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의하루

2020.6.8 농사일, 불교대학 온라인 수업, 두북특위회의
“마음이 답답해지는 이유”

안녕하세요. 오늘 스님은 농사일을 하고 정토불교대학 수업을 생방송으로 한 후 두북 특별위원회 회의에 참여했습니다.

요즘 스님은 아침 울력 시간마다 농사일을 하는 행자님들이 처리하기 어려운 일들을 하나씩 해결해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텃밭에 물 주는 행자의 어려움을 해결해주었습니다. 텃밭에 물을 줄 때마다 펌프를 연결하는 과정이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었습니다.

스님은 플러그만 꽂으면 물이 바로 나오도록 설치해주었습니다.

먼저 콘센트가 있는 곳에서부터 우물 앞 펌프까지 전선을 깔았습니다.

전선은 길을 지나 오르막을 지나 상추밭 옆을 지났습니다. 밭 옆을 지날 때는 땅을 파서 흙으로 단단히 묻고, 시멘트 벽돌을 지날 때면 망치로 두들겨 홈을 파서 묻었습니다.



펌프 가까이 전선이 지날 자리에 풀이 많이 자라 있었습니다. 스님은 전선을 플라스틱 관에 넣고 관 속에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입구에 비닐을 뭉쳐 꼭 끼워주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주워둔 물건들이 다 도움이 되었습니다.

펌프와 전선을 잇는 부분이 혹시 물에 젖거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플라스틱 물병에 넣었습니다. 펌프 전선이 들어갈 수 있도록 병 아랫부분을 칼로 자르고 병뚜껑에도 전선이 지나갈 수 있도록 구멍을 뚫었습니다.


전선의 끝은 전기를 꽂는 플러그였는데 분리해서 콘센트로 바꿔주었습니다.


그리고 펌프의 전원 선을 꽂아주었습니다.

“자, 이제 전기를 연결해보세요.”

호스로 물이 세차게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스님은 텃밭에 골고루 물을 주었습니다.

매일 텃밭에 물을 주어야 했던 행자님이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습니다.

그런데 펌프와 호스의 연결 부위에서 물이 많이 샜습니다. 스님은 나사를 풀어 헐거운 부분에 테이프를 감아주고 다시 나사를 조였습니다.


다시 한번 전기를 연결해보니 이제 물이 새지 않았습니다.

“경상도 말로 일을 야물딱지게 했어요.”

전선 연결을 야물딱지게 마치고 스님은 또 하나의 실험을 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목에 제피나무가 길을 막을 정도로 자라 있어서 어제 가지치기를 했었습니다. 제피나무 가지를 버리지 않고 벌레퇴치제를 만들어보았습니다. 제피나무에는 소량의 독이 있어 제피나무 근처에는 벌레가 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 점을 이용해 실험을 해보기로 한 것입니다.

제피 잎과 열매를 물과 함께 갈아준 다음 체에 걸렀습니다. 고운 체에 세 번 거른 다음 물뿌리개에 담아 작물에 뿌려보았습니다.


요즘 벌레가 많이 생긴 브로콜리에 뿌려주었습니다.

“과연 효과가 있을까?”


스님은 흥미진진한 얼굴로 이리저리 초록색 물을 뿌려주었습니다.

벌레가 많이 생기는 과실나무에도 뿌려주었습니다.


“아이구, 덥다.”

땀이 흠뻑 났습니다. 문제점을 찾고 해결책을 연구하다 보니 농사가 놀이가 되고, 놀이가 수행이 됩니다.

10시부터 생방송 촬영이 있기 때문에 서둘러 일을 마무리 짓고 간단히 씻은 후 수련원으로 갔습니다.

생방송 카메라 앞에 앉은 스님은 환한 웃음과 함께 인사를 건네고 곧바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 강의 주제는 ‘천일결사 맛보기’입니다.

스님은 지난주에 삼귀의, 수행문, 108배, 명상, 경전 독송까지 설명을 다 했고, 오늘은 정토행자의 서원부터 설명을 이어나갔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이면 단지 하나의 지식이 되지만, 체험적으로 받아들이면 지혜가 됩니다. 천일결사 기도는 붓다의 가르침을 체험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설계된 프로그램입니다. 지난번에 참회, 명상, 경전 독송까지 말씀드렸는데, 천일결사 기도를 하면 이렇게 계정혜 삼학을 매일 조금씩 닦아 나갈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내가 행복해지고 자립적인 삶을 살기 위해 정진하는 내용입니다. 다음은 정토행자의 서원을 읽습니다. 원은 ‘내가 뭐 먹어야지’ 하는 욕심과는 다릅니다.

‘이러한 좋은 법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 그들도 자유와 행복으로 나갔으면 좋겠다.’

이것을 ‘원’이라고 합니다. 정토회는 현대 사회를 이렇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인류는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라는 중대한 위기에 처해 있다.

지구적으로 보면, 인간이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삼아서 인간의 편리를 누렸지만 결국 내 몸의 일부를 파괴해서 기후변화 등 엄청난 재앙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구환경 파괴가 가장 큰 문제가 됐습니다.

인류 세계를 보면, 국가와 국가가 경쟁하고, 전쟁을 치르면서 약탈을 하고, 인종차별을 하여 인류 공동체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는 가진 자가 갖지 못한 자를 억압합니다. 성차별, 인종 차별, 계급 차별 등의 차별로 공동체가 붕괴하고 있습니다. 가장 작은 공동체인 가정마저 부부갈등이 심하고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대화마저 단절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부 개인주의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개개인으로 돌아오면 어떻습니까? 개개인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몰라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자아 상실이라고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인간성이 상실되어 마땅히 해야 할 기본적 도리도 안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폭력을 행사하고, 남의 물건을 뺏고, 성폭행하고, 사기 치고, 욕설하고 술이나 마약에 취해서 헤매고, 이렇게 자기 삶도 유지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타인에게 해를 끼칩니다. 때로는 살인을 하고, 때로는 자살을 하고, 이런 것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수만 가지 문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인간성 상실, 공동체 붕괴, 자연환경 파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이런 큰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 속에서 그 해답을 찾고자 한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참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게 하는 가르침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와 행복을 체험하고 증득하게 하는 것이 바로 인간성을 회복하는 길입니다. 타인도 나와 같기에 그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사람과 사람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좋은 벗들의 관계입니다. 그래야 평화로운 사회가 됩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 삶의 토대입니다. 연기적 세계입니다. 서로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더 이상 자연을 정복의 대상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해야 합니다. 이런 내용들이 부처님의 근본 가르침 속에 다 녹아있습니다.

나아가 중생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여기고 스스로 사바세계와 지옥 속으로 뛰어들어 중생을 구제하시는 대비 관세음보살님과 대원 지장보살님의 원력을 본받아 일체중생을 구원하는 대승 보살이 되고자 한다.

우리는 내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하나님, 부처님께 도와달라고 합니다. 자기가 가게를 열어 놓고 부처님께 장사가 잘 되게 해달라고 빌고, 자기가 결혼할 상대를 부처님께 구해달라고 하고, 자기가 운전면허 시험을 보면서 부처님께 시험에 붙게 해달라고 빕니다. 운전을 하려면 스스로 기술을 터득해야 하고, 공무원이 되려면 스스로 그만한 지식과 기술을 갖춰야 하고, 결혼을 하려면 내가 상대에게 맞춰야 합니다. 장사가 잘 되려면 품목을 잘 정해서 그만큼의 서비스를 해야지 부처님이 해 줄 일이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내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헤매는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여력이 된다면 오히려 내가 그들을 도와줘야 합니다.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원을 세우신 분입니다.

‘이 세상에 힘들어 도와달라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사람이든 그 고통을 알고 도와주겠다’

그래서 별명이 손이 천 개, 눈이 천 개라는 의미인 천수천안입니다. 모르는 게 없고 못 하는 게 없는 전지전능하신 분입니다. 내 문제를 남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가 요청을 하면 기꺼이 가서 도와주겠다는 것이 ‘관세음보살의 원’입니다. 우리도 관세음보살님을 조금씩 닮아가고자 매일 이렇게 정진을 하는 겁니다. 일체 중생은 고사하고 우리 가족에게라도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자는 원을 세워 보는 거죠.

그럼 지장보살님은 어떤 원을 가졌을까요? 우리는 나쁜 짓을 해놓고도 지옥에 안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지장보살님은 늘 좋은 일만 해서 천상에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이렇게 원을 세우셨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의 고통을 내가 대신 겪고, 그들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겠다’

이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늘 좋은 일만 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아야 할 사람인데, 나쁜 일을 해서 감옥에 갇혀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비난을 받고 감옥을 가고, 그들을 다 구제하고 나서 자신은 마지막에 성불을 하겠다고 원을 세운 겁니다.

그래서 이런 관세음보살님과 지장보살님의 원을 내 삶의 원으로 삼고자 매일 이 서원을 읽습니다. 세계를 연기적으로 보기 때문에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으며, 내가 잘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의 잘못마저도 감싸는 그런 사람이 되겠다는 원입니다.”

이어서 정토회 천일결사의 10대 목표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10대 목표 중에 다섯 번째 목표인 모둠 활동으로 모자이크 붓다를 실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모둠 활동으로 모자이크 붓다를 실현한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어야 수행자가 아니라 자유롭고 행복하겠다는 큰 마음을 내서 활동하는 사람이 수행자입니다. 여러분은 내 전부를 바치지는 못하지만 내 일상 중에 조금이라도 시간을 내서 봉사하고 보시해서 붓다라는 인격의 한 조각이 되겠다고 마음을 낸 사람들입니다. 내 개인은 붓다가 될 역량이 못되지만 우리가 힘을 합하면 정토회가 하는 일이 붓다가 하는 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모자이크 붓다’라고 합니다. 경상도 사투리로는 ‘어울렁 부처’입니다. 혼자서는 부처가 못되지만 어우러져서 더불어 부처는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보시와 봉사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매일 천 원의 나눔

“이렇게 수행으로서의 기도가 끝나면 보시를 합니다. 세상에는 천원이 없어서 굶주리거나, 병들고, 학교에 못 가는 많은 아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하루를 시작할 때 이렇게 기준을 세우는 겁니다.

‘오늘 적어도 한 사람의 생존을 위해 천원은 먼저 보시를 하고, 나머지 돈을 갖고 살아가겠다.’

내가 다 쓰고 남은 돈을 보시는 게 아니라 먼저 1달러에 해당하는 천 원을 보시하고 남는 돈으로 내가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 천 원을 매일 보시하고 모아서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전법을 하는 데 쓰는 겁니다.

하루 한 가지의 선행

그리고 하루에 한 가지는 남을 위해 봉사를 하겠다는 마음을 냅니다. 전철을 타고 가다가 자리를 양보하거나, 등산을 하다가 쓰레기를 줍는 등 의도적으로 하루에 한 가지는 좋은 일을 하겠다는 다짐을 하고 실제로 행합니다.

이렇게 해서 매일 새벽 5시부터 6시까지 하루를 시작하는 한 시간의 기도를 마칩니다. 앞으로 여러분들은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한 시간은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나머지 시간을 갖고 내 생활을 하거나 아내나 남편을 위해 도움을 주는 데 씁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게 나인데 나 자신은 팽개치고 남을 위해 살다가 배신당했다 후회하고 그러잖아요.

‘나 자신을 행복하고 자유롭게 하는 것에 큰 목표를 두고, 그것을 기초로 하면서 나만 아니라 남도 자유롭고 행복해지는 데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 물질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조금이라도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삶을 실천하면서 살겠다.’

이렇게 도움받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 주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하면서 하루를 시작합니다. 이런 기도를 천일 동안 한다고 해서 ‘천일결사’라고 합니다.

이것은 누구의 꾐에 빠져서 복을 빌려하는 게 아니라 바로 이것이 내가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자유롭고 행복한 길로 나아가서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임을 분명히 하는 것이 ‘불’이고, 그러려면 진리에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 ‘법’이고, 나도 모르게 환상에 빠지기 때문에 깨어있는 연습을 꾸준히 하는 것이 ‘승’입니다. 여러분은 ‘승’에 해당하는 수행자입니다. 그래서 꾸준히 연습을 해 나가야 합니다.

오늘 강의가 끝나면 연습을 해봅니다. 일주일 뒤인 6월 14일 일요일에 제10차 천일결사의 두 번째 백일기도를 시작합니다. 오늘부터 연습해서 일요일 입재식에도 참가해 봅니다. 그래서 내 삶도 변화시키고 다른 사람의 삶도 변화시키는 일을 함께 해나가 보시기 바랍니다.”

생방송이 끝나자마자 스님은 옆방에서 열리는 두북특별위원회 회의에 참석했습니다.

법사님들은 분과별로 준비한 발표 자료를 인쇄해서 책상 위에 올려둔 후 스님이 도착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스님이 강당에 들어서자 회의 대중은 선 채로 삼배를 한 후 회의를 시작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주제로 토론을 하나요?”

“온라인정토회 분과에서 쟁점이 많이 올라와 있습니다. 하루 종일 온라인정토회 운영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아요. 시작해 봅시다.”

그런데 발표 자료를 보자마자 스님이 한마디 했습니다.

“이렇게 인쇄를 하면 잉크가 너무 많이 소모되잖아요. 모니터로 보여주는 게 아니라 인쇄를 하는 용도라면 피피티를 만들 때 배경에 색깔을 넣으면 안 돼요. 잉크를 아껴야죠.”

“네, 다음부터는 주의하겠습니다.”

스님과 함께 지내다 보니 작은 것에서 배우는 점들이 참 많습니다.

정토불교대학, 경전반을 온라인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에 대해 다양한 쟁점들이 안건으로 올라왔습니다. 오후 내내 토론에 토론을 거듭했습니다. 최종적으로는 내일 저녁에 전국대의원들과 온라인 간담회를 갖기로 하고 토론을 마쳤습니다.

저녁에는 여름 명상수련을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방안에 대해 세부적으로 검토했습니다. 회의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저녁예불을 했습니다.


저녁예불을 마치니 8시 15분이었습니다. 곧이어 농사팀 행자님들과 마음 나누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어떤 알아차림이 있었습니까? 오늘은 1인당 1분씩 말하기를 연습해 보겠습니다. 1분 동안 마음은 조급하지 않게 천천히, 충분히 자기를 표현해보세요.”

차례대로 돌아가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생방송 즉문즉설을 앞두고 있는데, 내가 원하는 대로 준비가 잘 안 되어서 마음이 답답합니다.”

...

평소에 3분씩 말했는데, 오늘은 1분이 주어지다 보니 조금씩 서두르는 분위기가 되긴 했지만, 처음으로 15분 만에 마음나누기를 마쳤습니다.

마음 나누기를 다 듣고 나서 스님은 일이 뜻대로 안 되어서 마음이 답답하다는 행자님의 이야기에 대해 한 말씀을 해주었습니다.

“행자님이 일이 뜻대로 안 되어서 답답하다고 하셨는데,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마음이 답답해지는 이유는 욕심 때문입니다. 수행자라면 이렇게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일이 안 되면 연구를 계속하면 되지 왜 마음이 답답할까요?

마음이 답답해지는 이유

기술도 없으면서 기술이 있는 척하려 하거나, 열 번 할 일을 한 번 만에 해치우려 하기 때문에 답답한 겁니다. 쉽게 하려 하기 때문에 마음이 답답해지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저렇게 해보고, 저렇게 해서 안 되면 이렇게 해보면 되는데, 마음이 답답하다는 것은 욕구와 현실이 안 맞아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겁니다.

일이 잘 안 되어서 답답할 때는 항상 수행적 관점에서 다시 살펴서 답답함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공부를 해나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절에 들어와 살면서도 늘 세상살이만 계속 반복하면서 살게 됩니다. 기술만 갖고 그냥 시간을 보내는 거지, 자기를 해탈시키는 공부를 하고 있지는 않은 겁니다.

우리가 수행공동체를 만들어서 함께 사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세상이나 정토회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입니다. 나 자신이 자유로워져야 돈을 못 벌어도 후회가 없고, 내일 죽는다 해도 후회가 없는 거예요. 나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공부가 안 되어 있으면 어떤 문제가 탁 발생했을 때 후회가 됩니다.

‘10년 동안 밖에서 돈을 벌었으면 많이 벌었을 텐데… 장가도 갔을 텐데… 여기서 사는 동안 건강만 해치고….’

이렇게 후회를 할 게 아니라 오히려 자신감을 가져야 합니다.

‘나는 여기서 돈으로 살 수도 없고, 지식으로도 얻을 수 없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와 행복을 얻었다.’

이렇게 되어야 어떤 일이 발생해도 자신감을 가지고 살 수 있습니다. 이 공부가 되어 있다면, 내가 얻은 것이 워낙 크기 때문에 내일이라도 공동체를 나가서 살게 되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 막일을 해서 먹고살거나, 천막을 쳐놓고 자더라도, 이런 것들은 별로 안 중요해집니다.

‘내가 절에서 10년 살다 나왔지만 거기서 세상 어디서도 못 배우는 행복해지는 법 이것 하나는 배웠다. 나머지는 형편대로 살면 된다.’

이런 마음이 되어야 후회가 없습니다. 경전에 나오는 부처님 제자들이 죽을 때 이야기들을 한 번 보세요. 병들어서 죽는 제자도 ‘후회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고, 살인의 죄를 뉘우치고 수행자가 된 앙굴리말라도 사람들로부터 돌에 맞아서 죽을 때 ‘후회가 없습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경전을 읽을 때 이런 부분을 늘 눈여겨봐야 해요.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가는 방법

여러분이 후회를 하게 되면, 제가 여러분들을 희생시킨 게 되잖아요. 저도 그런 책임은 지기가 싫어요. (웃음) 여러분들이 이곳에서 세상 그 어디에서도 얻지 못하는 것을 얻어서 후회가 없어야 우리들의 관계가 아름다운 관계가 됩니다. 여러분이 이 공동체를 나가더라도 ‘내가 세상 어디 가서도 못 얻는 것을 그곳에서 얻었다’ 이런 자부심을 갖게 되고, 저도 ‘저분이 정토회를 위해서 한 때 참 수고했다’ 이렇게 생각해야 서로의 관계가 좋아집니다.

여러분이 여기서 같이 살고 있을 때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사람이 공동체를 나갈 일도 생기고, 관계가 틀어지는 일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때 이 관점을 놓치게 되면 후회가 생깁니다.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면 후회가 없습니다. 자기 뜻대로 안 되더라도 후회가 없어야 하는데, 마음공부를 제대로 안 하면 항상 후회하게 됩니다.

정토회에 들어와서 살다가 나간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중에 자유와 행복을 얻은 분들은 나가더라도 후회가 없고,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관계가 계속 유지됩니다. 그게 안 된 채 관계가 틀어져서 나가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내 젊은 인생을 정토회에서 낭비했다.’

굳이 싸운 게 아니더라도 관계가 안 좋게 됩니다. 저도 본의 아니게 남을 희생시킨 게 됩니다.

제자가 스승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보답

그래서 여러분이 자유와 행복을 얻게 되면, 첫째, 여러분 개인에게 좋고, 둘째, 그것이 스승에 대한 최고의 보답이에요. 그래야 서로 원수가 안 됩니다. 서로서로 도와주는 복 짓는 관계가 됩니다. 그렇지 아니면 서로 빚지는 관계가 돼요.

우리가 여기에 사는 목적은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농사는 그냥 형편 되는 대로 하는 겁니다. 역할 분장을 하다 보면, 누구는 방송을 담당할 수도 있고, 누구는 사진을 찍을 수도 있고, 누구는 스님의하루를 쓸 수도 있고, 누구는 농사를 지을 수도 있고, 누구는 운전을 할 수도 있어요. 이런 것은 주어지는 형편대로 하는 것입니다.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기고, 저런 일도 생기고, 사람이 죽기도 하고, 비난을 받기도 하고, 갈등이 생길 때도 있고, 온갖 일이 생깁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자유로워지는 것이 우리가 여기에 사는 목적입니다. 명상을 할 때는 ‘어떤 장애가 있더라도 호흡이 여실히 관찰되느냐’ 하는 것이 기준이듯이 ‘이런 속에서 자유로워지느냐’ 하는 것이 수행의 기준입니다.

넘어져도 괜찮아요. 누구나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낼 수 있어요. 하지만 금방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금방 안 돌아오고 꽁 해서 있으면 그게 나중에 후회의 근원이 됩니다.

농사도 잘해야 하고, 일도 잘해야 하고, 다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내가 수행자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수행자로서 농사를 짓는 것이고, 수행자로서 봉사를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로서 한다는 말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 마음이 괴롭지 않도록 자기 관리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관점을 놓치면 자기도 괴롭고 결국은 후회와 원망만 남습니다.

아, 수행적 관점을 놓쳤구나!

우리는 아무런 이해관계없이 만났잖아요. 만나서 서로 덕을 보려고 한 것도 없잖아요. 그러나 아무리 서로 좋은 관계로 만났다고 해도 이 관점을 놓치면 원한 관계가 됩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어떤 여인이 부처님을 너무 좋아했는데, 부처님이 별 볼일 없는 여자를 자기와 똑같이 대하는 걸 보고, 자기에게 특별대우를 안 해준다며 마음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그 여인은 훗날 이웃 나라의 왕비가 되었는데, 어느 날 궁녀들이 재잘거리며 엄청나게 행복한 얘기를 하는 것을 엿듣게 되었습니다. 알고 보니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온 얘기를 하면서 좋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또 그 여인의 마음에 상처가 되었습니다. ‘부처님은 내가 선점했는데’ 이런 생각이 남아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그 여인은 결국 본의 아니게 부처님을 굉장히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부처님은 그 여인에게 아무런 잘못한 것이 없고 오히려 친절하게 대했지만, 그 여인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기대에 부처님이 맞추어주지 않으니까 그런 일이 일어난 겁니다.

우리의 관계를 아름답게 만들어 가려면 수행의 관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이것을 꼭 명심하시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수행적 관점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돼!’ 이런 생각을 하면서 포기하면 안 됩니다. 답답하거나 미워하거나 짜증이 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이것은 수행적 관점을 놓친 것이다’ 하고 제자리로 돌아와야 합니다.”

스님의 법문을 들으며 하루를 닫습니다.

“감사합니다.”

행자님들은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각자 잠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내일은 오전에 농사일을 한 후 하루 종일 두북특별위원회 회의를 할 예정입니다. 저녁에는 전국대의원들과 온라인 간담회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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