있던 시기였습니다. 클린턴 정부 출범 2기를 맞은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의 지위를 존속하기 위해 유럽과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전략구도를 세우며, 비록 공화당과 남한 김영삼 정부의 비협조로 빠른 효과를 볼 수는 없었지만 북한의 개방을 유도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습니다.

1993년 미국의 클린턴 정부 출범 초기, 최경숙 보살님은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당시 북핵문제가 국제사회의 핵으로 대두되며 한반도에 긴장감이 고조되던 시기에 한민족으로서 위기감을 느낀 보살님이 자신이 운영하던 사업체를 찾은 한 미국인 친구에게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하였고, 연설문 작성 전문가였던 그 친구의 도움으로 백악관에 1장 반 분량의 편지를 보낸 것입니다. ‘지금 북한은 오랜 봉쇄정책으로 최악의 상황에 처했으니 북한을 더 이상 압박하지 말고 유화정책을 취해 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었는데, 백악관으로부터 답장을 받았습니다. ‘민간인이 이런 말을 해주어야 한다’는 요지의 감사편지였습니다. 

이때 보살님은 정말 이런 제안은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보장되는 미국에서 한국계 민간인이 할 수 있는 것이지, 권력구조 속에 있는 대한민국의 관료나 대사가 하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94년 4월, 북한 김일성 주석이 CNN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미국에 가서 낚시도 하고 친구들과 사귀고 싶다.”는 말을 했을 때, 또 그해 6월 15일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여 김일성 주석과의 회담에서 “미국 정부가 유엔에서 추진하고 있는 대북 제재를 중단한다면 북한도 핵개발을 동결하겠다는 제의를 받았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보살님은 벅찬 감동을 맛보았습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달 7월 8일 새벽 2시 김일성 주석은 7월 25일로 합의되었던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보름여 앞두고 46년의 통치를 끝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 라진 7 남산유치원 방문(출처: JTS), 뒷줄 가운데 어딜 가나 눈에 띄는 훤칠한 키의 최경숙 보살님  

“최경숙 씨 북한에 한 번 갔다 와”
2년에 걸친 대홍수가 경제위기에 시달리던 북한을 초토화한 1996년 12월에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가 설립되었습니다. 96년 해외순회법회를 마치고, 뉴욕의 활동가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스님은 북한의 홍수와 기아사태를 안타까워하며 당시의 시국 상황에 대해 많은 말씀을 하셨다고 합니다.

최경숙 보살님도 당시 50만 명이 아사한 것으로 알려진 북한의 참상은 현대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여, 아이들 생일잔치를 하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고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을 제외한 돈을 모두 모아 기부하는 데 집중했다고 합니다. 한국의 북한동포돕기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미주지역은 한국의 운동과 궤를 같이하는 동시에 재외동포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들을 추진하며 본국의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1997년 3월엔 뉴욕 플러싱 쉐라톤호텔에서 ‘우리민족서로돕기 불교운동본부’ 주관, 미주 JTS 주최로 법륜스님을 주요 강사로 모시고 북한의 식량 현황과 민간단체의 지원방안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습니다. 그동안엔 기존 단체를 통해 전달하던 모금액도 이때부터 미주 JTS가 직접 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8월에는 뉴욕의 단체들과 연합하여 뉴욕 한인 6천2백58명으로부터 서명받은 민족화해를 위한 북한동포돕기 1백만인 서명운동의 서명지와 ‘김영삼 대통령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뉴욕총영사관에 전달하여, 정부가 특별기금으로 북한에 1백만 톤의 식량과 의약품을 지원할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이즈음 보살님은 스님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습니다. “최경숙 씨 북한에 한 번 갔다 와…” 라진선봉지구의 어린이 식량 지원을 위해 미 시민권자의 방북을 허용하는 초청장을 확보하시고 최경숙 보살님을 적임자로 선정하신 것입니다. 라진선봉지구는 1991년 북한이 체제유지와 심각한 경제난 해소를 위해 개방한 경제무역 특구이며, 그동안 적집자사, 유진벨 재단 등 기존단체를 통하던 JTS의 북한지원활동을 직접 하기로 하신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라진선봉시 행정경제위원회의 고위층과 연고가 있는 조선족 동포의 역할이 컸습니다.


▲ 라진 탁아소 영양식 전달(출처: JTS) 

1997년 11월 보살님은 심양과 연길을 거쳐 두만강을 넘어 라진에 도착하였습니다. 와이셔츠, 비누, 아스피린 등 생필품을 가득 넣은 2개의 이민 가방을 들고 현재 평화재단 평화운동 팀장인 이승룡 법우님이 연길까지 동행했는데, 비행기를 예약했음에도 제때 이용할 수 없는 등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97년 방북을 시작으로 국제정세가 경색되고 개인적인 문제가 겹쳤던 2003년까지 7년 동안 보살님은 총 15번 북한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보살님이 북한을 드나들 때 초등학생이어서 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던 딸, 안재연 법우는 학교 수필 시간에 북한의 참상을 전하고, 윤회를 믿는다면 그들이 전생에 당신의 엄마 아버지일 수도 있다며 북한을 포함한 불행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쓰기도 해서 보살님의 마음을 훈훈하게 했습니다. 안재연 학생은 성인이 된 후 백일출가를 다녀왔습니다.


▲ 2012년 뉴욕 희망콘서트 강연장에서 딸, 안재연 법우와 함께

97년의 첫 방문에서 라선지구에 어린이 영양식 공장 설립에 관해 합의하여, JTS가 공장 시설비 15만 달러와 매월 3만 달러의 원료비를 부담하고 북한 측이 건평 2백 평의 공장건물과 노동자 20명을 지원하기로 하였습니다. JTS는 한국과 전 세계 개인 및 단체로부터 받은 후원금으로 매달 3만 달러어치의 식량 30여 톤을 지원하였는데 중국에서 쌀과 옥수수, 남한에서는 설탕과 분유 등을 사서 보냈습니다. 구호물품은 JTS에 직원으로 고용된 조선족과 북한 주민들이 직접 라선지구 내 탁아 유치원 1백 6개, 7세 이하 아동 1만1천2백37명에게 보급하였으며, 보살님은 중국의 물품 구매와 배급 상황을 실사하고 보고하였습니다.  

미주 JTS의 영원한 현역
2004년에는 ‘북한은 내 나라 우리가 건설하자!’ 캠페인을 시작하였습니다. 보살님은 미주지역 언론사들의 후원하에 라선시 개발비용 20억 원 중 5억 원 모으기 운동, 호미 보내기 운동을 추진하며, 뉴욕정토회 회원들과 함께 각 한인 단체 및 업체에 전화(Sales Call)하고 뉴욕지역 최대행사인 한인청과상조회의 추석맞이대행사에서 홍보활동을 하는 등 미주지역 JTS 활동을 이끌어왔습니다. 

미주 JTS의 활동은 북한동포돕기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인도의 수자타 아카데미와 지바카 병원 설립을 주도하고, 깨끗한 물 제공을 위해 펌프 설치, 파키스탄 케시미어 지역 지진피해 구조, 아프카니스탄의 텐트학교와 재봉틀 지원 등 국제 문맹퇴치 및 구호활동을 활발하게 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2005년 미국 역사상 가장 큰 참사였던 카트리나 허리케인 피해자를 위한 모금활동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각종 구호활동 모금현장이나 스님의 해외순회법회 강연장에서는 JTS 띠를 두른 환한 미소의 보살님을 언제나 볼 수 있었습니다.

8-5차 실천과제인 ‘새로운 100년’ 밑줄나누기에 참석하여, 통일에 대한 인식을 고취하고 나누기를 하는 것만으로도 후배들이 눈물 나게 고맙다는 보살님. 보살님의 마음에는 영양실조, 생필품, 자유… 이런 단어들이 도장 찍힌 것 같다고 합니다. 평화재단 설립 초기 한국을 방문했을 때, 충분히 보시하지 못하고 온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는 보살님은 미주 JTS의 산증인으로 한국의 상황이 어려울 때 재외동포로서 견인차 역할을 해온 해외 통일의병의 깃발입니다. 감사합니다! 최경숙 보살님.  Posted by 희망리포터 백은주  

 

전체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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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잘 보고 갑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조국의 미래는 어둡지 않으며,
미국 동포사회도 통일에 큰 이바지를 하게 되었습니다.
수고 많으셨어요.

2018-11-21 00:42:17

정명

“최경숙 씨 북한에 한 번 갔다 와…” 올해 초 미주 어느지역에서 잠시 뵈었던 최경숙 보살님~~ 존경합니다. 감사합니다.~~^^

2018-11-19 20:53:43

이영민

감사합니다. 보살님의 인생에 큰 감명을 받습니다.

2018-11-19 18:46: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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